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고흐의 포도밭 ②
[문화산책] 고흐의 포도밭 ②
  • 전기복 기자
  • 승인 2022.09.12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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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포도밭' 아를, 1888년 11월, 러시아, 푸슈킨 미술관<br>
'붉은 포도밭' 아를, 1888년 11월, 러시아, 푸슈킨 미술관.

(내외방송=전기복 기자) '붉은 포도밭'을 보자. 우측 상단에 형성된 소실점을 따라 좌측의 가로수도, 중앙의 포도밭도, 우측의 개울도 원근감있게 사라져 가는 특이한 구도다. 등장인물이 이렇게도 많은 그림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포도를 수확하는 많은 아낙네들이 수고를 아끼지 않는 노동현장이나, 오직 붉고 노랗고 푸른색만으로, 불붙은 듯한 포도잎과 개울마저 노란빛으로 묘사하여 색의 향연이 먼저 돋보이는 그림이 되었다. 색채가 주는 감동에 감탄할 뿐이다.

이 그림 역시 색채의 강렬함에도 전체적으로 평안함이 느껴지는 것은 앞서 말한 대로 행복하고 안정된 생활에 기인한 것이리라. 애오라지 이 그림이 고흐 생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팔린 그림이다. 그림을 산 사람은 '외젠 보흐의 초상화' 모델인 외젠 보흐의 친여동생 화가 안나 보흐로, 1890년 1월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20인전’에 출품된 그림을 단돈 400프랑에 구입했다고 한다. 통설이 그렇다. 여타 팔린 사례는 접어 두자.

아직은 함께 그리고 식사하며 창조적 영향력을 주고받는 이 풋풋하고 영롱한 정신을 '포도향기 그윽한 아래로 어여쁜 아가씨가 아니라 고갱과 손잡고 가는 청포도 사랑 아닌 우정'으로 불러본다. 굳이 그해 크리스마스 이브 전날 귀 절단 사건으로 파국을 맞은 이야기를 상상하기엔 아직은 이른 시기일 뿐이다. 이렇듯 아를의 포도밭 풍경은 공동체를 일구고자 하는 기대, 희망, 자신감, 연대의 기쁨 등이 함축된 그림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아를 시기 이후 약 1년 6개월 동안 포도밭(나무)을 모티브로 한 그림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생레미 시기 작성된 편지에서 동생 테오에게 "'붉은 포도밭' 그림을 보내 주면 작은 그림으로 모사하려고 한다"거나, "포도밭을 그리려면 다른 마을까지 가야한다"는 표현을 보면, 대상의 부재가 포도밭 그림이 한동안 그려지지 않은 이유로 생각된다. 달리 생각해 보면 시적인 분위기의 포도밭에 대한 고흐의 애정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이야기이다.

고흐가 '포도밭이 시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고 한 이유는, 포도나무의 뒤틀며 오르는 덩굴성과 휘감는 덩굴손의 불규칙성이 이루는 숲이 주는 분위기를 이름 아닐까. 불타오르듯한 사이프러스나무, 더께 가득한 굴곡진 둥치의 올리브나무 형사(形似)가 그렇지 않은가. 생레미 시기 그곳에서 본 사이프러스며 올리브나무를 얼마나 많이 그렸던가. 그래서 포도나무를 사이프러스, 올리브나무 등과 함께 가히 '고흐의 나무'로 손꼽아 본다.

'농부 여인이 있는 포도밭' 오베르, 1890년 5월, 네덜란드, 반 고흐 미술관
'농부 여인이 있는 포도밭' 오베르, 1890년 5월, 네덜란드, 반 고흐 미술관.

다른 두 작품, '오베르의 포도밭' 그림이 그려진 것은 생레미에서 1년 남짓 생폴드모졸병원 생활을 한 뒤의 일이다. 오베르는 동생 테오 가족이 있는 파리로부터도 가까울뿐더러 자신을 치료해 줄 가셰 박사가 있었다. 고흐는 시골 풍경을 간직한 오베르를 마음에 들어 했고 곧바로 이러한 풍경들을 그림으로 다수 그렸다. 이때 동네 어귀에서 '농부 여인이 있는 포도밭'을 보게 된다.

5월의 포도밭은 손바닥 모양 잎이 나기 전에 덩굴로 뻗어나 가는 어린순이 긴 고개를 하고 넘어질세라 덩굴손이 등대를 감거나 하물며 허공에 새끼손을 내미는 풍경이 된다. 꽃은 아주 작지만 송곳이 빽빽이 솟은 듯한 꽃차례로 핀다. 그림에선 굴곡의 선이며 점으로 묘사되었다.

몸을 뒤틀며 하늘을 향하는 덩굴성과 덩굴손의 곡선이 고흐의 소용돌이치는 표현법과 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그러나 연필로 시작한 그림은 다양한 푸른색 음영에 오일 페인트와 수채화를 추가하여 완성된 작품처럼 보이지 않는다. 배경의 빨간 지붕은 갈색으로 퇴색되고, 전경은 비워둔 듯 그냥 흰색이다.

유일하게 가까이에서 포도밭을 올려다보는 구도로 그렸다. 그래서 포도나무 아래 서정도 느껴진다. 포도나무며 등대가 여타 그림보다 사실적이다. 우리네 우물가나 장독대를 그늘 지우던 포도나무 풍경과 잘 맞는 그림이라는 생각이다. 그래서일까. 어설프고 완성되지 않은 것 같지만 되돌아 다가서게 만드는 서정 가득한 그림이 됐다. 고흐의 마음은 벌써 포도나무옆 농촌 아낙의 곁인지, 아직도 그림은 미완성이다.

'오베르 풍경을 담은 포도밭' 오베르, 1890년 6월, 미국, 세인트루이스 미술관
'오베르 풍경을 담은 포도밭' 오베르, 1890년 6월, 미국, 세인트루이스 미술관.

이제 마지막으로 '오베르 풍경을 담은 포도밭'이다. 연푸른 덩굴과 목초지가 온통 푸른 전경을 이루고 그 뒤에는 초록과 연두색의 시골 지붕들이 하늘보다 넓게 자리한다. 좌측 가장자리 몇 점의 붉은 양귀비꽃, 빨간 지붕 한둘이 무한정 퍼져나갈 것만 같은 푸르름의 향연에 지긋이 울을 치며 생동감을 더 자극한다. 포도밭과 목초지에서 동네 지붕들로, 나지막한 산등성 그리고 하늘까지 품고 푸른색으로 이어진 풍광이 주는 편안함은 또 어디에서 왔을까.

오베르에 첫발을 디딘 고흐의 반응이며, 가셰 박사의 초대로 동생 테오 가족이 오베르를 방문한 시기를 상기해 보자. '오베르 풍경을 담은 포도밭'은 그 시기에 그려졌고, 동생 테오 가족의 방문이 준 안도감, 행복감의 영향이라 생각된다.

"오베르는 정말 아름다워 무엇보다 요새는 없어져 가는 오래된 초가집들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이 좋았어. ……. 이곳은 정말 아름다워, 전형적인 시골의 한복판으로 정말 그림 같아" (여동생 빌라미나에게, 1890.6.12일경)

"테오 내외와 아기가 일요일에 이곳에 왔습니다. 우리는 가셰 박사의 집에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 전보다 훨씬 그들 가까이에 살고 있다는 걸 느끼고 저는 마음이 참으로 편안해졌습니다" (어머니에게, 1890.6.12일경)

이후 테오가 화랑을 그만두고자 하는 처지에 처하자 재정적인 지원에 대한 불안 등이 겹친다. 포도밭이 주는 맑고 평온한 느낌은 그냥 나온 산물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해 6월 중순을 지나면서 그려지는 그림, '비오는 하늘 아래 건초더미', '까마귀가 있는 밀밭', '나무뿌리와 줄기' 등을 보면 그렇게 비교되어 뵌다.

이제까지 고흐가 그린 포도밭 풍경을 감상했다. 고흐의 말대로 거기 포도밭이 있어 그렸다기보다는 풍경이 주는 '시적'인 감흥에서 그림은 시작되었다. 네 작품 모두 우연찮게도 그가 가장 행복해했던 시기와 맞물려 있었고, 그런 원동력이 바탕이 되어 평온한 느낌을 주는 그림이 그려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모티브가 같은 포도밭 그림이나 '아를의 포도밭'이 포도를 수확하는 아낙들의 노동과 풍요가 있고 목적지를 향한 이의 기대와 희망이 담긴 경치라면, '오베르의 포도밭'은 그저 자라고 어우러진 풍경 자체를 즐기는 자의 옅은 미소같은 풍경으로 다가왔다.

여름비가 오락가락한다. 코로나도 다시 확산세란다. '웃을 일이 있어 웃는 게 아니라, 웃다 보면 웃을 일이 생긴다'는 말이 있다. 고흐의 포도밭 그림이 그렇다. 행복한 일이 있어 평온한 그림이 탄생했다지만 어찌 알겠는가. 포도밭을 보다 보면 행복해할 좋은 일이 생길지. 이 여름 고흐의 포도밭 그림을 감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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