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그림으로 쓴 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예술가의 행위'

김기린 개인전 '무언의 영역'

2024-06-13     임동현 기자
김기린

(내외방송=임동현 기자) '그림으로 시를 쓰다'. 단색화의 선구자로 알려진 김기린(1936~2021)의 작품 세계를 한 줄로 압축한 말이다. 2018년 김기린은 이렇게 말한다. "나의 최종 목적은 언제나 시였다. 나는 계속해서 시 작업을 했으나, 글이 아닌 그림을 통해서였다. 시인은 가장 정확한 단어들만을 사용해 본질을 구현해야한다는 의식을 그림의 매체에서도 동일하게 적용해오고 있다".

지난 5일부터 갤러리현대에서 열리고 있는 김기린의 개인전 <무언의 영역>을 보려면 김기린이 '그림으로 시를 쓴' 작가라는 것을 알고 보는 것이 좋다. 갤러리현대가 개최하는 그의 세 번째 개인전이자 작고 이후 첫 개인전인 이 전시는 김기린의 회화를 '화면 위에 그려진 시'라는 시각으로 접근하며 그의 독창성을 부각하고 있다.

(사진=임동현

김기린은 1961년 최초로 프랑스로 건너가는데 이는 생텍쥐페리를 연구하기 위한 것이었고 프랑스에서 20대를 보낼 당시에는 랭보, 말라르메의 시를 읽으며 시 작업에 몰두했다고 한다. 하지만 30대 초반 미술사를 공부하면서 그의 창작 활동은 미술로 옮겨지는데 이는 미술이 언어의 차이와 상관없이 인간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고 보는 사람 역시 언어의 차이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한 것이다. 나라를 떠나, 민족을 떠나 '마음의 대화'를 하고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이다.

그는 캔버스나 종이 표면을 양쪽 대칭의 사각형 구역으로 나누고 그 구역에 물감칠을 한다. 단색화라고 하면 흔히 붓에 물감을 묻혀 점처럼 찍는 작업을 연상하게 되는데 김기린은 점을 찍기 전 세밀하게 구역을 만들고 그 구역에 맞춰 점을 찍는다. 무질서에서 질서를 찾는 작업이 아니라 질서를 갖추기 위해 틀부터 짠 작업을 한 것인데 그 세밀함을 보면 결코 한 작품 한 작품을 긴 시간을 공들여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기린이 표현한 '그림의 시'다. 

김기린은

김기린은 그렇게 공들인 작업으로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하는 것일까? 이 의문을 풀어낸다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림을 자세히보면 그림 나름대로의 질서를 발견할 수 있게 되지만 그 질서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는 건 정말 어렵다. 이 전시의 제목처럼 김기린의 작품은 '무언의 영역'으로 판단해야할 것 같다.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자연의 질서,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의 풍랑, 언어로 표현하면 거짓으로 몰릴 수 있는 진실, 바로 그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보면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 더 나아가 예술을 한다는 행위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를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고 상상해 표현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겠고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진실을 표현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전시를 보게 되는 김기린의 작품들은 그 행위의 결과물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는 과정들을 엮은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사진=임동현

반복되는 듯한., 같은 작품을 연속으로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 수 있지만 점을 찍는, 질서를 잡아가는 과정이 서로 다르기에 이들을 각각의 존재로 여길 수 있을 것이다. 닮은 듯 다른,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단색화와 비슷하면서도 또 다른, 김기린의 색다른 작품 세계를 엿볼 수 있는 특별한 전시가 <무언의 영역>이다. 단색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이라도 '새로운 질서를 찾는 모습, 새로운 진실을 찾는 모습'으로 작품들을 이해한다면 색다른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본다.

전시는 7월 14일까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