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조영, 연개소문, 들불의 작가 유현종 원로 소설가를 만나다
대조영, 연개소문, 들불의 작가 유현종 원로 소설가를 만나다
  • 김준호 기자
  • 승인 2022.07.03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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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상현 사진기자)
(사진=이상현 사진기자)

(내외방송=김준호 기자) 『대조영』, 『연개소문』, 『들불』 등 장편소설 30편을 펴낸 유현종 소설가는 2016년 『소설 사도 바울』 출간 이후 새 작품으로 4세기경 백제 근초고왕이 왜왕에게 선물로 보내 현재 이소노카미 신궁에 보관돼 있는 칠지도에 관한 이야기를 준비중이다. 『소설 사도 바울』이 2009년 친동생처럼 지낸 소설가 최인호가 집필을 권유해 7년만에 인고의 시간 끝에 탄생한 작품인 만큼 새 작품 역시 코로나19 때문에 다소 지연이 되고 있었으나 다섯 차례 취재를 마친 상태로 곧 집필에 들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새 작품이 기대되는 것은 고대 한․일관계를 재구성해 독자들에게 들려줌으로써 새로운 사실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칠지도는 근초고왕이 자기 손자에게 하사한 보검으로, 백제가 고대 일본을 통치했다는 방증이라고 유 작가는 내다봤다. 아키히토 일왕이 “제50대 간무 천황의 생모는 무령왕의 후손”이라고 발언한 것 이외에도 이를 입증할 만한 자료는 충분하다. 즉, 백제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통치하던 시절이 재연되는 것이고, 일본 왕실의 뿌리 또한 백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유 작가는 1961년 문예지 『자유문학』에 신인작가로 등단했고, 197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오리지널 영화시나리오에 ‘하수인’이 당선됐으며, 1974년 MBC-TV 창사기념 현상 대하드라마에 ‘임꺽정’이 당선되는 등 다방면에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고 보면 그의 작품이 유독 대하드라마로도 방영이 돼 뜨거운 사랑을 받는 것은 집필단계부터 뛰어난 구성력으로 생생한 현장감을 전달해 생동감을 주기 때문인 것 같다. 그는 아마 유 작가가 지금까지 걸어온 삶의 괘적과 밀접한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가난한 어린 시절 시작된 신앙심

그는 1941년 전북 전주에서 태어나 한국전쟁 휴전 당시 지금의 익산으로 다시 이사하게 되는데, 그 집이 소설 『탁류』 등을 집필한 채만식 선생의 집이었다고 한다. 당시 유 작가의 아버지는 폐결핵을 앓고 있었는데, 4~5년 동안 돈 벌어오는 사람 없이 병 치료에 전 재산이 들어가는 바람에 당시 그는 대학은 꿈도 못 꾸고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해 가족들 먹여 살리는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때 그를 붙들어준 것이 바로 신앙심이었다. 산 밑에 있는 교회 종소리가 너무 아름다워 교회에 가고 싶어도 처음이라 괜히 혼날 것 같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 외할머니 손을 붙잡고 예배당에 찾아갔는데, 30명이 채 안 되는 작은 규모였다. 그는 매우 즐거운 마음으로 예배를 봤지만, 이후 교회에 같이 갈 사람이 없어 교회에 나가지 않게 되자 교회 전도사 아주머니가 찾아와 왜 나오지 않는지 묻게 됐고, 그다음부터는 계속 교회에 다닐 수 있게 됐다.

1998년 작가의 집을 방문한 배우 안성기씨와 찍은 사진
1998년 작가의 집을 방문한 배우 안성기씨와 찍은 사진

작가로 꿈을 키워나가던 청소년기

그 시절 유 작가는 문학에도 눈을 뜨고 있었다. 당시는 한국전쟁 후라 모든 것이 열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접할 수 있었던 유일한 책은 동네 사랑방에 굴러다니는 연애소설이었고, 그마저도 앞부분은 사람들이 담배를 말아 피웠기 때문에 10~20페이지는 뜯겨 있었다. 책을 빌려갈 수 없어 남녀간의 연예에 관한 멋진 장면이나 표현을 공책에 필사하면서 실력을 키워나갔다. 작문 숙제로 낸 단편소설이 문제가 돼 국어선생님이었던 담임이 아버지까지 학교로 불러 혼이 나긴 했지만, 그만큼 실력은 있었던 모양이다.

사랑방 연애소설 이외에도 문학작품이 있었다. 채만식 선생이 폐결핵을 3년 앓다 한국전쟁 때 죽게 되자 부인은 유 작가 가족에게 집을 팔고 서울로 이사하게 됐다. 부인이 이사하는 날 책 정리를 도와주자 소설책을 좋아하냐며, 성경과 채만식 선생의 작품 다섯 권을 받아 소설가의 꿈을 키워가게 됐다. 유 작가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그때 받은 책들이 비록 중학생이 이해하기 어려운 문학작품이었지만, 그래도 작가로서 본격적인 꿈을 키워나가게 된 시기였다고 말했다.

아버지의 죽음과 신앙에 대한 회의

그러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게 되고, 집안 사정은 더욱 빈궁해져 갈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생활할 능력이 없었고 동생들은 아직도 어렸기 때문에 유 작가는 절망감에 빠지게 된다. 그때 교회 목사님이 그를 위해 기도해주면서 40일 새벽기도를 제안하게 되고, 그 기도가 끝나면 하나님이 먹고사는 걸 해결해준다는 목사님의 말씀을 믿었다고 한다. 하지만 40일 새벽기도가 끝나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 목사님에게 사기당한 느낌이 들면서 그 후로는 다시 교회가 나가지 않았다.

공업고등학교 전기과를 다니면서 수력발전소에서 가정까지 전기를 공급하는 강전시험에 합격하게 된다. 졸업 전인 3학년 2학기부터 섬진강 수력발전소에 출근하면서 매월 월급도 괜찮게 받으면서 가족들도 먹고사는 문제는 걱정하지 않게 되지만, 정작 더 문제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시작된다. 수력발전소에서 매일 물 흘러가는 것만 보는 단조로운 일상이 계속되다 보니 가슴속에 접어뒀던 꿈이 다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이제 막 안정화되기 시작한 일상을 뒤흔들었다.

야반도주하듯 상경 후 판잣집 생활

그때 서울에서 대학교 다니던 친구가 서라벌 예술대학 입학원서를 보내왔다. 그 학교는 시나 소설을 잘 쓰면 졸업할 때까지 장학생이 될 수 있었고, 유 작가는 전 학년 전액 장학생 모집에 합격해 가족에게 알리지 않고 야반도주하듯이 서울로 상경하게 된다.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이 일로 그는 얻는 것보다 많은 것을 잃게 된다. 작가의 꿈은 키워나갈 수 있었지만, 월급을 가져다주던 시골집에는 안정적인 수입원이 없어지게 되면서 동생들의 원망을 받았다고 한다. 학교는 공짜로 다녔지만, 서울에서 먹고 사는 문제는 녹록치 않았다.

서울에 올라와서 그는 전기도 안 들어오고 수돗물도 안 나오는 옥수동 산꼭대기 판잣집에서 자취를 시작하게 된다. 당시 판잣집에 사는 사람들은 수돗물이 없으니 밥을 하려면 새벽부터 한강 기슭에서 쌀을 씻어서 밥을 짓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부근에서는 대소변을 처리하는 사람들이 있어 한강 물에 흘러들었지만 개의치 않을 수밖에 없었다. 판잣집은 날마다 돈을 내는 날세였는데, 학교 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어려운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KBS 대하드라마 '삼국지' 출연 (1992)
KBS 대하드라마 '삼국지' 출연 (1992)
1995 문학의 해 기념 문인극에 출연
1995 문학의 해 기념 문인극에 출연

입주 가정교사와 연극부 활동

그 당시 서울대 문리대에 다니면서 가정교사를 하던 친구를 만나 하소연을 듣게 된다. 자신이 맡은 학생은 부모가 새벽부터 방산시장에서 포목장사를 하다 보니 혼자 마음대로 버릇이 생겨나 말썽도 자주 피우고 성적도 늘 꼴찌에서 벗어난 적이 없어서 고민이라는 것이다. 그는 친구에게 입주 가정교사를 맡겨달라고 통사정했고, 결국 그 학생을 맡게 됐다. 가장 먼저 그는 새벽마다 학생을 깨워 장충단공원에서 권투를 가르치기 시작했고, 다행히 학생도 잘 따랐다고 한다. 그 학생은 나중에 은행원으로 취직해 지점장으로 퇴직했다고 전했다.

그는 문예창작과 수업을 들으면서 연극부 활동도 이어나갔다. 연극부에서 허드렛일부터 대본을 쓰거나 연출도 하고, 나중에 마땅한 배우가 없으면 그 자리를 메꾸기도 했다. 훗날 그가 영화시나리오상이나 드라마대본상을 받은 것도 이때부터 쌓아온 영향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이고, 그의 작품이 유독 드라마로 제작되는 것도 작품의 구성력이 탄탄하고 실제 현장을 보듯이 생생하게 그려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는 졸업 후 한동안 연극활동을 이어나갔고, 가끔 드라마에 우정출연하기도 한다.

작가 등단과 유신시대 문인의 삶

1961년에 ‘뜻을 이룰 수 없는 돌멩이’라는 작품으로『자유문학』을 통해 신인문학상을 받고 등단했다. 이후 10년간 힘든 무명작가 생활을 하면서도 꾸준히 실력을 인정받아 1969년 현대문학상을 수상했고, 1976년 한국일보 창작문학상을 수상했다. 두 개의 상을 받고 난 뒤 실력 있는 작가로 공인받기 시작하면서 여러 잡지에서 원고 청탁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문인들은 실력에 따라 살림살이가 달라질 수밖에 없는데, 무명작가 시절에 실력을 인정받으면 이처럼 기회가 많이 주어진다고 한다.

당시 문인들의 삶을 단적으로 알 수 있는 비화가 하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헌법을 공포하자 학생들과 지식인을 중심으로 유신헌법 반대시위를 비롯해 유신헌법 개헌청원운동이 전개됐는데, 문인 31명이 유신헌법에 결사 반대하는 개헌지지성명을 발표했다. 이른바 ‘문인 지식인 간첩단 사건’이었는데, 유신정권은 유신헌법 개헌청원운동을 징역 15년형으로 처벌할 수 있는 긴급조치 1호를 선포했다. 개헌지지성명에 서명해 체포된 문인들은 간첩죄와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조사받았다.

하지만 성명에 가담한 11명은 검거되지 않아 박 대통령이 화가 나 이를 추궁하자 당시 장관이 31명 중 제집을 갖고 사는 사람이 없고 다들 문간방에 세 들어 살아 잡으러 가면 이사 가고 없어 검거가 쉽지 않다고 해명했다. 당시 문간방에 사는 사람들은 도둑들도 우습게 여길 정도였다. 이때 열악한 문인들의 처지를 들은 박 대통령은 문인들에게 면세 조치해주고, 문인들을 지원해주는 문화진흥기금과 문화예술진흥법을 제정하고 이후 전문기관인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을 설립하는 계기가 됐다.

역사소설 '대조영' 집필 무렵 (1979)
역사소설 '대조영' 집필 무렵 (1979)

장편 『들불』에 숨겨진 비화

유 작가는 1972년 『현대문학』에 동학혁명을 배경으로 한 장편 ‘들풀’을, 1975년 동아일보에 ‘연개소문’을, 1984년에는 매일경제신문에 ‘대조영’을 연재하기 시작했는데, 인기가 대단해 유명작가의 반열에 끼게 됐다. 특히 ‘들풀’을 연재할 때는 안기부 잡지사 전담 기관원들까지 나서서 연재를 중단하라고 압박했지만 1974년 무사히 연재를 마칠 수 있었다. 당시 ‘들불’은 인기가 상당히 좋아서 다음 해에 곧바로 장편으로 출간되기에 이르게 되는데, 여기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에피소드들이 있다.

1974년 동아일보 기자들이 박정희 정부의 언론통제에 맞서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하면서 언론노조를 결성하게 되는데, 이때 해직된 기자 20여명 중 유 작가의 친구도 있었다. 당장 생계가 막막해진 친구를 위해 ‘들불’ 출판을 맡겨 1000부를 찍었는데, 판매금지 조치가 떨어져 서점에 유통시킬 수 없게 됐다. 이때 두 사람은 대학가가 모여 있는 신촌의 서점으로 가서 판매를 부탁했고, 대학가에 입소문이 나면서 당시 대학생들이 반드시 읽어야 하는 필독서로 자리 잡게 된다.

이후 이 책은 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도 전해져 김 전 대통령이 읽고 난 후 감상문을 옥중서신으로 써서 셋째 아들인 김홍걸에게 읽어본 명작 중에 최고라며 읽어보기를 권유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완전히 베스트셀러로 등극하게 된다. 유 작가가 이 작품을 연재할 당시 30대 초반의 나이로, 당시 신문에 연재되는 역사소설들은 60~70대의 다양한 연륜을 지닌 작가들이 담당하고 있었는데, 신문사의 입장에서는 독자들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하고 있었다.

신문 연재소설로 승승장구하다 찾아온 위기

동아일보에서 역사소설 연재 요청이 오면서 ‘연개소문’을 연재하려던 당시 신문사 내부에서는 젊은 작가에게 역사소설을 맡기는 게 말이 되느냐는 반발의 목소리가 나오자 유 작가는 회의에 참석해 신문사에서 역사소설 작가를 원하는 것은 독자 확보에 있는 게 아니냐며, 기존의 역사소설보다 훨씬 젊은 감각으로 젊은 층을 독자로 끌어오겠다고 반발을 잠재웠다. 여기에 제대로 된 작품이 아니라면 그만두겠다고 하자 차라리 이번 기회에 한 번 모험해보는 것도 좋겠다는 분위기로 변했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성공에 힘입어 14년 넘게 신문 연재소설을 썼다고 한다. 그것도 한 신문에만 소설을 연재하는 게 아니라 중앙지와 지방지 2개 신문에 다른 작품을 연재한 적도 있을 정도로 탄탄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신문 연재소설은 IMF 구제금융이 터지면서 신문사 재정의 어려움으로 없어지긴 했지만, 상당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유 작가는 방송활동까지 하고 있었는데, MBC 대하드라마 방송 당시 일에 대한 스트레스로 인해 심근경색이 오면서 또 한 차례 전환기를 맞게 된다.

2002년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청와대 기념 촬영사진
2002년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청와대 기념 촬영사진

심근경색 앓다 다시 되찾은 신앙심

심장에서 밖으로 나가는 대동맥 세 개 중 하나가 막히면 간단한 시술로 4일 정도면 완치될 수 있지만, 유 작가는 대동맥이 두 개가 막혀 세브란스 강남병원에서 심장 우회로 시술로 5시간 동안 수술을 받아야 했다. 수술 후에도 3개월 동안 지켜봐야 하는데, 성공확률은 반반이라고 해서 처음 1개월은 중환자실에서, 나머지 2개월은 일반병실에서 지내야 했다. 다행히 이제 살아났다고 느낀 순간 그는 병원에 있는 예배당을 찾아가 삶과 죽음에 대한 고찰을 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그때 유 작가의 심정을 정리해 출간한 신앙고백 에세이가 『요나의 아들』이었다. 에세이는 당시 심근경색으로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을 때의 상황에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7살 때 할머니에게 예배당 가자고 조르던 시절부터 유 작가의 주요 시기마다 자세한 내용이 실려 있다. 특히, 신앙심을 회복한 후 장요한 목사와 함께 서울 강남에서 개척교회로 시작해 4년도 안 돼 ‘강남 교회개척의 신화’를 이룩한 강남 임마누엘교회까지 유 작가의 하나님 사랑이 배어 있고, 두 번째 심근경색이 찾아오면서 참회의 기도가 이어지게 된다.

첫 번째 입원 당시 유 작가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1996년 국내 개봉작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를 떠올리면서 영화 속에서 친구의 집을 찾는 아이의 물음이 마치 병원에서 있는 자신과 똑같다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스포츠에서는 경기에 져도 다시 경기를 할 수 있지만, 단 한 번 주어진 인생을 산다는 것은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젊은 시절 목사님으로 인해 하나님에 대한 배신감이 자신의 잘못에서 기인했음을 알았고, 뒤늦게나마 그의 마음 깊은 곳에는 하나님의 존재를 언제나 인정하고 있었다.

최인호와 약속으로 탄생한 『소설 사도 바울』

유 작가에게는 40년 동안 일주일에 한두 번은 만날 정도로 친하게 지내는 문학 동기가 두 명이 있는데, 지금은 둘 다 작고한 이어령씨와 후배 최인호였다. 어느 날 최인호가 유 작가의 병실에 찾아왔을 때 그는 자신이 비록 성공했지만, 하나님을 위해 한 일이 없어 벌 받았다고 자책했다. 지금까지 그의 작품 중 현대문학상을 받게 해준 『유다행전』 이외에 하나님을 위해 쓴 작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카톨릭 모태신앙자였던 최인호는 작품으로 선교활동을 하는 문서 선교를 제안했고, 두 사람은 나란히 작품을 쓰기로 한다.

그는 최인호에게 최인호가 바라보는 예수의 모습을 소설로 쓰도록 했고, 최인호는 바울을 좋아하는 유 작가에게 사도 바울을 소설로 쓰기를 권했다. 하지만 최인호는 작품의 1/3을 채 쓰지 못한 채 유명을 달리했고, 유 작가는 7년에 거쳐 『소설 사도 바울』을 완성하게 된 것이다. 그는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유현종과 최인호가 본 예수를 주제로 한 소설을 써보고 싶다고 했다. 후배 최인호와의 약속을 혼자서라도 완성하고 싶은 진한 우정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현재 익산시에서는 ‘들불 유현종 문학관’을 추진중에 있다. 익산시는 산업단지가 발전한 반면 문화예술자원은 빈약한 편이다. 시조시인이자 국문학자인 이병기 선생의 문학관조차 2017년에 이르러서야 건립됐고, 소설가 채만식 문학관은 2001년 군산시에 개관됐다. 대선과 지자체 선거를 거치면서 시의회 예산을 심의해야 최종 결정이 되겠지만, 익산시 금마면 일대에 연면적 300평 규모에 지상 2층, 지하 1층으로 추진중이며, 동학기념물과 유 작가의 작품들이 선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휴식을 취하며 자택 정원에서 (2009년)
휴식을 취하며 자택 정원에서 (2009년)
들불 유현종 문학관 계획(안)
들불 유현종 문학관 계획(안)

마지막으로 유현종 작가에게 묻다

유현종 작가에게 ‘글이 힘을 잃은 시대’의 방향성에 대해 물었다. 그는 접촉(Contact)과 연결(Connection)의 차이를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통해 세상과 연결돼 있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은 접촉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사람과 정보를 만나는 일은 접촉일 뿐 존재와 존재 사이의 정신적인 교감에서 일어나는 연결은 아니라는 것이다. 단순히 사람을 만나거나 휴대폰, 카카오톡으로 문자와 메시지를 주고받는 접촉이 연결로 확장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이어 일종의 관음증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덧붙였다. 조선시대 사색당파의 파벌싸움에서 유래를 볼 수 있듯이 자칫 잘못 연루되면 집단 자체가 몰살되기 때문에 소신껏 말하지 못하고 나서야 할 때 나서지 못하고 눈치를 보며 패거리 문화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우리가 자주 쓰는 말 중에 ‘괜찮다’는 말의 어원도 ‘괜치 않다’로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논리적으로 맞는 이야기도 권위적으로 묵살해 버리니까 더는 말 못하고 ‘괜찮다’는 말이 자주 쓰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유현종 작가는 사물이나 사람에 대해 단편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충분히 교감하고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을 때 진정성 있는 글이나 사고가 나올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과거 한 인터뷰에서 연재소설에서 해방돼 쓰고 싶은 소설만 쓰게 됐다며, 늦었지만 진정한 내 독자들을 위해 멋진 작품을 남기겠다 약속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때 ‘자기만의’ 작품을 쓰겠다는 강렬한 의지는 유현종 작가가 앞서 말한 두 가지를 경계하고 구분한 실천의 산물이 아닐까 싶다.

(사진=이상현 사진기자)
(사진=이상현 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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