힘든 오늘, 아버지 다산은 무엇을 생각하실까.
힘든 오늘, 아버지 다산은 무엇을 생각하실까.
  • 배동현 칼럼니스트
  • 승인 2019.04.04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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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배동현
▲시인 배동현

오랫동안 가정의 중심이었던 아버지들이 밀려나고 ‘엄부자모(嚴父慈母)’라는 말이 낯설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부계사회에서 모계사회로의 이동으로 가정에서 아버지의 위치가 갈수록 작아져가는 이 시대에 만난 책 ‘아버지 다산’은 우리들에게 아버지란 과연 어떤 존재인가 다시금 돌이켜 보게 한다. 다산(茶山)정약용의 이름이야 모르는 이 없겠으나, 그의 시 몇 편을 스치듯 읽은 외에는 조선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큰 학자로만 알고 있는 나 같은 사람에겐 이 책과의 만남은 정말 소중한 필독서였다. 다산 정약용(1762~1836), 그의 일생 가운데 가장 비참했던 순간은 신유사옥(辛酉邪獄)으로 1801년11월 전라도 강진에 유배된 직후였을 것이다. 동네 사람들은 나라에서 금한 사학(邪學) 죄인이라 하여 쳐다보지도 않았다. 거처할 곳이 없어 동문 밖 주막 노파의 호의로 겨우 방 한 칸을 빌릴 수 있었지만, 귀양 온지1년쯤 지났을 때 벼락같은 전갈이 날아들었다. 세 돌을 채 넘기지 않은 막내아들 농(農)이가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나은데도 살아있고 너는 죽는 것보다 사는 게 나은데도 죽었다”고 한탄할 만큼 처참한 생활이었다. 다산이 첫 유배생활 4년을 보낸 곳은 동천여사(東泉旅舍) 사의재(四宜재)였다. 읍내 군청에서 도보로 5분 거리인 사의재는 말끔하게 단장한 모습이었다.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승승장구하다 급전직하로 추락한 다산은 이곳에서 스스로를 추슬렀다. ‘생각은 담백하게 외모는 장중하게 말은 과묵하게 동작은 무겁게’등 네 가지 원칙으로 스스로를 제어하겠다며 방에 ‘사의재’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초라하고 불편한 주막집 객사였을 뿐이다. 다산은 훗날 “여름이면 모기와 벼룩에게 뜯겨 밤잠을 이룰 수 없었던 곳”이라고 술회했다. 두 번째 거처인 고성사(高聲寺) 보은산방(寶恩山房)에 스물둘 장성한 큰아들 학연이 아버지를 찾아온 것이 바로 이때였다. 다산은 아들과 어린제자 황상을 데리고 보은산방에서 주역 공부를 하며 한겨울을 지났다. 둘째 형 정약전이 귀양가 있던 흑산도 쪽을 바라보며 정상에서 시를 지었다. ‘저 먼 곳 바라본들 무슨 도움 있으랴/괴로운 맘 쓰린 속을 남들은 모르리라’ 정약전은 유배에서 풀려나지 못한 채 1816년 흑산도에서 세상을 떠났다. 열다섯 살인 제자 황상이 ‘저 같이 머리도 나쁘고, 앞뒤가 막혔고 분별력 없는 사람이 공부를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이에 다산은 답했다. “항상 문제는 제가 총명하다고 생각하는 데서 생긴다. 너처럼 둔한 아이가 꾸준히 노력하면 구멍을 뚫기는 힘들어도 일단 뚫고 나면 웬만해서는 막히지 않는 구멍이 뚫릴게다.”스승의 말씀을 들은 소년은 일흔 넘은 노인이 돼서도 이 말씀을 새겨 자나 깨나 잊지 않고 노력하는 삶을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다산은 6남3녀를 낳은 다산(多産)한 아버지였으나 그중 6명의 자녀가 요절하는 아픔을 겪었다. 돌을 미처 넘기지 못하고 죽은 자식도 있었으며 더런은 두 살에, 또 두엇은 예닐곱에 아비의 곁을 떠났으니 그 허망함을 어찌 글로 다했을까. 이 책은 18년이란 오랜 세월 동안 척박한 유배지에서 편지로써 자식을 혹독하게 원격 교육했던 강인한 아버지 다산, 스물아홉 꽃 같은 나이에 떠난 며느리를 둔 시아버지 다산, 형인 정약전이 처형된 후 정성을 다해 돌보았던 두명의 조카마저도 17세와 20세에 세상을 떠나보내야 했던 숙부(叔父) 다산의 절절한 사랑과 슬픔의 한(恨)을 그는 유배지에서 그가 남긴 편지와 시구(詩句)들을 통해 조명하고 있다. 유배되기 이전부터 다산의 집안은 질기도록 가난했다. 아내와 자식 걱정에 잠을 이루지 못한 다산이 남긴 편지와 시들은 어느 것이라 할 것 없이, 가슴을 울리지 않는 것이 없다. 그 중 유독 마음을 아프게 한 구절을 소개한다면, ‘손님이 와 대문을 두드리는데/자세히 처다 보니 바로 내 아들이었네/ 수염이 더부룩하나/ 이목구비을 보니 분명한 내아들 이였네/ 너를 그리워한지가 벌써 십여 년/ 꿈에 보면 언제나 어린 아들로 아름다웠다네/ 장부가 갑자기 문전에서 큰절을 하니/ 어색하고 정이 가지 않아/안부 형편도 감히 묻지도 못하고/ 우물쭈물 시간을 끌었다네(하략)/ 강진에 유배된 지 오년 만에 큰아들 학연을 만났을 때의 소회를 토로한 시이다. 여비가 없어 아버지를 찾지 못했던 아들이 수확한 마늘을 팔아 나귀 한 마리를 빌려 아버지에게 왔다. 행색은 완전 거지인데 아들이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았는가? 아들이 무안해 할까봐 차마 묻지도 못했다. 유독 자식에 약 했던 아버지의 심사가 시공을 넘어 절절히 느껴져 온다. 제대로 자식을 돌보지 못한 자책에 시달려 온 아버지 다산, 어느 한 곳 기댈 데 없는 요즘 우리네 아버지와 너무나 닮은 그의 모습이 내 마음을 아리게 한다. 가능하다면 당신에게 ‘아버지 다산’을 한번 꼭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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