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옻칠'로 표현된 수십년의 수행 "자연이 그렸다"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 '성파 선예禪藝 특별전 COSMOS'
(내외방송=임동현 기자) '작가인 적도 아닌 적도 없는' 예술가가 있다. "예술의 목적은 없다. 예술이라고 하면 따라가야지. 하다 보면 얻어걸릴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얻어걸렸다'라고 표현하기엔 한 예술가의 정성이 작품 곳곳에 오롯이 보인다. 조계종 종정 성파 스님의 이야기다.
지난달 28일부터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는 성파 스님의 오랜 수행과 예술을 아우른 작품세계를 총망라한 <성파 선예禪藝 특별전 COSMOS>가 열리고 있다. 여기서 '선예'는 불교에서 선(禪) 수행의 일환으로 행해지는 모든 예술 활동을 일컫는 말이다. 대한민국 조계종의 큰 스님인 성파 스님은 통도사 주지를 역임했고 지난 2022년 제15대 조계종 종정으로 취임한 종교인이면서 불교미술, 서예, 한국화, 도자, 염색, 조각 등 다양한 장르의 작업을 한 예술인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은 '재료에 대한 연구'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특히 '옻'의 성질에 주목했다. 그동안 공예 작품의 일부로 쓰였던 옻에서 그는 내구성, 방수성 등 옻 특유의 성질을 주목했고 이를 통해 옻을 주재료로 전통 재료와 결합해 자신만의 '옻 장르'를 만들어냈다. 옻과 더불어 칠안료, 닥나무, 조개껍데기, 계란껍질, 밀가루풀 등 자연에서 얻은 재료들이 그의 작품들의 주요소다. 직접 닥나무를 재배해 한지를 제작하고, 고려시대 감지 재현을 위해 직접 쪽을 키우는 등 작품을 만들어내기까지의 과정도 상당히 독특하다.
성파 스님은 자신의 작품에 대해 "자연이 그리고, 바람이 그리고, 물이 그렸다"라고 표현한다. 한마디로 자신의 능력으로 만들어진 작품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연이 허락하지 않으면, 바람이 허락하지 않으면 그의 작품은 나올 수 없다. 말 그대로 '물아일체(物我一體)'.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되어야 작업이 가능하고 작품의 완성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내 기술을 자랑하며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성질에 따르면서, 자연에 내가 순응하고 동화될 때 하나의 작품이 완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한지에 옻칠을 해서 선보인 작품들을 보면 '자연에 순응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옻과 물이 서로 맞지 않다는 것에 착안한 그는 그 속에서 물과 옻의 움직임을 간파하고 그 움직임을 그대로 표현한다. 여기에는 인간의 기술이나 속임수는 도리어 독이 된다. 이들이 어우러지면 어우러지는대로, 안 어우러지면 안 어우러지는대로 그렇게 움직임을 그대로 보여줄 때 비로소 작품의 에너지가 표출된다. 이것은 하나의 '깨달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옻으로 만든 검은 기둥 '태초'로 시작하는 전시는 '색(色)'과 '공(空)'을 옻으로 표현한 작품들과 초월적인 정신세계를 표현한 한국화, 옻과 도예가 만나 이루어진 '칠예도자', 물 위에 떠 있는 작품들 등을 보여주며 옻이 성파의 인성(人性)을 만나면서 하나의 조형 언어로, 그리고 한국을 대표하는 예술 작품으로, 한국의 아름다움을 후세 사람들에게 전하는 새로운 텍스트로 재탄생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칠하고 깎아내는 것을 수도 없이 반복해야 완성된다는 옻칠. 옻칠을 하면서 그는 채우고 비워내며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철학을 표현하고 자연과 어우러지며 물아일체, 무아지경의 세계로 나아간다. 그런 면에서 이 전시는 성파 스님의 결과물을 보여준다기 보다는 그가 수십년간 해왔던 '수행'의 과정을 보여주는 전시라고 할 수 있다. 흔히 인생을 '고행(苦行)'에 비유하기도 하지만 고행 속에서도 마음을 다스리며 스님들은 각자 자신만의 수행을 해왔다. 성파 스님의 작품은 작품이기보다는 수행의 흔적이며 고행을 다스리려는 한 인간의 모습과 그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돌 하나, 나무 하나, 안료 하나하나에도 쏟았던 인간의 정성이 지금 이 혼탁한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 정성을 실천할 때 세상은 조금씩이나마 낙원의 모습으로 바뀔 지도 모른다. '작가인 적도 아닌 적도 없었던' 그의 작품이 오늘날 예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바로 이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이를 누구보다 더 이해하고 더 노력해야하는 이들이 바로 작가, 예술인들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본다.
전시는 11월 17일까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