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외방송=임동현 기자) 철사가 연결된다. 철과 철이 연결된다. 철사와 철사가 용접을 통해 이어지면서 선이 되고 그 선을 연결하면 어느 순간 하나의 형태가 된다. 그리고 이 선들은 하나의 모형을 이루고 없었던 공간이 만들어지면서 하나의 새로운 입체적인 작품으로 탄생하게 된다. 무엇을 만들어야한다는 계획을 세워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연결하면서 즉석에서 나오게 되는 형태를 작가는 각각의 새로운 작품으로 만들어낸다. 마치 음악을 작곡하듯이, 악보에 음표를 그리듯이 머릿속에 떠오르는대로 연결하고 펴고 접는다.
갤러리현대에서 열리고 있는 존 배의 개인전 <운명의 조우>는 존 배 작가의 70여 년의 예술적 여정을 정리한 전시다. 그는 철을 이용한 용접 조각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 재미 작가로 철사를 이용해 복잡한 구조의 작품을 제작하고, 운동감을 살린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의 작업은 단순한 작품 활동이기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실험하고 확장해가는 과정이었으며 이는 그가 70년이 넘게 예술 활동을 해온 기폭제가 된다.
그의 작업은 철사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철을 소재로 한 이유에 대해 "열을 가하면 부드럽게 구부러지고, 열을 멈추면 다시 단단해지는 철의 형질이 좋았다"고 밝혔다. 덧붙여 그는 철이 '노동자의 금속'이라는 점도 좋았다고 한다. 강하고 탄력적이고 유연하다는 것이다. 그 유연함이 연결을 가능하게 하고 강함이 작품을 오랜 기간 유지시키는 셈이다.
철사의 본래 모습은 점처럼 얇은 두께의 길고 긴 선이다. 이는 곧 '선'과 '점'에서 작품이 출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작품을 만들 때 '완성된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고 작업을 한다고 한다. 작업을 진행하면서 작가는 점과 선의 움직임에 주목하고 그것이 어떻게 얽히고 설키는지에 주목한다. 그 얽힘으로 인해 하나의 형태가 만들어지기도 하고 하나의 공간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얽히고 설키는 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선과 점의 대화'라고 할 수 있다. 그 대화를 통해 예측하기 어려운 모양의 작품이 등장하고 이는 곧 비록 직접적으로 움직이지는 않지만 살아있는 느낌을 주는 유기체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존 배의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하나 촘촘하게 연결된 철의 연결에 눈길이 쏠리게 된다. 마치 캔버스에 한 점 한 점을 찍어 그림을 완성해나가듯 존 배는 철사 하나하나를 촘촘히 엮어 작품을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작품을 지탱하는 역할을 하는 바닥 역시 한 점 한 점 철사를 엮은 그의 솜씨를 볼 수 있다. 이는 곧 이 작품들이 단기간에, 어떤 특별한 기술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오랜 기간, 우직하게, 손이 가는대로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전시된 작품 하나하나마다 작가의 노력이 깊이 배어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의 작품을 이해하려면 그가 살아온 과정도 하나의 힌트가 될 수 있다. 그는 1937년 서울에서 태어나 일산에서 유년을 보내다가 1949년에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의 아버지는 목사였고 어머니는 러시아에서 태어나 러시아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은 신여성이었다. 그리고 그는 1965년 28세의 나이에 프랫 인스티튜드에 최연소 교수로 취임해 40여 년간 교수를 지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수학과 과학, 자연에 관심을 가지고 탐구했고 이것이 곧 철사를 용접해 다양한 모형과 공간을 만들어낸 요소로 작용했다. 뫼비우스의 띠를 생각하게 하는 연속성, 정밀하게 만들어진 좌우대칭 등의 구현 등이 그것이다.
그는 또 김환기, 백건우, 백남준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인들과 교류했는데 특히 주목되는 인물은 김환기다. 앞에서 철사를 하나하나 촘촘하게 연결한 것을 거론했는데 이 형식이 바로 김환기 화백이 단색화를 그리는 형식과 비슷해보인다. 미국에서 멀고 먼 한국에 있는 친구들과 그리운 사람들, 고향의 나무와 풀 등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하나하나 점으로 표현하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완성한 김환기와 하나하나의 철사를 엮어 하나의 바탕을 만들어내려했던 존 배의 마음이 어쩌면 일맥상통했던 건지도 모르는 일이다.
존 배는 지금도 예술의 여정을 멈추지 않고 있다. 이번에 소개된 그의 최신작 <Heaven and Earth>(2024)를 보면 이전 작품과 조금 더 다른, 생동감이 보이는 존 배의 변신을 엿볼 수 있다. 그의 탐구가 계속 되는 한 작품은 계속 나올 것이며 그가 만든 작품은 계속해서 '연결'의 의미를 전할 것이다.
물론 보존을 잘 하고 있기는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 철은 결국 조금씩 녹이 슬게 된다. 하지만 그의 작품이 녹이 슨다고 해도 흠을 잡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어쩌면 녹이 슬면서 새로운 색깔, 새로운 풍경이 전해질 수 있고 그 순간 녹은 흠이 아닌 '세월의 훈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전시는 10월 20일까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