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를의 댄스홀과 사회적 거리두기
아를의 댄스홀과 사회적 거리두기
  • 전기복 정책위원
  • 승인 2020.06.17 10:38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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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외방송=전기복 정책위원) 이태원 클럽에서 촉발된 코로나19 재확산 여파가 심상치 않다. K방역의 탁월함으로 이 또한 안정세를 찾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사회적 거리두기가 엄중하게 시행되던 시기에 ‘모여서 춤추는 게 죄는 아니지 않는가!’라는 식의 일부 젊은 층 반응이 못내 아쉽고 낯설 게 느껴진다.

조금은 생뚱맞지만, 고흐의 그림 측면에서 ‘낯설다’는 것을 적용해보면 단연 ‘아를의 댄스홀’(1888. 12월경)이다. 주제 선택의 낯섦뿐만 아니라 그린 방식과 기법도 이전․이후의 그가 그린 그림들과는 사뭇 다르다.

이태원 클럽발 코로나19의 재확산 우려라는 어려운 시기에 예술적 댄스홀로 초대하니 그림 속 댄스홀(클럽)에서 부디 평정심과 여유를 갖길 기대해 본다.

고흐는 왜 아를의 댄스홀이라는 사교장에 갔을까? 사회적 거리두기도 없던 시기, 도시였으니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흐는 사교적인 성격이 못됐다. 즐기러 댄스홀에 간 것은 아닐 듯싶다. 그렇다고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간 것은 더욱 더 아니었을 것이다.

‘아를의 댄스홀’은 고흐가 고갱과 함께 남프랑스 아를에서 생활한 시기에 그려진 그림이다. 고갱이 고흐를 찾아 아를을 방문한 1888년 10월 23일부터 그가 고흐 곁을 떠난 그해 12월 23일 중 마지막 며칠에 해당하는 시기에 그려졌다.

고흐와 고갱은 많은 것이 달랐다. 까칠하고 무던하고 현실을 재현해서 그리는 개념과 머릿속에서 상상해서 그리는 방식의 차이 등 모든 면에서 일치되는 부분이 없었다. 그림에 대해 논쟁을 할 때면 탈진상태에까지 갈 정도였으니 둘 사이에는 시간이 흐를수록 팽팽한 긴장감만 높아갔다. 그때쯤 간 댄스홀 폴리아를레시언이다.

11월에서 12월로 넘어오면서 날씨가 고르지 못해 집에 머문 시간은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고흐와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나는 만큼 고갱은 ‘아를을 떠나겠다’는 생각을 굳혀갔고, 고흐는 화가공동체를 꿈꾸며 고갱이 계속해서 아를에 머무길 바랬다. 개인적 생활 취향이 다르다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그림에 대한 지향점이 너무나 다른 두 사람이었다. 고갱을 계속 머무르게 할 어떤 묘안이 있을 수 없었다.

‘내가 네 취향에 맞추면 되잖아, 그렇게 하마’ 떠나는 연인을 잡는 심정으로 12월 1일 고갱과 함께 들렸던 폴리아를레시언의 댄스홀을 대형 캔버스에 옮긴다. 하소연의 그림, 이런 장면이 있었지라는 기억 외엔 자기 생각이 반영되지 않은 그래서 ‘낯선 그림’이 된 ‘아를의 댄스홀’이라 이야기하고 싶다.

이쯤에서 그림을 보자. 전경에는 아를 여인의 뒷머리로 가득하고, 배경에는 발코니와 동양식 종이등이 노랗게 선명한 아래 댄서들로 발 디딜 틈이 없는 장면이다. 요즘 문제가 됐던 클럽도 이런 모습이었을 터.

대충 보아도 고갱다운 그림이다. 현장에서 대상을 바라보면서 그림을 그리던 고흐가 약 2주 전의 경험을 머릿속으로 상상하면서 그렸으니, 고갱의 방식, 즉 머리에서 나온 대로 작업, 실제가 아닌 댄스홀에 대한 하나의 관념적 그림이라는 점이 그렇다.

표현방식도 선명한 색상대조를 포기하고 오글오글 주름진 판화 같은 고갱의 미묘한 색면 색점 등을 강조해 차분하고 정지된 화면 느낌이다. 소용돌이치듯 한 열정까지는 아니더라도 손 하나를 그려도 동적인 모습을 담아내기 위해 무던히 반복해서 그리고 연습하던 고흐였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얼굴 표정을 단순화하거나 지워 상기되거나 흥에 겨운 느낌을 전달받기에는 한계가 있고, 지극히 평면적인 화면처리는 떠들썩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있다. 마치 출근길 만원 지하철 내에서 게슴츠레한 눈으로 핸드폰만 내려보는 듯한 모습이다.

조금이나마 위안을 주는 요소는 전경 아를 여인들의 머리 리본과 동그랗게 말린 머리채는 감각적인 곡선을 이루고, 피부색이며, 모자, 의상에서 노란 계열의 색상이 밝은 인상을 준다는 점이다.

재미있는 표현은 그림의 우측 상하단 부분에서 제복인지는 확연하지 않으나, 주아브인 군인들이 착용하는 빨간색 부대 모자를 쓴 사람, 그 앞에 선 유독 실제 인물같이 표현한, 그래서 룰랭 부인과도 닮은 올림머리 모양새며, 피부톤, 눈과 코의 생김새를 한 여인의 두드러져 보이는 모습이다.

같은 해 11월 말에서 12월경 집중적으로 우체부인 룰랭의 아기며 아내를 집중적으로 그렸던 시기라는 점을 오버랩해 볼 때 상상 속에서 그리는 한계를 그나마 극복할 수 있었던 인물은 최근에 초상화로도 그린 롤랭부인의 얼굴이지 않았겠느냐는 생각이 든다.

그마저도 신중하게 붓질해 윤곽선이 강한 요소들로 채워졌다. 그래서 낯설고 고갱이 그렸다고 해도 믿을 만한 그런 그림이다. 고갱의 종합주의에 영향을 받은 고흐의 몇 안 되는 그림 중 하나다.

‘화가 반 고흐 이전의 판 호흐’(2016. 민음사. 최준영 역)의 작가 스티븐 네이페와 그레고리 화이트 스미스는 “거장 고갱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그러한 그림을 그렸다”고 적은 바 있지만, 고갱이 노란 집에 계속 머물기를 바라는 고흐 입장에서 논쟁과 긴장감보다는 그의 화풍을 인정하겠다는 표현이지 않았을까.

지금 우리 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바이러스는 기침할 때 나오는 수포로 쉽게 감염돼 방역당국의 골머리를 아프게 하고 있다. 그러나 고흐와 고갱의 생각 바이러스는 달랐다. 노란 집에서 함께 살면서 같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서 잠시 ‘아를의 댄스홀’ 등과 같은 그림으로 영향을 주고받았지만, 가치관과 그림에 대한 철학은 그렇지 못했다.

이런 이유로 고갱은 아를을 떠나겠다는 의사를 접는가 싶더니 그 유명한 고흐의 귀 사건과 함께 그해 12월 23일 고흐와 결별하고 며칠 뒤인 12월 26일 아를을 완전히 떠나게 된다.

일필휘지와 같은 고흐의 그림과는 사뭇 다른 ‘아를의 댄스홀’은 그렇게 탄생했다. 고갱을 잡아 두고자 몸부림치는 심정으로 그렸을 ‘아를의 댄스홀’을 감상하면서 자연스럽게 집콕이라는 사회적 거리두기로 마음의 평정과 충만함으로 코로나19를 우리 사회, 이 세상으로부터 떼어내는 데 일조하는 그런 시간이었기를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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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 2020-06-18 00:23:03
잼나게 연관시켰네요.

배트맨 2020-06-17 13:37:19
이태원과 아를,
댄스 홀과 사회적 거리 두기.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