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의 눈 내리는 아를
2월의 눈 내리는 아를
  • 전기복 기자
  • 승인 2021.02.16 17: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내외방송=전기복 기자) 작년 겨울 그렇게 소식 없던 눈이 올해는 제법 자주 내리더니 이제는 2월의 눈이 내리고 있다. “느끼는 것을 그리고······ 내가 그리는 것을 느끼고 싶다”고 말한 고흐의 눈 내리는 풍경에 대한 느낌은 무엇일까! 그가 눈을 주제로 그린 그림이나 눈에 대한 그의 소회는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눈 내린 설경을 주제로 한 그의 그림에는 누에넌 시절 목사인 아버지의 거처 주변을 그린 ‘눈이 내린 누에넌의 목사관 정원’(1885.1) 등 2∼3점의 그림이 머릿속을 맴돈다. 그뿐일까? 눈 위에 새겨진 고흐의 발자국을 따라 가보자.

그는 다른 빛과 더 밝은 하늘을 찾아서 파리를 떠나 1888년 2월 20일 월요일 오후 4시 49분 프랑스 남부 아를역에 도착한다. 그러나 그곳엔 보기 드문 한파가 몰아쳤고 날씨는 흐려져 저녁 무렵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하여 밤새 20센티미터 이상 나흘 동안 내리다가 2월 25일에 비가 되어 내렸다. 현장에서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 고흐로서는 내리는 눈이 반갑지 않았다.

▲ 창문에서 본 푸줏간, 아를, 1888.2. 반 고흐 미술관
▲ 창문에서 본 푸줏간, 아를, 1888.2. 반 고흐 미술관

자연스레 자신이 묵고 있든 카렐호텔 식당에서 곧장 길 건너 보이는 동네 푸줏간 풍경 ‘창문에서 본 푸줏간’과 첫 번째 아를의 여인인 노파 한 사람의 초상화 ‘아를의 노파’를 그린다. 모두 실내 작업의 결과다. 초상화 ‘아를의 노파’는 차치하고 ‘창문에서 본 푸줏간’은 선뜻 보기에는 단순하나 많은 정보가 담겨있다. 눈(雪)의 흔적! 호텔 식당 창문임을 말해주는 전경 창틀 왼편의 커튼이며 달팽이 문형, 배경의 문간 상단 간판 문자와 오른편 내부에 걸려있는 가공된 고기가 푸줏간임을 말해주고, 길에는 내린 눈이 녹은 채 남아 질퍽한지 어깨에 숄을 두른 여인네는 치마가 젖지 않게 치마단을 올려잡고 급히 푸줏간으로 들어가는 모습이다.

특히 길가 녹다 남은 눈은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인 듯 밝게 표현되어있다. 이 눈빛이 누구나 아는 ‘론강 위로 별이 빛나는 밤’의 하늘에 뜬 노란 별빛으로 때론 흰 눈송이처럼 표현된 별이 되어 하늘을 수놓는데 그림 ‘아를 포럼 광장의 밤의 카페테라스’로 빛나기까지 약 7개월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는다.

이렇듯 사흘간 내린 폭설(테오에게 쓴 1888.2.21. 편지, “눈이 60cm나 쌓였으며, 아직도 계속 내리고 있다”고 표현함)과 함께 프랑스 남부 아를 생활은 시작되었고 이러한 환경이 모티프 되어 눈을 주제로 한 그림 두 점을 연속적으로 그리게 된다. 이는 내가 찾아본 아를 이후 생을 마감하기까지 그린 세 점의 눈을 주제로 한 그림 중 두점, ‘배경에 아를이 보이는 눈 덮인 풍경’과 ‘눈이 내린 풍경’이다. 나머지 한 작품은 ‘눈 내린 들판에서 땅을 파는 두 명의 촌부’(1890.3-4월)로 생레미 시절 그림이다.

▲ 배경에 아를이 보이는 눈 덮인 풍경, 아를, 1888.2. 런던 개인 소장
▲ 배경에 아를이 보이는 눈 덮인 풍경, 아를, 1888.2. 런던 개인 소장

‘배경에 아를이 보이는 눈 덮인 풍경’은 고흐 그림 중 이렇게 차분하게 그려진 그림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의 느낌을 준다. 고흐가 아를에 도착한 후 눈과 비로 약5일을 실내에서 칩거하듯 했으니 이젤을 들고 아를 교외를 나섰을 때의 들떴을 마음과는 사뭇 다르다.

그림을 전반적으로 볼 때, 굳이 상단부에 흐릿하게 묘사된 멀리 아를 시내까지 분잡하게 관망하며 그림을 즐길 이유를 못 찾겠다. 그저 전경의 눈 덮인 풍경만으로도 설경에 대한 정취는 가득하다.

보온을 위해 세워진 짚인지 갈대인지 모를 마른 풀이며 작은 소나무잎의 섬세한 묘사는 얼마나 차분하게 처리되고 사실적인가! 눈 덮인 들판의 여백감을 지나 저 멀리 그려진 외딴집과 두어 그루 나무는 조선의 ‘세한도’(1844)에 가닿게 한다. 물론 칼라판 유채화, 빨간 지붕의 외딴집은 고독감의 절정을 표현한 세한도와는 거리가 있다.

추사 김정희가 그린 ‘세한도’는 눈 한점 없지만 앙상한 고목과 초라한 집 한 채가 자아내는 한기와 쓸쓸함, 수묵화 여백이 최고의 설경감을 느끼게 하고 한편으론 텅빈 화선지가 ‘한 점 그림 외엔 표현할 길 없는 마음’의 크기만큼이나 비어있는 듯하다.

반면, 고흐의 그림은 눈 내린 서정이 담긴 풍경화일 뿐이다. 아를 하단부 강뚝엔 녹색 봄빛이 횡으로 줄지어 고개를 내밀고 앞으로의 희망과 열정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이는 그림에 “장무상망(長毋相忘,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 인장을 찍어 의리, 비장함을 표현한 ‘세한도’처럼 어떤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그림이 아닌 것이다.

제주도 귀향살이에도 변함없는 제자 이상적의 의리를 한겨울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한 ‘세한도’를 그려 그에게 선물한 것 마냥, 고흐는 ‘배경에 아를이 보이는 눈 덮인 풍경’ 등 수많은 그림을 그려 아를에 잘 도착했으며 아를의 상태는 이러하노라는 소식과 함께 생활비를 지원한 동생 테오에 대한 보답으로 보냈다.

그가 아를에 도착한 후 2월말까지 8-9일의 기간 중 날씨가 맑은 날은 줄잡아 3-4일, 그 3-4일의 시간 동안 위에서 언급한 작품과 ‘눈이 내린 풍경’ 두 작품 이상을 그렸다. 빠른 속도로 그림을 그렸음을 알 수 있다.

▲ 눈이 내린 풍경, 1888.2. 뉴욕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
▲ 눈이 내린 풍경, 1888.2. 뉴욕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

‘눈이 내린 풍경’을 보자. 우리네 어릴적 시골 풍경과 다를 바 없다. 눈 내리면 들뜬 마음에 뛰쳐나가 눈싸움, 눈사람 만드는 아이들. 어른들은 야외를 산책하곤 했다.

이 그림도 그런 풍경, 개와 산책 나온 사람이다. 언뜻 보기에는 개가 송아지로 착각될 덩치다. 사람도 개도 경치에 한눈판 느낌이다. 무작정 앞길만 재촉하는 모양새는 아니며 바라보는 방향이 좌우로 각 각이다. 일렬로 쭉 늘어선 노랑이며 갈색을 띤 풀섶이 여긴 길임을 알리는 표지석 같다. 그림 전반에 걸쳐 여기저기 나타나는 옅고 짙은 갈색은 눈이 녹고 있음과 ‘배경에 아를이 보이는 눈 덮인 풍경’보다 늦게 그려진 그림임을 짐작하게 한다.

산책 나온 이의 발걸음이 아를 시내를 향한 뒷모습이다. 나뭇가지에 앉은 노란빛이며 그림 앞부분 대지를 뚫고 나오는 녹색빛은 봄이 가까워졌고 그리는 이의 마음이 이미 봄날 론강변 몽마주르, 퐁비에유, 타라스콩을 거닐고 있음을 말해주는 듯하다.

많은 명작을 남긴 아를 시기!, 그 첫걸음은 눈 내리는 날씨로 시작했고 그런 환경 덕분에 고흐의 눈 내린 목가적인 풍경화를 접할 수 있었다.

그가 남긴 눈(雪)을 주제로 한 10여 점의 그림 중 가장 서정적으로, 풍경 자체를 즐기는 듯한 그림은 아를 초기에 그려진 두 작품 ‘배경에 아를이 보이는 눈 덮인 풍경’과 ‘눈이 내린 풍경’이다.

추억하거나 야외작업을 못해 창밖으로 보이는 설경을 그린 그림, 눈속에서 노동을 하는 모습 등 다른 시기의 작품과는 대비되는 그림이라 마음 편하게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 즐겼으리라 생각한다.



오늘의 이슈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