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학교·교육의 100년 역사를 한눈에...‘서울학교 100년’전
서울 학교·교육의 100년 역사를 한눈에...‘서울학교 100년’전
  • 이지선 기자
  • 승인 2021.01.12 20: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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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교육을 이끌어낸 어른들의 지혜와 흥미진진한 교육의 산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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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학교 교육과정과 근대기의 교과서. (사진=내외방송 이지선 기자)

(내외방송=이지선 기자) 서울 학교 100년을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서울학교 100년’전은 광화문에 위치한 서울역사박물관에서 2020년 11월 26일부터 2021년 3월 7일까지 열리고 있다.

근대 교육이 처음 시작된 1880년부터 1980년까지의 100년 학교와 교육을 보여주는 ‘서울학교 100년’은 지금까지 기증받은 학교 관련 자료 중에서 서울 시민 40명의 유물을 선택해 전시했다.

교육의 시작 즉 개화기에는 외국인 선교사들, 그 시대에 이미 깨어 있던 선각자들 등에 의해 시작됐다. 가장 먼저 설립한 학교는 소학교와 외국어학교로 초등기관에 속한다.

1883년 설립된 원산학사, 1886년 설립된 육영공원 등이 대표적이다. 근대화 개혁은 근대화를 위해 신분제와 과거제도의 폐지가 담겨있었고, 인재양성을 위한 신교육의 이념이 포함됐다. 근대기의 교과서를 보면서 그 당시 지식인들의 학구열과 배움의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이번 전시회에서는 학무아문과 학부에서 발간한 근대 교과서가 눈길을 끌었다.

그 당시의 교육열은 다른 나라와의 조약을 체결하고 통상관계를 갖게 됨으로 외국의 언어와 문화를 아는 통역관과 외교관을 양성하기 위함이었다.

근대적 교육제도가 도입된 이후 가장 먼저 설치한 학교가 외국어 학교였고, 일어, 영어, 불어 등 6개 학교로 분교했다가 1906년 기존에 분립됐던 외국어 학교를 다시 관립한성외국어학교로 통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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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 때의 교과서. (사진=내외방송 이지선 기자)

1910년 일제에 의한 ‘우민화 교육’이 시작됐고, 일제는 조선인과 일본인에게 차별적인 학제 도입, 기존에 설립됐던 사립학교들을 탄압했다. 여기에 대항하는 우리의 교육구국운동 과정 등을 상세히 알 수 있었다. 우리 민족의 높은 교육열에 학교 설립과 차별금지 요구가 빗발쳤고, 근대교육으로 자식들을 지도층으로 출세시키려는 부모들의 학구열은 이 때부터 시작됐다. 차별과 어려움을 딛고 학교를 다녔던 당시 학생들의 모습들도 엿보인다. 한 가지 특이했던 점은 수학여행이라는 개념이 우리나라와 일본 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직까지도 수학여행이 남아있다는 것은 분명한 일본의 잔재이다.

광복이 되자 새로운 시대의 지도이념인 민주주의에 입각한 교육을 시작했다. 아울러 미군정의 영향으로 미국식 교육제도를 받아들이고, 교육의 기회균등이 보장되도록 했다. 초등교육 의무화시대가 열렸고, 다음 단계로 중학교의 입시가 과열되기에 이르렀고 1969년부터는 중학교 무시험제도를 시행해 과열경쟁을 일소하기도 했다. 1974년에는 ‘고교평준화정책’을 추진해 고교 입시의 폐해를 없애려고 노력했으나 고도 경제성장기에 실시된 교육 정책은 한국인의 교육열과 결합해 한국사회의 교육팽창을 야기하는 결과를 낳았다.

초등학교 의무교육은 시작되자 닥쳐온 6·25전쟁 등 때문에 실질적 시행이 늦어졌고, ‘의무교육완성 6개년계획’을 추진, 1959년에 이르러서야 초등학교 취학률 96.4%를 달성한다. 그러나 이 때만해도 완전한 의무교육을 시행하지 못하고, 학부모들에게 기성회비 즉 육성회비를 명목으로 일정액의 비용을 징수하기도 했다. 서민들에게는 부담을 주는 금액이었다.

1950년대는 과밀 학급 문제가 나오기 시작했고, 과밀 학급의 문제는 서울의 인구가 폭증하는 1960~70년까지 지속됐다.

일제강점기에 이뤄졌던 문맹퇴치운동은 광복 후에도 이어졌다. 정부에서는 야학, 공민학교, 재건학교 등을 운영했다. 대학생들도 방학기간을 이용해 문맹자 교육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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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공교육시대를 대표하는 교련복. (사진=내외방송 이지선 기자)

반공교육시대에는 교련수업을 실시했고, 1969년 중학교 입학시험이 사라지게 한 데에는 1964년 ‘무즙파동’ 등이 영향을 끼쳤다. 무시험제도는 일명 ‘뺑뺑이’로 전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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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대 명문 고등학교 학생증. (사진=내외방송 이지선 기자)

우리나라 중등교육은 중학교로 통합돼 있다가 1951년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분리됐다. 이후로는 각각 입학시험을 치러 신입생을 모집하면서 기존의 명문 중학교와 함께 명문 고등학교가 탄생했다. 경기중학교에서 경기고등학교로 이어지는 소위 엘리트 코스가 생겨나고 후에 중학교가 평준화 되면서 명문 고등학교만 남게 된 것이다. 1970년대에는 경기고, 서울고, 경복고 등이 명문 학교에 속했다.

68년 ‘중학교 무시험제’, 74년 ‘고교평준화’ 등이 ‘과도한 입시교육의 폐해’를 완화시키기 위해 도입됐지만, 그 열기가 사그라지지 않았다.

대상이 초등학교 5, 6학년에서 중학교 2, 3학년, 고등학교 2, 3학년으로 올라간 것뿐이었다. 치열한 입시경쟁을 뚫어야만 했던 당시 학생들의 숨은 이야기들을 기증유물을 통해 알 수 있다.

박물관에 생생한 교육과정을 담은 물품을 기증한 한 사람은 “저는 제가 굉장히 보람 있게 생각하는 게 제가 부모님들 물건들을 다 기증하고 부모님이 제게 뭐라고 하셨냐면 내가 살아온 삶이 우리 부부가 살아온 삶이 그냥 다 흩어져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박물관 전시를 통해 내 삶의 일부가 늘 그곳에 머물러 있게 됐다는 사실에 너무 기쁘다고 하셨다”며 “제가 기증하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맨 끝에는 옛날 학교 교실의 풍경을 그대로 소품들을 갖고 만들어 그 시대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줬다. 우리나라는 학구열이 참 높은 편에 속한다. 지금까지의 높은 학구열과 전 세계까지 뻗어있는 우리나라 국민들이 탄생되기까지 그 과정은 그리 만만하게 볼 것도, 쉽게 이뤄진 것도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지금까지 교육이 산재해온 과정을 한 눈에 보고 싶다면 ‘서울학교 100년’전이 딱 알맞은 해답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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