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와 박쥐 그림이 코로나19 감염의 부적이 될 수 있을까!
쥐와 박쥐 그림이 코로나19 감염의 부적이 될 수 있을까!
  • 전기복 정책위원
  • 승인 2020.06.15 12:4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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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외방송=전기복 정책위원) 요즘 코로나19 감염이 우환(憂患)이다. 사회적 걱정꺼리를 넘어 국제문제로, 안전보건뿐만 아니라 경제, 안보영역까지 영향을 미친다. 고흐가 이러한 현재 시기에 살았다면 코로나19 감염증의 실상을 어떻게 그림으로 표현했을까?

시기 엄중한데 ‘무슨 생쥐 같은 소리냐’ 일축할 수 있다. 그러나 불안과 공포의 도가니에 문화적 힘으로 평정심과 여유를 찾아보자, 사실인즉 문학이나 예술적 시각이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사회상의 밑바닥에 흐르는 문제를 예견하거나 그 실상을 꿰뚫고 본질을 노래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고흐라면 그의 그림은 어떠했을까 궁금증이 인다.

먼저, 고흐의 그림에서 흑사병이나 지금의 코로나19 사태와 연관시켜볼 수 있는 재난 그림은 있을까? 그의 작품 900여점을 확인한 결과 아쉽게도 찾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 코로나19는 박쥐, 이래저래 ‘쥐’가 중간매개체였다면 중세 흑사병은 야생쥐, 간접적인 이미지인 ‘쥐’를 그린 고흐의 그림으로 대신해 볼 수 있다. 결과는 ‘쥐 두 마리’(1884.11)와 ‘박제한 박쥐’(1886년 하반기)라는 두 작품을 찾을 수 있다.

그림 ‘쥐 두 마리’는 부모가 살고 있는 누에넨에 정착한 지 약 1년이 경과한 시점에 그린 그림이다. 직조공과 농가를 찾아다녔고, 맥주잔․병․주전자 등을 주제로 정물화에 심취했던 시기의 그림이다. 우리네 시골에서 본 쥐 모습 그대로를 표현한 작품이며, 바닥에 놓인 먹이를 두 마리가 붙어서 먹고 있는 모습이다. 쥐와 배경은 검고 잿빛이며, 먹이 놓인 원반, 타일 바닥은 달빛인지 반사된 빛에 흰빛을 띠나 전반적으로 어두운 분위기이다.

‘박제한 박쥐’는 파리 시절 그림으로, 펼친 날개로 화폭 가득 차게 박쥐를 그렸는데, 전경이든 배경이든 박쥐 한 마리가 전부다. 다소 인상적인 것은 펼친 날개 빛이 핏빛이고 밤의 이미지를 연상하게 하는 검붉은 색 배경처리이다.

혹여, 두 작품의 주제를 하찮다고 생각하는 독자는 난감 그 자체일 것이다, 그가 그린 그림이 코로나19 창궐과 같은 상황에서 그려졌다는 상상 속 나의 고흐에 대한 변명은 이러하다. 서민의 생활상을 느낀 그대로 그리기를 좋아한 그는 코로나19 참상 속에서 고통 받는 서민들의 애환을 모른 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인의 공적이 된 바이러스의 숙주인 쥐와 박쥐, 그것들로 주제가 자연스럽게 확장된 것은 당연하고, 그의 인간애는 그림 그 자체로 고통을 치유할 수 있는 부적인양 쥐와 박쥐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기억은 중세 유럽의 흑사병, 근세의 스페인 독감 그리고 최근의 신종 플루, 에볼라, 지카바이러스까지 이른다. 특히, 유럽 흑사병은 파스퇴르(1822–1895)가 전염병의 원인과 예방법을 고안하기까지 14세기부터 1840년대까지 간헐적으로 창궐했다. 고흐는 네덜란드 1853년생으로 그러한 시대를 비켜났다.

따라서 가능한 것은 코로나19 감염증이 창궐하는 이러한 시기에 삶을 영위하는 고흐라면 신종 코로나 사태와 같은 상황을 그림으로 어떻게 표현했을까? 아니면 그저 지나쳐 버려 그 무엇도 남기지 않았을까를 상상해 보는 것이다. 후자를 먼저 언급함이 더 바람직하다. 그는 본 것을 느끼는 대로 그리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볼꺼리에 관심이 많았고 그림으로 기록을 남겼다.

예를 들면, ‘화가의 작업실에서 본 목수의 작업장’(1882.5), ‘복권판매소’(1882.9), ‘목재경매’(1883.12), ‘타라스콩 마차’(1888.10), ‘아를의 댄스 홀’(1888.12), ‘아를 경기장의 관중’(1888.12), ‘오베르 읍사무소’(1890.7.14.)와 같이 사실적인 모습을 주제로 한 작품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고흐는 어떤 행태로든 자신이 처한 재난상황이 있었다면 그것을 그림으로 남겼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흐가 코로나19 감염증이 만연한 지금의 모습을 그린다면 어떤 모습일까? 그의 말 “시골아낙들을 그릴 때면 그 그림이 시골아낙이 되기를 바라고, 창부들일 경우는 창부가 표현되기를 바란다.”(1885.12.28., 테오에게)

이를 재해석해 나만의 답을 내어 본다. 신종 폐렴에 걸리거나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을 그릴 때면 그 사람에서 절망과 불안을 느끼게 할 것이고, 사물로 표현할 때면 참상의 피참함이 묻어나기를, 그리고 은유적 표현이라면 자연 앞에 초라하게 선 한 인간을 표현했을 것이라고. 그렇다면, 이러한 감정을 잘 표현할 수 있는 기존 그림에는 어떤 그림이 있을까?,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해 보자.

첫째, 사람을 표현한 그림이라면 ‘슬퍼하는 노인’(1890.4-5월경)이다. 부제 ‘영원의 문에서’로 명명된 작품으로, 2019년 12월 26일 영화 ‘고흐, 영원의 문에서’(감독 줄리안 슈나벨, 고흐역 윌렘 대포)로 개봉된 바 있다. 한 노인이 의자에 앉아 깊은 절망 속에 잠긴 듯 두 팔을 올려 얼굴을 감싸고 있다. 신종 폐렴으로 사망한 아내, 격리 수용된 자식, 혼자된 노인의 절망감과 생존에 대한 불안감을 잘 표현한 작품으로 재해석해 본다.

둘째, 사물을 그린 그림이라면 ‘아를의 병원 병동’(1889.4)이 제격이라는 생각이다. 고흐가 자신의 좌측 귀를 자른 이듬해인 1889년 입원한 병원 병동을 그린 그림이다. 병동 좌우측에는 흰 천으로 칸막이 되어 있고, 칸마다 환자용 침대가 놓여있다. 병동 입구에는 난로가 놓여있고, 환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담소 중인 그림이다. 이렇게 상상해 보면 어떨까. 신종 폐렴환자가 입실한 병실, 침대마다 산소호흡기를 단 환자들이 숨을 거칠게 내쉬며 고통스러워하고 난로 주위는 모임이 통제되어 사람 없이 쓸쓸하게 그려진 그림이다.

셋째, 은유적인 표현을 쓴 그림이라면 어떤 그림이 나올까! 나는 단연코 한 작품, ‘가지치기한 버드나무가 있는 풍경’(1884.4)을 떠올린다. 들녘 주변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가 늘어 서 있다. 버드나무 앞에는 바지 주머니에 오른손을 넣고 나무 하단부를 응시하는 한 남자가 서 있는 그림이다.

나의 상상은 이렇다. 매년 가지치기한 탓에 가지 끝부분은 아령을 매단 듯한 모양새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녹슨 왕관덩이마냥 울퉁불퉁하게 튀어 올랐다. 나무는 코로나19에 노출된 우리들 자신이고, 이른 봄 가지치기 당한 끝부분은 감염자처럼 잘려 죽거나 격리된 가족들이며, 살아남은 자가 바라보는 처참한 참상 그리고 그 앞의 초라하게 선 한 인간의 절망을 표현한 작품일 것이라고.

좌충우돌 이상한 상상력의 긴 여정이었다. 독자의 인내력을 테스트를 하는 건 아니지만, 결론이 그렇게 됐다. 양해를 부탁하며 하나라도 의미 있는 정보를 얻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특히 고흐의 작품 ‘쥐 두 마리’와 ‘박제한 박쥐’ 그림이 코로나19 창궐로 온 국민적 관심이 쏠린 엄중한 시기에 역설적으로 부적 같은 역할이 되길 소망한다. 어려운 시기일수록 문화예술로 고양된 내면의 힘으로 평정심과 여유를 갖는 치유의 시간이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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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복 2020-06-16 13:20:27
땡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