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그림찾기, 1970년대 ‘오일쇼크’와 우크라이나발 에너지 대란
숨은그림찾기, 1970년대 ‘오일쇼크’와 우크라이나발 에너지 대란
  • 이양호 기자
  • 승인 2022.06.06 09:09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3차 중동전쟁으로도 불리는 6일 전쟁이 5일로 발발 55주년을 맞았다. (사진=이매진스)
제3차 중동전쟁으로도 불리는 6일 전쟁이 5일로 발발 55주년을 맞았다. (사진=이매진스)

(내외방송=이양호 기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사태가 장기화되면서 러시아 내부에서도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러시아 친정부 성향의 인터넷 매체 ‘렌타(Lenta.ru)’가 지난 5월 9일(현지시각) 푸틴 대통령을 “한심한 편집증적 독재자”라고 지적하며 “21세기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벌였다”는 기사를 게재했다고 소개했다. 푸틴 대통령을 비판한 기사는 40개 이상이었지만, 현재 모두 삭제된 상태다. 렌타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정당화하기 위한 선전창구로 월 방문자 수가 2억명이 넘을 정도로 큰 사이트 중 하나다.

이번 사태는 비단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양국간 군사적 충돌 이외에도 에너지, 곡물 등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자극, 서방 주변국들과 오랜 이해관계가 맞물려 있다는 점에서 과거 이스라엘 건국으로부터 촉발된 중동전쟁과 1970년대 두 차례 일어났던 오일쇼크를 떠올리게 한다. 그중에서도 1973년 오일쇼크는 최초로 석유 무기화에 성공한 사례로 전 세계의 경제적 파장이 만만치 않았으며,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도입되는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중동전쟁의 비극적인 불씨

1973년 10월 6일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공격하면서 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중동전쟁은 팔레스타인을 위시한 아랍지역 국가들과 이스라엘간의 영토 및 종교전쟁뿐만 아니라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있다. 그 배경에는 1915년 백마흔 선언과 1917년 밸푸어 선언이 있다. 영국은 1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공격력을 분산시킬 목적으로 아랍지역에 팔레스타인 국가 건국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한 동시에 막대한 전쟁비용을 지원해주는 조건으로 유대인에게도 이스라엘 건국을 도와주겠다는 이중계약을 체결하고 만다.

영국은 다행히도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지만, 이중계약으로 인해 어느 한쪽과의 약속을 이행할 수도 없는 골치 아픈 문제를 유엔으로 넘기게 되고, 유엔은 표결을 통해 팔레스타인 지역에 두 개의 국가를 건국하라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이와 같은 결정에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모두 불만을 터트리게 되지만, 갈등은 봉합되는 듯 보였다. 문제는 이스라엘이 유대인뿐만 아니라 비유대인에게도 이민을 허락하는 귀환법으로 인해 난민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고, 건국 시기에 80만명이 넘을 정도로 폭증하게 된다.

위기를 기회로 바꾼 이스라엘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이 건국을 선언하자 그날 밤 이집트 전투기의 폭격으로 1차 중동전쟁이 시작됐다. 아랍국가의 맏형격인 이집트를 비롯해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등 5개국 군대가 이스라엘을 침공했고, 전쟁은 너무 쉽게 끝날 듯 보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결사항전으로 맞섰고, 여자뿐만 아니라 외국에 거주하는 유대인까지 참전한 반면, 아랍연합군은 통일된 지휘체계도 없이 수적인 우위만을 믿고 있었다. 전쟁의 초반 양상과 달리 이스라엘은 군사적인 열세를 극복하면서 주도권을 잡게 된다.

그 사이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승리하며 최초 분할받은 지역보다 50% 많은 지역을 점령하게 된다. 이때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가자와 서안지구로 도망가 정착하게 되는데, 가자지구는 약 100만명이 사는 거대한 난민촌을 형성하게 된다. 이스라엘은 새로 얻은 땅에 이민자가 계속 이어져 인구가 늘어난 반면, 팔레스타인은 전쟁 패배로 인해 고향을 떠나는 신세가 됐다. 이 전쟁은 누군가에게는 축제의 시작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재난의 시작이었다.

미국 카터 대통령의 중재로 이집트 사다트 대통령과 이스라엘 메나힘 베긴 총리가 평화협정을 맺게 된다.
미국 카터 대통령의 중재로 이집트 사다트 대통령과 이스라엘 메나힘 베긴 총리가 평화협정을 맺게 된다.

중동전쟁의 주도권은 이스라엘에게

2차 중동전쟁은 1956년 수에즈 운하를 두고 영국과 프랑스, 이스라엘 등 3개국 군대가 이집트와 벌인 전쟁으로 이때 이스라엘은 시나이반도를 차지하게 된다. 3차 중동전쟁은 1967년 이스라엘이 아랍 게릴라 활동의 주거지인 시리아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자 이집트가 시나이 반도에 군대를 투입한 전쟁으로, 이번 전쟁 역시 이스라엘의 압도적인 우세 속에서 마무리되는데, 이때 이스라엘의 영토는 나중에 돌려주게 되는 시나이반도까지 포함하면 약 3배까지 확대된다.

2, 3차 중동전쟁은 몇 가지 특이점이 있다. 먼저, 두 전쟁 모두 이스라엘의 선제공격으로 승리한 전쟁이라는 점과 2차 전쟁에서 미국이 이스라엘에 무기 지원을 거부하자 자주국방을 모색하기 시작해 3차 전쟁에서는 압도적인 군사력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이스라엘의 군사력이 증강되자 아랍의 군사적 균형이 깨질까 우려한 영국과 프랑스는 무기 관련 금수조치를 취했고, 1967년 8월 아랍 연맹 정상회담에서는 “이스라엘과 평화는 없고, 협상하지 않겠다. 인정하지 않겠다”는 카르튬 결의가 채택되기도 했다.

제1차 오일쇼크(Oil Crisis) 충격

4차 중동전쟁은 이집트가 시나이반도를 되찾기 위해 이스라엘을 선제공격하면서 시작된다. 전쟁에 앞서 이집트는 아랍산유국들과 함께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나라에게 석유를 판매하지 않을 것을 협약한다. 전쟁이 시작되자 미국은 이스라엘에 무기를 공급하기 시작했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사우디아라비아를 주축으로 아랍산유국을 회원으로 둔 석유수출국기구(OPEC, Organization of the Petroleum Exporting Countries)가 유대교 명절인 1973년 10월 17일 욤 키푸르에 석유금수조치를 발표했다.

제3차 중동전쟁에서 아랍권은 석유 무기화를 시도한 적이 있다. 당시의 실패로 OPEC는 시장점유율을 크게 손상하게 되면서 원유를 헐값에 팔아야 했기 때문에 회원국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이어졌다. OPEC는 이스라엘 지원국과 아랍에 비우호적인 서유럽과 일본까지 원유를 공급하지 않게 됐고, 이스라엘이 점령지에서 철수할 때까지 석유금수조치와 수출중단을 이어간다. 당시 1배럴당 2.9달러였던 원유가는 12달러까지 치솟았고, 비OPEC국가까지 석유가격을 대대적으로 인상하면서 세계 경제는 유례없는 경기침체와 물가상승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제1차 오일쇼크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석유는 주요 에너지원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고, 중동 석유는 싸면서도 지속적인 공급이 가능해 의존도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산유국들은 역사적인 호황기를 맞은 반면 미국과 영국 등 비산유국들은 심각한 충격을 입게 된다. 비교적 부유한 서구 국가들도 에너지 절약 정책을 시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동차 제한속도가 시속 50~60마일로 낮춰졌다. 프랑스는 밤 10시 이후 상업시설의 전력을 강제로 차단했고, 영국은 주 3일 근무제를 실시하며 3일 연속 상업용 전기 사용을 금지했다.

이와 같이 제1차 석유파동은 석유의존도가 심한 여러 나라에 큰 충격을 주었다. 석유공급의 양적 제한은 실질적 생산 감소와 생활수준의 저하를 초래하게 된다. 또한 가격의 급격한 상승은 인플레이션의 가속화, 국내수요 감소 및 불황·실업, 국제수지 악화라는 삼중고를 겪었다. 물가상승률은 1973년 3.5%에서 1974년 24.8%로 급증했고, 성장률은 12.3%에서 7.4%로 떨어졌다. 1974년 3월 OPEC는 석유금수조치를 해제했지만, 1975년 서방 선진국은 마이너스성장을 하게 됐고, 인플레이션이 가속화됐으며, 국제수지도 대폭적인 적자를 기록했다.

OPEC는 회원국의 산유량을 23% 줄이고 미국 등 이스라엘 지원국가에는 원유를 대주지 않기로 했다.
OPEC는 회원국의 산유량을 23% 줄이고 미국 등 이스라엘 지원국가에는 원유를 대주지 않기로 했다.

아름다운 화해는 없었던 4차 중동전쟁

전쟁은 1973년 아랍 연합군이 이스라엘 점령지에 기습적인 합동공격을 개시하면서 시작됐다. 이집트와 시리아는 휴전선을 넘어 각각 시나이반도와 골란고원을 향해 진격했다. 그동안 중동전쟁에서 승리해온 이스라엘은 개전 초반 마지노선이 무너지면서 사상자가 속출하고 피해가 막심했다. 이스라엘은 전력상 약체인 시리아를 물리친 후 수에즈 운하에 주둔한 이집트마저 압박했다. 이때 미국과 소련 사이의 긴장감이 높아지면서 유엔군의 긴급 파견으로 전쟁이 마무리된다.

이번 전쟁을 통해 중동의 지역 강국으로 외부의 도움 없이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다는 이스라엘의 믿음이 무너졌으며, 언제든지 전멸할 수 있다는 것을 이스라엘 스스로 인정하게 된다. 이스라엘은 1974년 수에즈 운하에서 철수하면서 수에즈 운하가 재개통됐고, 1978년 캠프 데이비드 협정과 1979년 워싱턴 D.C. 협정으로 이스라엘이 시나이반도에서 단계적으로 철수하게 된다.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은 이 공로로 이스라엘 총리 메나헴 베긴과 함께 78년 노벨 평화상까지 수상하지만, 1981년 이슬람 과격주의자에 의해 암살당한다.

석유수출 금지는 아랍에 비우호적인 것으로 여겨지던 서유럽국가와 일본에까지 확대됐다.
석유수출 금지는 아랍에 비우호적인 것으로 여겨지던 서유럽국가와 일본에까지 확대됐다.

중동 정세변화로 시작된 2차 오일쇼크

미국과 러시아 등에서 원유 생산량이 증가하자 OPEC의 영향력이 떨어질 것을 우려해 1978년 12월 OPEC 회의에서 원유 공시가격을 배럴당 12.70달러에서 14.55달러로 인상한다고 발표한다. 제2차 석유파동 기간인 1978년 12월부터 1980년 7월 사이에 석유가격은 약 2.4배(배럴당 12.9달러에서 31.5달러로) 급등했다. 미국은 원유가격이 오르면 완제품가격 인상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지만 OPEC는 수출품가격에 인상분을 반영하면 유가를 추가 인상하겠다고 압력을 가했다.

미국의 지원과 함께 이란의 탄압정치가 이어지자 1978년 12월 호메이니 주도로 이슬람혁명으로 이란의 팔레비 정권이 와해되면서 이란은 전면적인 석유 수출 중단에 나섰다.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어 세계 석유공급의 15%를 차지하고 있던 이란이 생산량을 2백만 배럴까지 축소하자 배럴당 13달러대였던 유가는 20달러를 돌파했다. 1980년 9월 이란과 이라크 전쟁으로 발발하면서 또 한 번 유가를 반등시켜 30달러선을 넘기더니 1981년 사우디아라비아가 석유무기화를 천명하면서 두바이유는 40달러 육박할 정도로 올랐다.

사진=연합뉴스TV)
(사진=연합뉴스TV)

중동 석유의존도 줄이게 된 계기

1차 오일쇼크로 아랍 산유국들이 부를 축적했다면 2차 오일쇼크에서는 기대만큼의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원유가격 상승은 아랍 산유국의 단결을 와해시키는 단초가 되기도 했다. OPEC이 생산량을 성공적으로 통제할수록 몰래 생산량을 늘리면 높은 가격에 많은 양을 팔 수 있어서 배반할 가능성도 크기 때문이다. 1980년대 원유가가 하락하면서 줄어든 수입을 충당하기 위해 생산량을 늘릴 필요가 있었고 이는 아랍 산유국간의 갈등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제2차 오일쇼크는 아이러니하게도 OPEC의 전성기를 마감하는 전환점으로 작용했다.

거듭된 가격 인상 압력으로 원유 수입국들은 비축 물량을 늘려 단기적 충격에 대비했고, 비OPEC국가로 거래처를 바꿔 중동 석유의존도를 줄여나갔다. 영국의 마가렛 대처 내각의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1981년 런던국제석유거래소를 설립했고,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가 1983년 뉴욕상품거래소에서 원유 선물 거래를 취급하기 시작했다. 이외에도 새로운 원유 개발에 집중적으로 투자했고, 대체에너지에 대한 관심과 투자도 늘려나갔다. 그 결과 2차 오일쇼크가 끝난 시점부터 2000년까지 20년 동안 원유가격은 약 60% 지속적으로 하락했다.

1979년 제2차 석유파동 당시의 우리나라 풍경
1979년 제2차 석유파동 당시의 우리나라 풍경

70년대 한국 경제에 치명타

한창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던 한국 역시 큰 암초를 만났다. 석유 소모가 많은 대형승용차의 운행이 금지됐고, 유흥업소의 영업시간이 단축됐다. 1970년대 우리나라 경제는 수출 주도형 중공업을 육성해 경제 발전을 전개했지만, 과잉 투자와 1973년 1차 오일쇼크, 1978년 2차 오일쇼크로 국제수지가 악화되고,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경제 성장이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해외 의존적 경제구조 때문에 제1차 석유파동으로 불황 속의 물가상승이라는 스태그플레이션이 나타났다.

세계적으로 제2차 오일쇼크의 여파는 제1차 오일쇼크 때보다 적은 편이었지만, 한국이 입은 피해는 제1차 오일쇼크 때보다 더 컸다. 1975년 소비자 물가는 전년대비 24.7% 상승했으며, 국제수지는 18.9억 달러의 적자를 기록했는데, 1980년대 초반까지 물가상승이 계속됐고, 무역수지 적자 폭도 커졌다. 제1차 오일쇼크 때는 선진국들에 비해 산업화 수준이 낮아 석유 의존도가 낮았던 반면, 제2차 오일쇼크 때는 중화학공업 육성의 결과로 에너지 소비가 급증한 탓이었다.

오일쇼크는 아직도 진행중

2014년 후반기 이후 석유값이 급속도로 떨어지면서 산유국들을 중심으로 역오일쇼크를 거쳐 2020년 3월 코로나로 인한 수요급감으로 50~60달러대의 원유가격이 40달러대까지 추락했는데, 원유가격 폭락을 막기 위한 감산 논의에 들어갔지만, 협의에 실패했고, 원유시장 선물만기가 겹치면서 국제유가 첫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이로부터 채 2년이 지나지 않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사태 여파로 유가가 장중 130달러를 돌파하면서 3차 오일쇼크가 터질 우려가 크다는 목소리가 주목받고 있다.

미국이 러시아산 원유 수입 금지 조치를 취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며 국제유가는 전날 배럴당 130달러까지 돌파했다가 독일의 에너지 제재 반대 소식에 다소 진정됐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A)는 러시아산 원유 수출 차단시 국제유가를 배럴당 200달러, JP모건은 185달러로 각각 예상했다. 러시아는 정부 수익의 3분의 1가량을 원유와 가스 수출에 의존하고 있어 이에 대한 제재는 일종의 극약 처방으로 여겨져 왔다. 가스의 40%, 원유의 25%를 러시아에서 수입하는 유럽은 같은 조치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 여파로 국제유가가 급등하면서 국내 주유소의 휘발유 판매 가격도 연속 상승세를 이어갔다. 사진은 서울 시내 한 주유소에 게시된 유가정보. (사진=연합뉴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 여파로 국제유가가 급등하면서 국내 주유소의 휘발유 판매 가격도 연속 상승세를 이어갔다. 사진은 서울 시내 한 주유소에 게시된 유가정보. (사진=연합뉴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위기 맞는 신흥국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석유 등 연료와 식량 가격 급등으로 가뜩이나 높은 물가 상승률이 두 자릿수로 뛰어오르면서 신흥국들은 위기를 맞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경제 회복이 선진국보다 느렸던 신흥국들이 올해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공격적인 통화 긴축과 상하이 등 도시 봉쇄에 따른 중국의 급격한 성장 둔화 등 겹겹이 쌓인 악재로 위기를 맞았다. 여러 악재가 동시다발적으로 몰려와 탈출구가 없는 ‘퍼펙트 스톰’이 닥치면서 경제위기가 세계 신흥국을 도미노처럼 덮치고 있다.

가장 먼저 벼랑 끝에 내몰린 곳은 1948년 독립국가 수립 이후 최악의 경제위기에 빠진 스리랑카다. 스리랑카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3월 18.7%까지 치솟았으며, 특히 식품물가는 30.2%나 뛰어올랐다. 레바논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밀값 급등과 외화 부족으로 극심한 식량 위기에 직면했다. 페루에서는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연료·비료 가격 급등이 촉발한 격렬한 반정부 시위가 이어지기도 했다. 에너지 수입비용 상승으로 전력 공급을 제한한 파키스탄은 기준금리를 12.25%로 2.5%p 인상하는 등 경제위기가 심화되고 있다.

한국 경제성장 부정적인 영향

정부가 에너지 원자재 가격 상승에 따른 국내 물가안정을 위해 유류세 인하폭을 확대한다고 밝혔지만, 국제유가가 다시 상승 흐름을 보이면서 경제에 미칠 파장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국제유가는 EU가 최근 6개월 이내 러시아산 원유 수입을 단계적으로 금지하고 연말까지 정제 제품 수입을 금지한다는 방침을 밝히면서 급등세를 타고 있다. 여기에 OPEC+가 6월에도 원유 증산량을 하루 43만 2000배럴로 유지하면서 유럽 국가들이 새로운 수입처를 모색하기 시작하면 국제유가 상승세가 더욱 가팔라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우리나라는 석유 수입 의존도가 높기에 국제유가 변동은 늘 물가에 큰 영향을 끼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국제유가가 오르면 통상 2~3주 간격을 두고 국내 휘발유와 경유 가격도 오른다. 정부는 2021년 11월부터 20% 내린 유류세를 2022년 5월부터 3개월간 역대 최대 수준인 30%로 더 낮췄지만, 소비자들이 체감하는 효과는 그다지 크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물가가 급등하고 소비가 위축되면서 스태그플레이션 우려도 나오는 상황이라 새로 출범하는 윤석열 정부가 어떻게 대응할지 지켜봐야 할 대목이다.



오늘의 이슈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법인 : (주)내외뉴스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 서울, 아04690
  • 인터넷신문등록일자 : 2017년 09월 04일
  • 발행일자 : 2017년 09월 04일
  • 제호 : 내외방송
  • 내외뉴스 주간신문 등록 : 서울, 다 08044
  • 등록일 : 2008년 08월 12일
  • 발행·편집인 : 최수환
  • 서울특별시 종로구 대학로 13 (뉴스센터)
  • 대표전화 : 02-762-5114
  • 팩스 : 02-747-5344
  • 청소년보호책임자 : 최유진
  • 내외방송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내외방송.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nwtn.co.kr
인신위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