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통으로 뒤덮힌 제주 유적지 ‘판서정’
쓰레기통으로 뒤덮힌 제주 유적지 ‘판서정’
  • 김경호 기자
  • 승인 2020.01.17 15: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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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내외방송 김경호 기자)
▲(사진=내외방송 김경호 기자)

(내외방송=김경호 기자) 제주의 역사를 찾아오는 문화 탐방인들의 방문이 이어지고 있는 제주에는 살아 숨 쉬는 원도심 유적지가 많이 있다. 이중 제주 동문시장 8게이트 입구에는 충암 김정(金淨)이 파놓은 우물터인 판서정이 있다.

'판서정'이라는 표석이 세워져 있는 이 곳은 충암 김정이 빗물을 받아 마시는 제주도민을 위해 파놓은 우물터다.

하지만 유적지라고 찾아간 판서정의 모습은 쓰레기통으로 뒤덮여 찾아오는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제주 오현단 방문에 이어 도심지의 여러 유적지를 찾아 역사를 찾아 나서게 되는 탐방객들의 발길은 어김없이 판서정에도 발길이 닿는다. 

제주도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된 오현단은 제주 올레 코스 경유지로 탐방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는 곳으로 충암 김정을 비롯해 송인수, 김상헌, 정온, 송시열 다섯 현인의 제단석이 있다. 다섯 현인은 조선시대 제주에 유배되었거나 관료로 부임해 제주의 풍물과 문화를 연구하고 책을 집필하거나 후배를 양성하는 등 제주 교육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사진=내외방송 김경호 기자)
▲(사진=내외방송 김경호 기자)

충암 김정(金淨)에 대해
충암 김정은 22세로 대과에 장원 급제하고 부재학, 동부승지, 좌승지, 이조참판. 도승지, 대사헌 등을 거처, 34세에 형조판서가 된 뛰어난 학자이자 문신이다. 그러나 1520년(중종15년) 8월 기묘사화에 연루돼 제주로 유배되어 1년 남짓 제주에서 귀양을 보낸 그는 제주도민들이 빗물을 받아 마시는 것을 보고 내팟골에 우물을 파고 깨끗한 물을 마시도록 했다. 사람들은 그가 형조판서를 지냈으므로 이 우물을 ‘판서정’이라 부르며 그의 공덕을 기렸다고 한다. 

유배생활을 하면서도 제주도민들의 생활상을 살폈던 충암은 제주지역의 풍토와 자연, 생활상 등을 생생하게 그려낸 ‘제주풍토록’도 남겼다. 또 당시 미신이 성행하고 뱀을 비롯한 동물들을 숭배하는 음사(淫祀) 풍속이 있었던 제주도민들에게 관혼상제 예절을 가르쳐 도민들의 삶을 조금씩 변화시켰다고 한다.

그의 나이 36세가 되던 1521년 10월 30일, 제주에서 사약을 마시고 사사된지 1년이 지나 시신을 수습해 탑산마을 뒤편에 안장했다. 대전광역시 동구 내탑동에 위치한 탑산마을은 김씨만 22가구가 살았던 집성촌이었다. 1975년 대청호가 착공되면서 수많은 민가가 수몰되었고 그와 함께 상당수 문화유산도 물 속에 잠겼다. 그 가운데 1978년 대청댐 담수를 앞두고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은 충암 김정의 묘소를 비롯해 사당. 강당, 은진 송씨 정려각, 신도비 등 충암의 사적은 신하동 욧골로 옮겨졌다.  

기묘사화란?
기묘사화는 조선 4대 사화 중 하나로 조광조를 비롯해 김식, 박훈, 김정, 김구, 박세희, 기준 등 젊은 신진 관원들이 목숨을 잃게 된 사건이다. 

폭군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의 공신들이 조정의 요직을 차지하게 되는데, 아무런 공도 없는 이들 또한 자리를 탐하는 일이 발생하며 조정의 질서가 어지러워졌다. 이에 중종은 공신이 아닌 새로운 인물인 조광조를 통한 개혁 정치를 시행하게 된다. 하지만 위훈 삭제, 소격서 폐지 등 조광조의 급격한 개혁 정치로 인해 중종과의 틈이 벌어지게 된다. 이 틈을 이용해 훈구세력이 ‘주초위왕’ 사건을 모의하게 된다. 주초위왕은 나뭇잎에 꿀로 글씨를 쓴 것인데, 속뜻은 '조씨가 왕이 된다'는 것으로 기묘사화의 원인이 되었다. 이 사건은 훈구파가 조광조를 몰아내기 위해 꾸민 모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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