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고흐의 군대 이야기
[문화산책] 고흐의 군대 이야기
  • 전기복 기자
  • 승인 2021.11.08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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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이 넘어 시작된 고흐의 군대 이야기
연인(주아브 소위 밀리에의 초상), 아를, 1888년 9월말, 네덜란드 오테를로, 크뢸러 뮐러 미술관
연인(주아브 소위 밀리에의 초상), 아를, 1888년 9월말, 네덜란드 오테를로, 크뢸러 뮐러 미술관

(내외방송=전기복 기자) "외인부대에 5년 임기로 지원한다면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을 거야. 한달에 100프랑을 주니까. 나를 병사로 채용해 줄까?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누구나 일이 잘 풀리지 않고, 어려움에 직면하거나 도무지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모를 때면, 한 번쯤 '군대나 갈까'라고 생각했던 젊은 시절이 생각날 터이다. 이러한 이야기가 화가 고흐의 이야기라면 덧, 고개가 갸웃해진다. 별이 빛나는 론강변이나, 아를 포럼 광장의 밤의 카페테라스에서 펼쳐질 듯한 그의 레퍼토리는 무얼까. 자못 궁금해진다. 그럼 고흐가 군댈 갔었다고. 물론 그렇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그의 군대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그의 군대 이야기는 나이 서른이 넘어서 시작된다. 동생에게 쓴 편지(1883년 10월 3일 무렵)에서 "가끔 군댈 지원병으로 갈까라는 생각이 든다. 많은 문제에 짓눌린 비참하고 암담한 기분이 드는 순간에 그렇다"며 토로한다. 늦은 나이에 화가의 길에 들어선 그가 한곳에 오래 정착하지 못하고 네덜란드 에턴이며 헤이그에 이어서 고향에서 먼 북부 드렌터를 주유할 때, 그저 편지글에서 언급한 하소연 같은 이야기로 별다른 반향(反響)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5년여 지난 아를 시기, 유명한 귀를 자른 사건이 있은 뒤 불면증과 두통, 발작을 일으켜 아를병원 격리실에 수용되고, 새로운 환경에서의 생활을 갈망할 때 군입대에 대한 의사표명이 불러온 파장은 달랐다.

"외인부대에 5년 임기로 지원한다면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을 거야. 한달에 100프랑을 주니까. 나를 병사로 채용해 줄까?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형의 편지(1889년 4월 30일)를 받은 동생 테오는 3일 만에 "형이 자발적으로 군인이라는 직업을 좋아하게 되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잘라서 말하고, "저에게 비용부담과 걱정을 끼칠까 고생을 사서 하려는 겁니다. 걱정말고 이전처럼 송금을 받으세요"라고 간곡히 당부하면서 군입대를 만류하는 답장을 보내기에 이른다. 결국, 고흐는 며칠 뒤인 5월 8일 동생 테오의 도움을 받아서 아를 인근 생레미에 있는 생폴드모졸요양원으로 거처를 옮김으로써 군입대 논란은 일단락된다. 

무릇 우리의 호기심은 여기서 멈출 수가 없다. 네덜란드 국적의 고흐가 거주하는 프랑스 군대에 입대할 수 있었을까? 입대한다면 군생활은 잘할 수 있을지 궁금도 하다. 프랑스 외인부대는 말 그대로 국적을 묻지 않고 지원자들로 충당된 부대다. 지원자는 계약제로 전력(前歷) 불문이라 범죄자, 외국 망명자 등을 가리지 않고 나이 18세에서 40세까지 입대가 가능하다고 한다. 이래저래 보아도 37세 고흐도 입대를 못할 사유는 없는 듯하다. 그렇다면, 군생활은 어떨까? 군필자들은 보통 이렇게 말한다. '잘 걷고 잘 쏘면 군생활 이상 없다고' 

몽마주르에서 본 크로 평원,(연필, 펜, 잉크) 아를, 1888년 7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몽마주르에서 본 크로 평원,(연필, 펜, 잉크) 아를, 1888년 7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고흐의 걷기 실력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다. 1876년 6월 중순경, 영국 램스게이트의 스톡스 기숙학교 교사로 재직할 당시 런던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는 동생 안나를 만나기 위해 100여 킬로미터를 넘게 걸어서 "밤에는 너도밤나무 아래에 몸을 뉘이며 갔다"는 사실. 또 다른 일화는 고흐가 화가로서 파리에 머물던 1887년 베르나르며 시냐크와 가깝게 지낼 때의 일이다. 시냐크의 어머니는 파리의 북서부 센 강에 연한 아스니에르에 살았는데 고흐는 파리에서 그곳까지 걸어가서 시냐크를 만나고 작품 활동을 했다. '아스니에르의 센 강변'(1887), '아스니에르의 부아예 다르장송'(1887) 등 많은 작품들로 익숙한 장소이기도 한 곳까지 수십 킬로미터를 걷기도 한 것이다. 

작업하러 가는 화가, 아를, 1888년 7월, 독일 베를린, 카이저 프리드리히 박물관(現 보데 박물관) 제2차 세계대전 때 폭격으로 난 화재로 소실
작업하러 가는 화가, 아를, 1888년 7월, 독일 베를린, 카이저 프리드리히 박물관(現 보데 박물관) 제2차 세계대전 때 폭격으로 난 화재로 소실

그에게 있어서, 작품활동을 위해 걷기는 생활이자 필수 교통수단이었다. 한여름 '작업하러 가는 화가'(1888.7)를 보라. 군장을 맨 군인의 포스보다 더 당당하게 화구를 메고 가지 않는가. 그리고 화가로서 사물을 관찰하고 그대로 묘사한다는 것, 원근법틀을 만들어 이용한 점 등은 사격 시 필요한 가늠자, 가늠쇠를 잘 정렬해서 표적을 명중시키는데 유리할 터……. 이쯤이면 고흐가 군대 생활을 한다면 잘할 수 있는 조건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건강문제나 동료들과의 조화로운 병영생활 여부는 시쳇말로 관심병사일 수는 있겠으나 뭐니해도 군대서 좋아할 그의 이름 '승리하는 자'를 뜻하는 'Vincent'이니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지 않는가.

고흐가 군대 생활은 하지 않았으나 현역 해군 소장인 요하너스 반고흐(일명 얀) 백부와 그의 집에서 동거한 이력은 있다. 화상, 교사, 서점 점원을 전전하다가 "자신에게 종교적인 소명이 있다"고 아버지를 설득한다. 1877년 5월 암스테르담에 있는 해군 소장인 얀 백부의 집에서 신학대학 진학을 위한 입시준비를 했다. 고흐는 얀 백부가 사생활도 "군대식 정확함에 맞추어 사시는 분"이라는 것과 자신이 의기소침해 있을 때면 "군인같이 계획대로 밀고 나가라"는 조언을 상기하곤 했다. 

군대시절, '잘하면 되잖아, 무슨 말인지 알았지!'라는 말처럼. 계획대로 안되고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는데……. '아니오'라고 말할 수 없는 군대문화 속에서 느꼈던 그 답답함. 얀 백부와 함께 사는 동안 심리적인 부담만큼은 우리네 군대생활과 다름없을 듯했으리라 짐작된다.

신학대학 진학의 문턱을 넘지 못한 고흐는, 전도사 양성소를 거쳐서 6개월간 임시로 전도할 수 있는 허가를 받는다. 전도사로서 보리나주의 탄광촌에서 광부들을 위해 열정적으로 헌신 하나 이 또한 지나침이라는 이유로 계속 허락되지 않았다. 이후 화가의 길로 들어선 고흐는 또 다른 군인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름하여 주아브의 용사들이다. 

주아브부대(Zouave)는 프랑스 식민지인 알제리와 튀니지 주민들이 주축이 되어 편성된 프랑스 군대의 보병부대로, 처음 이 부대에 충원된 부족의 명칭에서 유래하였고 아를에도 주아브 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1888년 6월경 고흐는 주아브 연대의 소위 폴 외젠 밀리에를 알게 된다. 그에게 데생을 가르쳐 주며 꾀나 친한 사이로 발전한 모양이다. 고흐는 밀리에가 "'갈아엎은 밭' 그림을 보고는 만족해 주었어. 그러나 그림 '노란집'은 흔해 빠진 식료품점이며 밋밋한 집들만 그리는지 모르겠다며 싫어한다"는 평을 동생 테오에게도 들려주었다.

주아브 병사(반신상), 아를, 1888년 6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주아브 병사(반신상), 아를, 1888년 6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이쯤에서 그림 '연인(주아브 소위 밀리에의 초상화)'(1888. 9)을 보자. 밀리에의 반신상을 비취색을 배경으로 그린 초상화다. 주황색 모자와 검정제복이 강렬한 만큼 창백하고 거친 얼굴에 긴수염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왼쪽 가슴에 단 휘장이며 제복에 새겨진 문양들이 인상적이고 배경 상단에 그려진 부대 문장인 별과 달이 다시금 군인 밀리에의 초상임을 말해주는 듯하나, 왠지 삐딱하게 쓴 군모며, 상기된 듯 붉은 귀, 팔자 수염이 장난기 가득한 바람둥이처럼 묘사됐다. 그러나 비취색 배경이, 두꺼운 채색과 과감한 붓질의 거칠고, 군모의 주황색이 발하는 색정적인 이미지를 상쇄하면서 다정다감하고 품격있는 남성미로 돋보이게 하는 그림이다.

고흐는 이 그림을 단순하게 '연인'이라고 말했다. 이는 "붉은 색과 초록색이 보색 관계로 서로를 환하게 빛나게 만드는 한쌍을 이루고, 남자와 여자처럼 서로를 완전하게 한다"고 생각한데서 연유한 듯하다. 자신과 주아브연대 밀리에도 서로 갖지 못한 능력을 보완하면서 보색 관계나 남녀처럼 왜, 완벽한 한 쌍인지를 고흐는 이렇게 설명했다.

"밀리에는 운이 좋다. 그는 원하는 대로 아를의 여자를 소유할 수 있어. 하지만 그들을 그릴 수는 없지. 만약 그가 화가였다면 소유는 어려웠겠지"

아를의 빈센트 침실, 아를, 1888년 10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아를의 빈센트 침실, 아를, 1888년 10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고흐는 '연인'(1888.9)으로 명명한 '주아브 소위 밀리에의 초상화'를, 보통 사람들이 연인의 사진을 머리맡에 놓아두듯이 아를의 노란집 침실 벽에 '시인'(1888.9)이라고 별명 붙인 '시인 외젠 보흐의 초상화'와 나란하게 걸어 두었다. 그래서 우리는 '아를의 빈센트 침실'(1888.10)이라는 그의 그림을 통해서 그림 속의 이 그림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번에는 '주아브 병사'(1888.6)의 반신상과 전신상을 보자. 굵고 짧은 목, 가무잡잡한 피부와 기른 수염에서 남성다운 힘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셰시아라는 붉은 술이 달린 두건형의 모자, 다양한 무늬의 저고리, 복대같은 넓은 허리띠가 눈에 든다. 전신상에서는 치마같은 부풀린 붉은색 바지나 비스듬히 앉은 쩍벌남에서 잠재된 욕구를 발산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반신상에서의 압권은 얼굴과 목에 나타나는 녹색이며 붉고 흰 여러 색깔의 부조화스러운 결합이 뿜어내는 색채가 말하려는 인물의 성격을 묘하게 느낄 수가 있게 한다는 점이다.

주아브 병사(전신상), 아를, 1888년 6월, 개인 소장
주아브 병사(전신상), 아를, 1888년 6월, 개인 소장

이렇듯 모델까지 해준 군인들과의 생활이 있었는가 하면 잠깐씩 스쳐 지난 군인들도 여럿 있었다. 고흐가 아를에 도착한 해 5월 말에는 지중해와 맞닿은 생트 마리 바닷가로 그림 여행을 며칠 떠났고 병영으로 변한 고대 성채를 지날 때의 "멋진 군인이 심문하러 왔었다"거나 바닷빛깔의 변화 등에 이르기까지 자질구레한 이야기를 편지에 옮겨 놓았다. 

이듬해 3월에는 파리 시절 친하게 지낸 폴 시냐크가 프랑스 남부로 그림여행을 하면서 아를 병원에 있는 자신을 문병한다. 고흐는 병원측으로부터 허락을 받고 외출하여, 폴 시냐크를 아를의 노란집으로 안내한다. 이미 노란집 문은 아를 주민들의 민원으로 경찰이 폐쇄하였는데 노란집 문을 폴 시냐크와 함께 열고 들어가려는 것을 경찰이 제지하였으나 그의 적절한 대응으로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고흐가 방치된 그림들 속에서 한 점을 집어 그에게 선물하자 옆에 있던 "아를의 착한 군사경찰(헌병)들이 몹시 화를 내었다네. 선물한 그림에는 훈제 청어 두 마리가 그려져 있고, 누구나 알다시피 불어 장다름(gendarme)에는 청어와 군사경찰(헌병)이라는 뜻이 모두 있지" 이렇게 너스레 떠는 고흐의 모습도 찾아볼 수 있는 군대 이야기 아닌 군대 이야기는 계속된다. 

훈제청어가 있는 정물,(본문에 언급된 폴 시냐크에게 선물한 작품은 아님) 파리, 1886년 여름, 스위스 바젤, 바젤 미술관
훈제청어가 있는 정물,(본문에 언급된 폴 시냐크에게 선물한 작품은 아님) 파리, 1886년 여름, 스위스 바젤, 바젤 미술관

1888년 12월 크리스마스 이틀 전, 고흐가 노란집에서 자신의 좌측 귀를 자르고 많은 출혈과 함께 쓰러져 잠들어 있을 때, 다음날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도 다름 아닌 '장다름'이라 불리는 국방부 소속으로 민간치안을 담당하는 군인 즉 군사경찰(헌병)이란다. 이는 프랑스가 갖는 지역 치안제도의 특수성에 기인한 것인데 지역의 크기나 사건의 규모에 따라서 "시경 경찰은 현장에서 범죄를 중단시킬 수 있지만 조사를 수행할 수는 없다"는 등의 법령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듯 고흐는 다양한 병과의 군인들을 만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화가로서 군인의 예술적 감성에 대해 깜짝 놀란 일도 있다. 때는 바야흐로 아를에 발을 디딘 첫해 한여름인 7월 중순, 몽마주르 언덕에서 크로평야를 내려보며, 멋진 풍경에 감탄하고 있는 고흐에게 동료화가는 '그림으로 그려내기 어려운 풍경'이라고 말한다. 

고흐가 그림을 그리는 옆으로 한사람이 지나가는데 동료 화가가 아닌 군복을 입은 병사였고, 고흐가 "진짜 멋지죠. 바다처럼 아주 멋지잖습니까?"라고 말을 건네자, 지나던 병사는 "아니죠. 바다처럼 멋지다니, 난 이곳이 넓은 바다보다 훨씬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사는 느낌이 있으니까요"

이 말에 고흐는 충격을 받고 이렇게 중얼거렸다. "사람이 사는 느낌이 있다는 것은 단순히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과는 다르다. 풍경 속에 실제로 그 인물을 그리지 않고도 풍경에 활기를 주는 것은 그림에 표현된 작은 인물들 모습이 아니라 알맞게 배치된 색채들이 만들어 내는 대비효과면 충분한 것이다" 고흐는 자신을 포함한 두 화가와 병사 가운데 누가 더 예술가일까?를 자문하고 "병사의 눈을 선택하겠네"라고 자답하면서 화가 베르나르에게 "그렇지 않은가?" 물었다는 이야기다.

이제까지 고흐가 직접 군대생활을 경험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생활고에서 기인한 군입대 고민이며, 그가 군생활을 한다면 잘 할 수 있을지에 대한 농담 같은 이야기, 또 다른 진로준비를 위해 현역 장군인 얀 백부와의 진짜 군대생활 같은 동거, 주아브 부대원의 모델 이야기, 잠깐 스쳐 지난 군인들을 통해 느낀 소외 등을 군대 이야기로 엮어 보았다. 

평소 예술적인 소양을 고양 시킨 군인들은 유연하고 창의적인 정신력으로 변화무상한 전장상황하에서도 보다 더 능동적인 대응을 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적어도 이러한 작업이 그의 작품 감상을 더 풍부하게 한다는 측면에서 이야깃거리 같지 않은 너스레도 한 번쯤은 눈여겨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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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원만 2021-11-10 07:18:50
자세하게,,
상세히게,,
안내해주심에
고흐에 대하여 많이 알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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