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산책] 1999년 거제의 소녀들, 2024년 미래의 관객들을 응원하다
박범수 감독 '빅토리'
(내외방송=임동현 기자) 1999년, 세기말의 기운이 감도는 대한민국 거제. 이 곳에는 전설의 댄스 콤비 필선(이혜리 분)과 미나(박세완 분)가 있다. 공부보다는 백댄서가 되고픈 꿈을 꾸고 있던 그들에게 어느날 서울에서 전학온 세현(조아람 분)이 등장한다. 만년 꼴찌에 머물고 있는 거제상고에 서울에서 온 축구선수 동현(이찬형 분), 그리고 그의 여동생이자 치어리딩을 했던 세현이 온 것이다.
필선과 미나는 세현을 앞세워 치어리딩 동아리를 만들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9명의 멤버들을 모으게 된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밀레니엄 걸즈'는 과감하게 축구대회에서 학교를 응원하기 위해 나선다.
박범수 감독의 <빅토리>는 얼핏 보면 굉장히 뻔한 이야기로 여길 수 있다. 여고생들이 응원단을 만들어 온갖 우여곡절 끝에 멋진 무대를 선보이는 이야기. 익숙한 소재에 익숙한 미장센, 여기에 주인공 이혜리가 연기한 필선은 같은 연기자가 연기한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덕선'을 연상시키니 영화를 보기 전에는 충분히 선입견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막상 영화를 본 순간 이 '뻔한 이야기'가 굉장한 힘을 전한다. '1999년 거제의 소녀들이 2024년 미래의 관객들을 응원하는 영화'. <빅토리>는 이 한 마디로 정의가 가능할 것이다.
영화는 필선과 미나가 90년대 말 유행한 '펌프'를 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의 '하여가'가 나온다. 영화는 이처럼 첫 장면부터 영화가 갖고 있는 무기를 선보인다. 춤과 치어리딩, 그리고 90년대 음악으로 승부를 걸겠다는 뜻이다.
사실 이들에게 거제는 '빠져나가고픈 공간'이기도 하다. 필선은 아버지(현봉식 분)의 반대에도 '떡잎부터 남다른 내게 거제는 너무 작다'며 서울에 가고 싶어하고 미나는 '미나반점'을 맡으면서 어린 동생들의 저녁을 챙겨야하는 신세다. 학교 선생님들은 이들을 '사고뭉치, 비행 청소년'으로 여기고 이로 인해 댄스 동아리실도 사라진 상황이다. 이들이 처음 세현의 '치어리딩'을 비웃다가 치어리딩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동아리실을 다시 만들고 싶은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먼저 빠져든 것은 적재적소에 쓰인 90년대 음악이다. 첫 장면에서 나온 '하여가'를 비롯해 필선과 미나가 응원단원을 모집하기 위해 각 교실을 돌아다니면서 춤을 추는 장면에서 나온 듀스의 '나를 돌아봐'를 비롯해 '왜 불러'(디바), '할 수 있어'(NRG), '트위스트 킹'(터보), '뭐야 이건'(지니) 등 90년대 감성을 자극하는 노래들이 총출동하는데 노래와 장면이 어우러지면서 저절로 박수를 치고 발을 까딱거리게 만든다.
특히 김원준의 '쇼'는 사실상 이 영화의 주제곡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세현이 응원 음악을 고르면서 "김원준의 '쇼'가 있느냐'라고 할 때 필선과 미나는 "김원준 오빠의 '쇼'로 춤이 되겠냐"라고 비웃지만 이후 이들은 이 곡을 배경으로 멋진 치어리딩을 선보인다. '세상이라는 무대 위에 주인공인거야'라고 외치는 노래의 가사와 치어리딩이 어우러지면서 '밀레니엄 걸즈'의 존재감이 부각된다.
이 영화의 또 하나의 장점은 절묘한 캐스팅이다. 주인공은 물론이고 밀레니엄 걸즈 단원들 각각의 성격들을 살린 배우들의 연기는 그야말로 '연기'라기보다는 그 시대를 살았던, 그리고 견뎌야했던 소녀들의 모습을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그렇기에 어느 순간 관객들은 이들과 함께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되고 그로 인해 이들과 함께 웃고 울고 즐길 수 있다. '뻔한 이야기'에 굉장한 힘을 안긴 최고의 한 수는 바로 캐스팅이었다. (이런 점에서 개인적으로 '밀레니엄 걸즈'와 인터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모두 모아서!!)
무엇보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응원'의 의미를 관객들에게 제대로 전했다는 것이다. 첫 무대에서 망신을 당했던 밀레니엄 걸즈는 '실전 경험을 해야한다'는 생각으로 시장, 요양병원, 동네 잔치 등을 돌며 치어리딩을 한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의 아버지들이 일하는 조선소로 간다. 잦은 휴일 근무 등 열악한 노동환경 등으로 시위를 하던 노동자들은 밀레니엄 걸즈가 윤수일의 '황홀한 고백'과 함께 전한 응원에 힘을 얻는다.
영화는 필선, 그리고 멤버들의 아버지가 일하는 조선소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파업에 참여한 동료들에게 '배신자'로 몰리고 나이 어린 사장에게 욕을 먹어도 버텨야하는 필선 아버지의 에피소드를 통해 '가진 자'들의 폭압 밑에서 참고 버텨야하는, 그리고 싸워야하는 노동자의 모습도 보여준다. 그리고 그 관계가 자녀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이로 인해 여러 위기가 발생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행히도 아이들은 꿋꿋이 버티고 다시 뭉친다. 그리고 그들의 버팀은 결국 필선 아버지가 현실의 벽을 깨고 머리띠를 묶고 파업에 동참하게 만든다.
이들은 결코 '나쁜 어른들'에게 희생되지 않는다. 그리고 말한다. "응원한다. 내를". 그렇게 영화는 뒤로 가면 갈수록 점점 우리를 응원하는 메시지로 다가간다. 그들의 용기가 2024년 영화를 보는 우리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빅토리>는 '공감의 힘'을 다시 느끼게 만든다.
혹자는 일본 청춘 영화의 영향을 이야기할 수도 있고, 군더더기가 많다는 비판을 할 수 있다. 하지만 감히 말하자면 <빅토리>는 지금, 엄청난 무더위 속에서도 힘겹게 몸과 마음의 상처를 견디며 일하는 이들에게 충분히 응원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영화라고 보고 있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영화는 어줍잖은 블록버스터보다, 근본없는 SF보다, '자뻑'과 나르시즘에 함몰된 '작가 영화'보다는 잠시나마 공감과 응원을 얻을 수 있는, 그래서 한 번이라도 웃을 수 있는 영화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 예시를 <빅토리>가 보여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