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귀질환재단 김현주 이사장
한국희귀질환재단 김현주 이사장
  • 배준철 기자
  • 승인 2022.03.20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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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손잡고 '사랑의 릴레이' 희귀질환 환자와 가족들에게 희망을 전한다

(내외방송=배준철 기자) 겨울의 끝자락이지만 아직 매서운 칼바람이 불던 2월의 어느 금요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오늘의 인물을 기다렸다. 이내 단정한 베이지색 코트에 옹골진 백팩을 메고 힘 있게 걷는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산수(傘壽)가 지난 나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곧은 자세와 젊고 밝은 미소를 지닌 한국희귀질환재단 김현주 이사장을 말이다.

희귀질환이란 '발병률이나 유병률이 매우 낮아 진단이 어렵고 제대로 된 치료법이 없는 경우'라고 사전은 정의하며 지난 2021년 기준, 비공식 국내 희귀질환 환자의 수는 50만명에 이른다. 마침 2월의 마지막 날은 '세계 희귀질환의 날'이기에 한국 희귀질환의 대모를 만나는 일은 거를 수 없는 운명 같은 느낌마저 든다.

희귀질환의 불모지였던 대한민국에 유전상담이라는 씨앗을 뿌렸고 재단을 설립해 정책 변화와 더불어 의료 패러다임의 변화를 일궈냈으며 환자와 가족에게 희망을 안겨 왔던 김 이사장. 그녀와의 소중한 티타임을 통해 희귀질환의 불모지였던 대한민국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의 이야기를 살펴봤다.

희귀질환 치료제, 임상치료에도 적용돼야
김현주 이사장과의 인터뷰가 있던 날은 신생아 1만명 중 1명꼴로 발생하는 '척수성근위축증(Spinal muscular atrophy, SMA)의 고가의 치료제(스핀라자) 보험적용 확대와 급여 유지기준 폐지를 위한 당사자 국회 포럼'이 열렸었던 날이다. 바로 전까지 긴 시간 동안 SMA 당사자들, 보호자들 그리고 관련 정계인사들 앞에서 격려사와 함께 전문가 발표와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던 그녀. 

다소 피곤해하지 않을까 걱정되는 맘도 들었지만, 대추차 한 잔과 함께 시작된 힘 있는 대화로 이내 기우였음을 감지했다. 이날 김 이사장은 '희귀질환치료제개발(R.D)과 SMA 치료의 전망'을 주제로 발표하면서 힘든 희귀질환의 R&D를 거쳐서 개발된 표적 치료제들이 의료현장에서 환자를 위한 치료제로써 효율적으로 적용될 수 있어야 궁극적으로 환자와 가족의 삶의 질 향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28년 전인 1994년 김현주 이사장의 교수 시절, 국내 최초로 유전학 클리닉을 개소하고 희귀질환 환자들을 전문적으로 진료하기 시작하면서 9살의 한 고셔병 환자를 만나게 됐다. 당시 미국에선 이미 1991년에 고셔병 환자 치료제가 개발된 상태였지만 한국에는 아직 치료제로 도입되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김 이사장이 직접 일 년에 두 번씩 미국을 방문해 약을 가져다 치료하기도 했다. 

이후 국내 문헌을 조사해 한국 고셔 환자의 임상 및 유전학적 특성을 파악했고 소아과 혈액종양학회를 통해서 고셔질환 치료제 개발을 알렸으며 '고셔 환자 등록사업'을 시작해 12명의 생존환자들을 확인했다. 이에 ‘한국 고셔 모임회’를 결성하고 SBS '그것이 알고 싶다'라는 프로그램에서 ‘고셔병을 앓는 아이들’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됐으며 1998년 '사랑의 한걸음'이라는 모금 운동을 통해 34만명의 참여로 6억원가량의 치료기금이 모이기도 했다. 

이때 미국에서도 2억여원의 기부금이 쇄도해 드디어 1998년 고셔 치료제가 국내에 도입되고 건강보험이 적용됐으며 그 당시 국내 고셔병 환자 모두가 치료를 시작할 수 있게 됐고 이것을 계기로 2001년 정부에서 첫 희귀질환 정책으로 고셔병, 혈우병, 근육병, 말기 신부전의 4개 질환을 선정해 희귀질환 의료비 지원사업을 시작하게 됐다.

희귀질환 관리, ‘공공의료 개념’으로 접근해야
28년 전, 한국에서 '희귀질환'은 단어조차 생소했다. '희귀질환'은 대부분 유전자의 변이에 의해 가족 내에서 처음 발생하지만, 질환에 따라 재발되거나 대물림될 수도 있다. 게다가 매우 드물지만 8000여종이 넘는 다양한 희귀질환들이 있기 때문에 진단에 어려움이 있고, 대부분 아직 치료제가 개발되지 않아 난치성 질환으로 장애를 초래하기에 환자나 가족의 경제적인 부담이 크다. 더군다나 유전성 희귀질환의 경우 심리적, 사회적 부담도 매우 크기에 희귀질환 환자와 가족을 위한 치료환경 개선이 급선무다. 

무엇보다 희귀질환은 공공의료로 접근해 자기부담 상한액을 초과하는 의료비는 정부가 지원해줄 수 있는 치료 환경이 중요하다. 유전성 희귀질환 환자와 가족에게 예방과 적절한 관리에 필요한 유전상담서비스를 제공할 필요가 있음에도 OECD 국가 중 아직 한국만 유일하게 유전상담을 의료서비스로 인정하고 있지 않다. 의료서비스 수가코드를 지정해 보험 적용을 받을 수 있어야 희귀질환 거점병원에서 더욱 많은 환자와 가족들이 유전상담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게 돼 예방과 치료가 효율적으로 관리될 수 있다. 

한국희귀질환재단 창립 10주년 기념 심포지엄
한국희귀질환재단 창립 10주년 기념 심포지엄

유전성 질환 국내 최고 권위자의 바쁜 일상
김현주 이사장은 2007년 정년퇴임 후에도 현재까지 아주의대 명예교수와 건양대 유전상담 클리닉 석좌교수로서 후학 교육과 환자 진료로 유전상담서비스를 직접하고 있는 '현역'이다. 매일을 바쁜 일정들로 소화하고 있는 김 이사장은 2016년부터 매년 2월 마지막 날인 '세계 희귀질환의 날'(Rare Disease Day)을 기념해 희귀질환에 대한 인식 개선과 치료 여건 개선을 위해 '한국 희귀질환 포럼'을 개최해 왔다. 

또한 2013년부터는 대전 건양대병원에 중부권 최초의 유전상담 클리닉을 개설, 지금까지 2천여건 이상의 유전상담서비스를 제공해왔고, 지난해엔 새 병원 개원과 함께 전문 유전상담사를 보충해 유전의료팀으로 확장했으며 '유전상담 심포지엄'을 개최한 바 있다. 또한 양재 시민의 숲에 위치한 '더 케이 호텔 서울'에서 '한국희귀질환재단 창립 10주년 기념행사'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날 행사는 기념식과 '희귀질환과 유전상담서비스 특강'으로 구성돼 지난 10년간 희귀질환 환자와 가족을 위한 유전상담서비스 및 진단 지원, 유전상담사 전문인력 양성 지원 등 재단의 목적사업의 성과와 발자취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렇듯 지난 28여년 동안 국내 희귀질환의 진단 및 치료, 법제화를 위해 애써온 김 이사장은 지난 2015년 희귀질환관리법이 제정되는 데 누구보다 앞장섰음에도 아직도 정부의 희귀질환 진단사업에 유전상담이 포함되지 않고 유전상담서비스가 제도화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아쉬워하고 있다. 

선진 의학유전학을 대한민국에 이식하다
1950, 60년대의 사회 분위기에서 여성이 꿈을 꾸고 미래를 결정해 진출할 수 있었던 사회 분야는 많지 않았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유독 집안에 의료인이 많았던 그녀는 연세대학교 의학과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당시 우리나라에 연구 저변이 없다시피 한 의학유전학에 몰두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다운스테이트 의과대학에서 소아과를, 뉴욕 마운트사이나이 의과대학에서 임상유전학 전문의를 취득하게 되는데, 이때 다양한 유전질환 환자들을 접할 수 있었고, 1970년 당시 미국에서 주목받기 시작된 의학유전학을 공부하면서 제1대 의학유전학 전문의 자격증을 취득하게 되고, 이는 곧 한국 의학유전학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는 기회로 이어지게 된다.

대한민국의 '희귀질환' 분야는 그녀의 등장 전과 후로 나뉜다. 1990년대 초반까지는 '희귀질환'의 개념조차 제대로 정립되지 못했던 대한민국이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이 자신의 병명조차 정확히 알기도 힘들었고 전문 의료기관의 부족으로 인해 적절한 치료는 고사하고 잦은 오진으로 심신이 고통받기 일쑤였다. 1994년 귀국한 김 이사장은 아주대학교 의과대학병원의 설립 인사로 초빙됨과 동시에 우리나라 최초의 유전학 클리닉을 열었고, 의학유전학과를 개설하기에 이른다. 

희귀질환 치료에 대한 인식 제고
당시 국내 상황이 너무 열악해 안타까운 순간들을 자주 접하게 된 김 이사장은 더욱 적극적인 행보를 결심하게 된다. 다행스러운 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SBS 방송에 고셔병이 소개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고, 고셔병 환자를 위한 치료기금 모금운동과 '사랑의 릴레이' 모금 캠페인이 이어졌다. 이런 사회적 동참의 분위기를 이끌어낸 김 이사장은 지난 2001년 한국희귀질환연맹을 설립했고 '희귀질환 치료를 위한 사회적 여건 조성 심포지엄' 등을 개최하며 긴 시간 동안 희귀질환 환자와 가족의 어려움을 알리는 등 저변 확대에 주력할 수 있었다.

또한, 보건복지부와 국회 등을 쉼 없이 방문, 수많은 사람을 설득했던 노력은 결국 2001년 정부의 희귀질환자 의료비 지원사업의 시작과 2015년 '희귀질환 관리법' 제정으로 결실을 맺는다. 2011년에는 '한국희귀질환재단'이라는 공익법인으로 공식 출범한 뒤 유전상담서비스 지원사업을 제공하며 희귀질환 및 유전상담서비스 심포지엄과 전문 유전상담사 교육 양성 지원사업을 병행하고 있다.

건양대학교 새 병원 개원기념 유전상담 심포지엄
건양대학교 새 병원 개원기념 유전상담 심포지엄

유전상담으로 환자와 가족들의 비극 예방
김 이사장은 매우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하며 다음 이야기를 이어갔다. 바로 2013년 만났던, 근육장애인 아들을 둔 엄씨의 이야기이다. 엄씨는 아들이 근육병으로 힘들게 투병하는 중에 두 번의 임신을 했고 모두 남아로 확인됐다. 하지만 의사로부터 태아가 아들인 경우 50% 확률로 큰아들과 같은 증상이 발현될 수도 있다는 말을 전해들은 엄씨는 두 명의 근육병 아들을 키우느니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겠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결국 두 번의 중절수술을 받았다. 그 후 혹시 딸이나 조카들에게도 유전이 될까 하는 두려움에 긴 고통을 받았고 마지막 희망으로 김 이사장을 찾게 된다. 

사연을 들은 김 이사장은 자세한 유전상담과 엄씨의 유전자검사를 했는데 그 결과는 실로 놀라웠다. 큰아들 경우만 유전자 돌연변이가 발견됐고 엄씨는 유전자변이가 발견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아들의 근육병은 돌연변이에 의해 처음으로 발생된 것이지만 엄씨는 보인자가 아니기 때문에 딸과 조카들에게 근육병이 유전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유전상담을 받은 엄씨는 그제야 비로소 근육병의 유전과 대물림이라는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김 이사장은 엄씨의 경우, 정확한 유전상담 및 검사가 이뤄지지 않았던 결과가 부정확한 정보로 이어졌고 그로 말미암아 2명의 태아가 빛을 보지 못한 애통한 사연이라고 회상했다.

이후 엄씨는 2015년 '의료난민, 희귀질환자들을 위한 국회 정책토론회'에서 자세한 유전상담과 정확한 유전자 검사가 일찍 정착됐다면 자신들의 가족에게 찾아온 건강한 생명도 지킬 수 있었을 것이라며 국가차원에서 유전상담서비스와 유전자 검사를 지원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김 이사장은 유전적인 요인에 의해 발병할 확률이 50%라면 발병하지 않을 확률도 50%로 건강한 자녀를 가질 수 있기 때문에 환자와 가족에게 정확한 유전상담은 가장 필요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유전상담 전문인력 양성에 앞장서
한국희귀질환재단은 연맹에서 10년간의 '희귀질환 치료를 위한 여건조성' 심포지엄 활동으로 파악한 환자와 가족들의 간절한 염원과 충족되지 못한 욕구사항을 보다 전문적이고 효율적으로 제공하기 위해 설립됐다. 현재 우리나라의 의료시스템에서 희귀질환의 효율적인 관리와 예방에 필요한 유전상담을 효율적으로 제공하기 위해선 검사 결과를 토대로 임상 상황을 종합해 진단은 의사가 내리더라도 상담은 전문 유전상담사가 환자와 가족의 목소리와 정서적 욕구에 귀 기울이며, 질환에 대한 의학적, 유전학적 정보를 자세히 설명해 이해할 수 있도록 소통하고 심리적으로 지지해줄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유전상담 전문인력을 양성하는 데 정성을 쏟고 있는 김 이사장은 우리나라 최초로 2006년 아주대에 유전상담사 전문대학원과정을 개설한 데 이어 2014년엔 건양대병원에 교육과정을 개설해 전문 유전상담사의 배출을 지원하고 있다. 현재 대한의학유전학회에서 인증받은 임상유전학 전문의는 56명, 유전상담사는 54명에 이른다.

유전상담으로 환자와 가족에게 희망을
재단은 첫 번째 목적사업으로 유전상담 지원사업을 시작해 왔는데, 유전상담을 알리기 위해 환자와 가족들을 위한 교육 강좌, 유관 의료인을 위한 유전상담 세미나도 병행하고 있다. 또한 가천대길병원, 건양대병원, 서울시립 동부병원, 서울시어린이병원 등 전국 4곳의 유전상담클리닉을 개소해 3207건의 유전상담서비스와 유전자 검사비용을 지원해왔다. 

유전상담서비스 지원사업에 대한 만족도 조사 결과에 따르면 385명 설문응답자 중 유전상담서비스를 받은 95%의 환자와 가족들이 '유전상담서비스에 대해 만족했다'고, 97%가 ‘유전상담서비스의 지속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이는 유전상담서비스가 희귀질환 환자와 가족에게 꼭 필요하고 적정한 의료서비스임을 말해준다.

희귀질환의 대물림은 적절한 유전상담과 유전자 검사로 예방이 가능하기 때문에 자기 질환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충분히 이해하는 것이 질환을 극복해 나가는 데 도움이 된다. 김현주 이사장의 바람은 한국희귀질환재단이 단순히 환자들에게 의료비를 지원하는 것보다 더욱 포괄적인 지원을 통해 체계적인 유전상담을 더 많은 환자와 가족들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결국 ‘사랑의 릴레이-희귀질환 환자와 가족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캠페인처럼 서로에게 희망을 이어주는 선순환구조를 구축하는 것이다.

인터뷰를 마친 뒤 짧은 인사를 나눴다. 그리곤 처음에 그러했듯 힘 있게 걷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니 수많은 희귀질환 환자와 가족에게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는 법제도도 사랑의 릴레이도 아닌 '김현주'라는 이름 세 글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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