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외방송=임동현 기자) (이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한국이라는 곳, 그 곳에서 그는 자신을 '경쟁력이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추위도 잘 타고 치열하게 목숨 걸고 무엇을 하지도 못하고 물려받은 것은 '개뿔'도 없는데 까다롭기는 또 '더럽게' 까다롭다. 그는 마침내 추운 겨울이 지속되는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한국이 싫어서', 그리고 '여기서는 못 살겠어서'. 그렇게 그는 뉴질랜드로 건너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한다.
장건재 감독의 <한국이 싫어서>는 2015년에 발간된 장강명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원작의 주인공 '계나'는 호주로 향하지만 영화의 주인공 '계나'(고아성 분)는 뉴질랜드로 향한다. 원작에서 재개발 이전의 서울 아현동에 살았던 계나는 영화에서는 인천의 좁은 집에서 추위와 싸워가며 산다. 직장이 있는 서울 강남역까지 왕복 4시간을 가야하는, 그렇기에 회사에 오자마자 집에 가고 싶다고 느끼게 되는 거리다.
그렇게 어렵게 다니는 직장은 부조리로 가득하고 기자가 되려는 남자친구 지명(김우겸 분)과의 관계도 점점 서먹해진다. 집안의 차이, "한국은 열심히 사는 사람들에게 기회의 땅"이라는 생각의 차이.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한국을 떠나는 것이다.
영화는 행복을 찾기 위해 뉴질랜드로 간 계나의 여정을 따라다니면서 과연 계나가 정말로 자신의 뜻대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될 지를 살펴본다. 물론 그가 간 뉴질랜드에서도 시련이 찾아오기는 하지만 분명 한국과는 다른 삶이 펼쳐지고 있다. 그 곳에서 계나는 스스로를 돌아보며 자신이 생각하는 '행복'을 찾기 시작한다. 그는 한국에 돌아왔을 때 자신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변하지 않은 지명을 보며 잠시 마음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다시 그가 찾고픈 '행복'이 있는 곳을 찾아 떠나게 된다.
영화는 소설에도 등장한 동화 <추위를 싫어하는 펭권>의 내용을 생각해야 이해가 될 수 있는 영화다. 추위를 싫어하는 펭귄 '파블로'는 어느날 남극을 떠나기로 한다. 하지만 난로를 등에 짊어지고 스키를 타고 가다가 낭떠러지에서 얼어붙은 채로 발견되고 뜨거운 물주머니를 잔뜩 몸에 품고 나서다가 얼음이 녹으면서 물 속에 잠기기도 한다.
결국 그는 자신의 집 주변을 잘라 배처럼 만들고 길을 나선다. 막판에 따뜻한 햇살에 얼음집과 배가 녹으면서 위기를 맞지만 마침내 욕조를 타고 어느 섬까지 당도하게 되고 파블로는 드디어 추위가 없는 따뜻한 섬에서 살게 된다. 이 동화의 마지막 말은 이것이다. '다시는 춥지 않을 거에요'. 이는 곧 계나의 희망이자 삶의 목표이기도 하다.
영화 <한국이 싫어서>는 소설의 내용을 바탕으로 만들기는 했지만 소설과는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이것은 아무래도 10년이라는, 소설과 영화가 나온 시간의 차이가 크다는 것에 있다. 연수 자체도 차이는 있지만 그 9년이라는 기간에 벌어진 일들, 그리고 그로 인한 차이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장건재 감독은 지난 22일 서울 삼청동에서 가진 라운딩 인터뷰에서 영화 속 계나를 "생존한 여성"이라고 밝혔다. 그 이유를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계나는 10년 전 자기 또래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가다가 여객선 사고를 당한 것을 알았고, 20대에 자기 또래 여성이 (자신의 사무실이 있는) 강남역에서 살해당하고, 자기가 알 수도 있는 또래 친구들이 이태원에서 사고를 당했다. 거기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국가간의 장벽이 높아지고 차별도 확장됐다. 운좋게 살아남은 셈이다. 시의성이 소설이 가진 힘이라고 생각하는데 소설의 시의성이 낡은 경향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소설을 영화화하는 저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소설이 나왔던 2015년에는 한창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헬조선'이라는 말이 유행했고 이는 곧 '한국을 떠나는 것'이 젊은이들의 로망이 된 시기였다. 그렇기에 소설은 계나가 호주 영주권을 얻어 이민에 성공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영화 속 계나는 다른 곳으로 다시 떠난다. 그가 정착을 할 지 혹은 디아스포라의 길을 걸을 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다시는 춥지 않을 곳'을 찾아가는 여정 자체가 계나에겐 행복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생각해봐야한다. 왜 한국은 여전히 '추위에 무방비 상태인 계나의 인천 집'과 다름없는 모습이 됐을까? 우리는 정말 젊은이들이 자신의 미래를 한국에서 펼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일까? 내가 행복해지겠다고, 우리 세대가 행복해지겠다고 젊은이들의 행복을 방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시 아예 젊은 세대들을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들'로 매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면에서 <한국이 싫어서>는 한 사람의 '행복을 향한 여정'이기도 하지만 '한국만 바라보고 살아야하는 사람'들에게 현재의 한국을 생각해보게 하는 매개체이기도 하다.
다시 생각해보자. 과연 '한국이 싫어서'를 우리는 깰 수 있을까? 최근 8월 한 달 동안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던 여러가지 상황들을 보면 '한국이 싫어서'는 계속 이어질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암울하다. '여기서는 못 살겠어서'를 설득시킬 방법이 당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