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죄를 찾아내는 것은 식은 죽 먹기" 그들은 왜 '모의재판'을 하는가?

서울시극단 '트랩'

2024-10-09     임동현 기자
연극

(내외방송=임동현 기자) 출장길에 조용한 시골마을에서 갑작스럽게 자동차 사고를 당한 주인공. 그는 마을의 한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된다. 그 집에는 집주인인 퇴직 판사와 과거 검사, 변호사, 사형집행관이 모여 있고 저녁과 와인을 함께 하던 이들은 주인공에게 '재판놀이'를 제안한다.

주인공은 피고가 되어 이 놀이에 참여하게 되고 재판처럼 검사는 주인공의 죄를 입증하려하고, 변호사는 주인공을 지키려한다. 그런데 처음엔 그냥 '노인들의 소일거리'라고 생각했던 이 놀이가 어느 순간 진짜 재판처럼 변해가고 주인공은 자신도 몰랐던, 혹은 숨기려했던 자기의 죄를 스스로 털어놓기 시작한다. 

서울시극단이 하반기 첫 작품으로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 무대에 선보인 연극 <트랩>은 특유의 기괴하고 과장된 전개로 부조리한 현실을 부각시키는 프리드리히 뒤렌마트(1921~1990)의 단편소설 <사고>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뒤렌마트는 스스로 이 작품을 자신의 가장 잘 된 작품으로 평가하고 있으며 소설과 방송극, 그리고 희곡으로 출간한 뒤 1979년 초연됐다.

갖은 고생 끝에 섬유회사 판매 총책임자 자리까지 오른 주인공 트랍스(김명기 분)가 자동차 사고로 시골의 퇴직 판사(남명렬 분)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고 저녁 식사 자리에서 판사와 검사 '초른'(강신구 분), 변호사 '쿰머'(김신기 분), 사형집행관 필렛(손성호 분)과 모의재판을 하게 된다. 재판 중간중간 가사도우미 시모네(이승우 분)는 비싼 와인들을 하나하나 전달하고 직접 피아노 연주를 하기도 한다.  

여기서 초른과 쿰머의 이름을 강조한 이유가 있다. 초른(zorn)은 독일어로 '분노'라는 뜻이며 쿰머(kummer)는 독일어로 '걱정'이라는 뜻이다. 또 독일어 'Gericht'는 '향연'이라는 뜻과 함께 '재판, 법정'을 의미하기도 한다. 검사는 트랍스의 숨겨진 죄를 찾으며 분노하고 쿰머는 트랍스가 행여나 죄를 실토할까봐 걱정한다. 그렇게 향연과 재판이 동시에 진행되고 분노와 걱정이 넘실대고 그렇게 점점 '트랩(함정)이 만들어진다. "죄를 찾아내는 것은 식은 죽 먹기지". 재판을 시작하면서 초른이 한 말이다.

연극은 배우들이 음식과 와인을 먹고 마시면서 진행이 되고 추궁과 대답이 지속되며 관객들을 긴장감 속으로 몰아넣는다. 양옆으로 관객석을 설치한 무대는 마치 관객을 이 재판의 배심원으로 초대한 느낌을 갖게 한다. 그리고 재판을 통해 트랍스의 '미필적 고의'가 하나둘씩 드러나자 트랍스는 스스로 자신의 죄를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책임자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저질렀던 각종 비행들을 말이다. 그리고 실제 재판처럼 최종변론과 판사의 판결이 나오게 된다.

모의재판은 사실 시골에 사는 전직 법조인들이 자신들의 활력을 찾기 위해 한 것이었다. 판사는 노환을 앓았고 검사는 위암 초기 진단을 받았으며 변호사는 고혈압으로 시달렸다. 늙고 병들었던 이들은 모의재판을 하면서 젊음과 활력을 찾았고 저녁을 먹으면서 자기들끼리 문제를 정하고 재판을 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사형집행관은 여전히 우울하다. 20년 전에는 굉장히 유명했지만 지금은 사형이 선고되어도 집행되지 않기에 존재감을 상실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트랍스는 밑바닥부터 시작해 고급 차를 몰 정도의 자리를 차지한 입지전적인 인물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부정을 저지르고 그로 인해 윗사람을 쓰러뜨린 인물이기도 하다. 사실 아무도 그의 죄를 알 수가 없고 어떻게 보면 죄라고 단정하기도 어려워보이기도 하다. '살다보면 팬티에 똥도 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치부해도 될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는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기 시작하고 스스로에게 형벌을 내릴 것을 판사에게 요구하기도 한다. 재판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트랍스는 심한 감정의 변화를 겪게 된다.

그렇다면 이 연극에 던지고픈 질문이 있다. 왜 그들은 모의재판을 할까? 연극의 결말을 보면 이 질문을 다시 던질 수밖에 없다. 그들은 나름대로의 활력을 찾고 젊은 시절을 떠올리는 행위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고통의 시간이 될 수 있는 행위이기도 하다.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양심에 솔직한 이가 오히려 비극을 맞고 양심을 숨기는 이가 더 잘나가는 현실을 인정해야하느냐라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죄를 찾아내겠다는 검사, 꽃을 뿌리며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사형집행관, 그리고 마지막 판단을 내리는 판사 모두 이런 결말을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혹은 재판놀이를 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값비싼 와인을 차례차례 마시는 행위 그 자체를 즐기기에 결말에 큰 신경을 쓰지 않을 가능성도 분명 있다. 병에서 벗어나기 위해, 살아가야하기에 말이다.

제목처럼 연극은 관객을 배심원으로 초대하면서 동시에 관객을 '함정'으로 몰고가기도 한다. 이들이 나누는 숨막히는 대화의 재미를 느껴보는 것이 이 공연의 백미다. 남명렬, 김명기, 강신구, 김신기 등 노련한 배우들의 열연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 연극은 충분한 가치가 있다. 공연은 20일까지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