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박우홍 동산방 화랑 대표 "'선입견 없는 혜안'으로 미술계에 '보탬' 준 아버지, 동산 박주환"
[인터뷰] 박우홍 동산방 화랑 대표 "'선입견 없는 혜안'으로 미술계에 '보탬' 준 아버지, 동산 박주환"
  • 임동현 기자
  • 승인 2023.05.28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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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를 틀에 가두지 말라' 큰 가르침, 작품과 기증자 같이 따라다녀야 기증 활발해져"
박우홍 동산방 화랑 대표. (사진=2023.5.28 임동현 기자)
박우홍 동산방 화랑 대표. (사진=2023.5.28 임동현 기자)

(서울=내외방송) 지난 18일부터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동녘에서 거닐다 : 동산 박주환 컬렉션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이 전시는 동산방 화랑 설립자인 故 동산 박주환(1929~2020) 대표가 수집하고, 그의 아들인 박우홍 현 동산방 화랑 대표가 기증한 총 209점 중 한국화 대표작 90여 점이 선보이며, 192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한국화의 변화와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1961년 표구사인 동산방을 시작으로 1974년 동산방 화랑을 만든 동산 박주환은 '미술계에 조금이나마 보탬을 주고픈' 마음으로 유명세나 가격이 주가 아닌, 실력있는 작가와 작품을 수집하며, 자칫 미술사에서 가려질 뻔한 작가들의 이름과 작품을 알리면서 현대 한국화단의 기틀을 마련했다. 미술에 대한 그의 애정은 아들인 2대 박우홍 대표에게 이어졌고, 박 대표는 선친의 마음을 헤아리며 지난 2021년과 2022년 두 차례 국립현대미술관에 작품들을 기증했다.

지난 17일 열린 언론공개회에서 감회어린 표정으로 작품들을 살펴보던 박우홍 대표의 마음, 그리고 우리가 몰랐던 동산 박주환의 이야기를 듣고픈 마음에 5월, 서울 인사동에 있는 동산방 화랑에서 박우홍 대표를 만났다.

지난 18일부터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전시가 열리고 있다. 언론공개회에 참석해 전시를 관람하니 감회가 남달랐을 것 같다

기증을 하면서 지금은 관장직에서 물러난 윤범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에게 두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는 언론에 바로 공지하지 말 것, 두 번째는 수장고에 넣어놓고 사장시키지 말고 자료로 활용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활용할 방법을 찾겠다고 윤 전 관장이 약속을 해서 기증을 했는데, 이렇게 이번에 미술관 한 층을 다 활용해 정성스럽게 전시를 만들어주니 정말 더할 나위없이 고맙고 감사하다.

동산방 화랑의 역사를 간단히 소개해달라

아버님은 일제 강점기 시절 정통표구를 배우신 몇 안되는 분이셨다. 해방 전부터 표구를 배웠고 1961년, 지금 종로2가 전봉준 장군 동상이 있는 곳 쯤에 '동산방'이라는 표구사를 만들었다. 표구사를 하면서 한 공간에 조선시대 그림과 근대 미술품을 전시하는 전시장을 만든 것이다. 동산방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고급스런 표구를 하는 곳'으로 알려지게 됐고, 이를 통해 작가들과 교류하고 그림을 많이 보게 되면서 점차 자신만의 안목을 가지게 됐다. 

당시에는 '화랑'이라고 해도 지금같은 유통구조로 운영되는 곳이 아니었다. 단순히 전시를 하고 파는 곳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70년대 초부터 현대화랑, 조선화랑, 진화랑 등이 생겨나면서 화랑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지금의 구조를 갖추기 시작했다. 동산방도 처음에는 '화랑'이라는 말을 쓰지 않다가, 1974년에 비로소 '동산방 화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현대적 유통구조에 편입이 된 것이다.

초반에는 화랑이 그렇게 활발하게 움직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70년대 중반 한국에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아파트 벽면 장식을 위해 그림이 필요하게 됐고, 그 때문에 그림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그렇게 화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거다.

아버님은 표구를 잘해서 그림을 돋보이게 하는 것도 중요하게 여기셨지만, 훼손된 고서화 등을 복원하는 것을 자신의 모토로 삼으셨다. 거창하게 무엇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작업을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사명감을 가지시게 된 것 같다.

박우홍 대표가 화랑에 전시된 고암 이응노 화백의 그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2023.5.28 임동현 기자)
박우홍 대표가 화랑에 전시된 고암 이응노 화백의 그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2023.5.28 임동현 기자)

기증을 결정할 때까지 과정이 궁금하다

아버님은 자신이 '1세대 화상(畵商)'으로서 우리 화단이나 화랑가에 뭔가 조금이라도 보탬이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제게 여러 번 말씀하셨다. 한때 부암동 환기미술관 옆에 조그만 기념관을 만들 계획도 가지고 계셨는데, 수익 구조상 미술관을 오랜 기간 동안 운영하기가 힘들다는 게 문제였다. 살아있는 미술관, 평생교육의 장으로 만들려면 어마어마한 돈이 드는데 그만큼의 수익을 내기가 쉽지 않다보니, 문을 닫게 되고 지속성이 없어지는 현실 때문에 아버님은 결국 꿈을 포기하셨다.

그렇다고 기증을 하자니 미술관의 운영이 문제였다. 기증된 작품은 미술관 수장고에 들어가서 빛을 보지 못하는 거다. 외국의 경우 콜렉션을 한 사람의 이름을 알리면서 기증자를 빛내주는데 우리는 그런 제도가 확립되지 않았다. 좋은 의미로 기증을 해도 수장고로 들어가면 끝이다. 작품이 그대로 묻히는 거다. 

아버님은 돌아가실 때까지 그 고민을 풀지 못하셨다. 그런데 그분이 작품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 팔지를 않았던 걸 보면 기증하고픈 마음이 더 크셨던 것 같다. 그림을 팔면 '보탬이 되고 싶다'는 당신의 생각과 다르고, 기증을 한다면 사람들에게 '명예만 생각한다'고 비난받을 수 있어 생전에 기증을 못하셨던 것이다. 해외에 있는 동생들과 상의를 해서 기증을 결정했고 앞서 말한 것처럼 두 가지 조건으로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했다. 

작품 수집의 기준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

아버님의 가장 큰 장점은 '선입견이 없는, 좋은 감식안'이다. 좋은 작품을 고를 수 있는 혜안을 가지고 계신다. 급수는 조금 떨어지는 작가라도 좋은 작품을 찾아내고 그 작품을 발굴해내신다. 개인전이 열리면 30점 넘게 전시를 하게 되는데 그 중 비교적 질이 좋은 한두 점을 선택한다. 기증 여부를 떠나 '보탬이 됐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가지셨기에 작가의 괜찮은 작업을 모으게 된다.

사람들은 흔히 미술 작품이 비쌀수록 좋다고 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알려지지 않은 작가의 작품도 좋은 작품들이 많다. 그 작품의 가치를 바로 알아차리신다. 이 혜안은 공부를 해서 얻어진 것이 아니라 미술 작품을 보고 살피면서 감각적으로 알아낸 것이다. 

이분은 그림을 파는 것보다 사는 것을 더 좋아하시는 분이다. 좋은 작품을 자신이 가지는 것을 정말 좋아한다. 애정이 생기는 작품이라면 가치의 높고 낮음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하지만 화상이다보니 결국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을 팔 수 밖에 없는데, 그럴 땐 아주 며칠 동안 가슴아파한다. 분위기가 싸늘해진다(웃음). 그 정도로 애정이 넘치셨다.

1977년에 이상범 화백의 <초동>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했던 것도 미술관 발전에 보탬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신 거다. 1926년작으로 지금 가치로 따지만 2~3억원은 됐을텐데 흔쾌히 기증을 하셨다. 이상범 화백의 대표작인데 이런 작품은 한국을 대표하는 미술관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셨다.

이상범, 초동(初冬), 1926, 종이에 먹, 색, 152×182cm, 국립현대미술관 동산 박주환 컬렉션. (사진=국립현대미술관)
이상범, 초동(初冬), 1926, 종이에 먹, 색, 152×182cm, 국립현대미술관 동산 박주환 컬렉션. (사진=국립현대미술관)

작가들과도 많은 교류를 했을 것 같은데 기억나는 이야기가 혹시 있는지?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났을 때 청와대 쪽에서 시위를 하던 대학생들이 경찰을 피해 인사동 표구사로 도망을 오기도 했다. 그러면 작업장에 학생을 숨겨놓고 경찰에게는 '안 왔다'고 이야기하는데, 그 때 안면을 텄던 작가가 '진경'이라는 말을 만든 일랑 이종상 화백이다. 서양에서는 현장에서 풍경화를 그리는 경우가 있지만 동양화는 그런 예가 없는데, 이종상 화백은 현장에서 직접 풍경을 그리며 독도 그림 등 여러 작품을 남겼다. 현장에서 직접 그린 풍경 그림이란 의미로 참 진(眞)자를 써서 진경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동산방은 '특선방'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동산방에서 표구를 하면 국전에서 특선을 하거나 상을 받아서 그렇다(웃음). 작가들이 출품하려는 작품을 아버님께 보여주고 아버님이 조언을 해주시는 역할을 하셨다. 참 촉이 빠른 분이셨다.

동산 박주환 선생에게 받은 가장 큰 가르침이 있다면?

시중에 돌아다니는 평가, 세속적인 평가에 귀기울이지 말고 절대치를 찾아가는 훈련을 계속하라고 하셨다. 허명(虛名)에 휩쓸리지 말라는 것이다. 화상들을 보면 어느 한 작가를 '잘 팔리는 작품'으로 트레이드마크화 하려 한다. 일례로 어느 작가는 '설경(눈 내린 경치)은 안 좋고 하경(여름 풍경)은 좋다'고 하는데 설경이지만 좋은 그림도 분명히 있고 하경이지만 좋지 않은 그림도 있다. 이를 무시하고 '하경이 좋은 작가'라는 틀에 작가를 가두는 것이다. 절대 피해야 한다. 현혹시키려 하지 말고 본질을 꿰뚫는 눈을 가지는 것이 좋은 화상이라는 말씀이다. 틀에 가두려 하지 말라.

국립현대미술관이 이번 컬렉션을 열면서 "국내 수집가들의 기증문화를 활성화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밝혔다

사실은 기본적인 부분부터 봐야하는 것이라 쉽지가 않다. 수집가가 기증을 하면 미술관에 조그마한 방이라도 만들어 수집가를 기리는 것이 기본인데 우리는 그게 없다. 운영시스템에 문제가 많다. 기증의 의미를 부여해 '나도 기증을 해야겠다'라는 마음을 갖게 해야 하는데 그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

전시 개막 후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미술관 관계자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눴는데, 유홍준 전 청장이 일전에 그림과 조각 3점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했는데 전시회장에 갔더니 작품에 기증자의 이름이 없었다고 한다. 누가 기증했는지, 기증을 받은 작품인지 아닌지를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은 것이다. 

이를 들은 미술관 관계자가 한 말이 "청장님이 기증한 것을 몰랐다"였다. 전달이 안 된거다. 그날 그분들 엄청 혼났다(웃음). 이런 식으로 하면 누가 기증을 하겠냐고 혼을 낸 거다. 

작품과 기증자 이름은 같이 따라다녀야 한다. 자랑하자는 의미가 아니라 기증을 통해 그 전시가 이뤄진 것이고, 기증자를 알려야 사람들도 동참하고픈 마음을 가질 수 있는데, 누가 기증했는지 분류도 하지 않는 게 현실이다.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화랑의 역사가 길지 않기에 2대에 걸쳐 화랑을 운영한 것은 제가 처음이다. 3대를 이을 생각도 했지만 외국에 있는 아들이 한국의 경쟁적인 교육 속에서 아이를 교육시키는 것에 자신없어 하고 있다. 그렇다고 무조건 국내로 들어와라, 화랑을 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지 않는가. 앞으로 화랑을 어떻게 이어갈지 고민이 있지만 지금의 활동을 계속할 생각이다. 6월 경 전시가 열릴 예정이니 한 번 구경오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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