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박물관이다] 행궁은 사라졌지만 정조의 마음은 남아...
서울 동작구 본동 '용양봉저정'
(내외방송=임동현 기자) 서기 1795년, 조선왕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이 있는 화성으로 행차를 하게 된다. 정조는 재위 24년(1776~1800)간 총 66회의 행차를 했는데 그 중 13회가 사도세자의 묘인 현릉원 참배 행차였으며 가장 대규모로 진행된 행차가 바로 1795년의 '을묘능행'이었다.
왕의 일행이 화성으로 가려면 가장 큰 문제가 한강을 건너야하는 것이었다. 이에 정조는 노량진에 '배다리'를 설치하게 하고 그 다리를 통해 한강을 건넜다. 한강을 건넌 일행은 노량행궁에서 잠시 행차를 멈추고 왕은 이 곳에서 점심을 들었다. 행차의 마지막, 한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정조는 이 곳에서 역시 점심을 들었다. 이 노량행궁의 중심이 된 건물인 '용양봉저정'은 지금도 서울 동작구 본동에 남아있다.
<홍제전서> 14권 '용양봉저정기'의 기록에 의하면 이곳은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양원이 소유한 '망해정(望海亭)'이라는 정자였는데 1789년(정조 13년) 정조가 이 곳을 구입했다고 한다. 그리고 4년 뒤인 1793년, 정조는 '용양봉저정'이라는 이름을 새로 지어준다. "북쪽의 우뚝한 산과 흘러드는 한강의 모습이 마치 용이 꿈틀대고 봉황이 나는 것 같아 억만년 가는 국가의 기반을 의미하는 듯하다". 정조의 표현이다.
을묘능행을 담은 <정조능행도> 8폭 병풍 중 '노량주교도섭도'를 보면 당시 노량행궁이 꽤 규모가 있는 행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버들이 늘어선 노량진의 전경과 정조의 행차를 구경하기 위해 강변에 모은 수많은 백성들의 모습이 그날의 화려함을 알려주는 듯하다.
정조는 배다리를 통해 한강을 건너 노량행궁에서 점심을 든 후 장승배기를 거쳐 시흥 행궁에서 하룻밤을 묵고 지금의 시흥대로를 거쳐 화성에 도착했다. 그는 화성에서 문과와 무과 별시를 시행하고 사도세자 묘역을 참배했으며 혜경궁 홍씨의 환갑연을 성대하게 치렀다.
그리고 어려움을 겪는 주민에게 쌀과 소금을 나누어주고 따뜻한 죽을 주는 시혜를 베풀기도 했다. 낙남헌에서 열린 경로 잔치에서 정조가 384명의 노인을 접대하고 비단과 지팡이를 하사하자 노인들은 춤을 추며 천세를 외쳤다고 한다. 을묘능행은 재위 20년을 맞이한 정조가 자신에 대한 충성을 집결시키고 정치개혁의 박차를 가하겠다는 의도를 담은 행사였던 것이다.
이후에도 많은 왕들이 이 곳을 휴식처로 이용했지만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이 이 곳을 유락시설로 이용하면서 노량행궁은 완전히 훼손되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은 용양봉저정만이 그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이 곳을 보면 댓돌에 몇 개의 슬리퍼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즉 신을 벗고 슬리퍼를 신고 내부를 구경해도 된다는 것이다. 안으로 들어가면 앞에서 이야기한 '노량주교도섭도'를 비롯해 행차를 담아낸 그림들, 그리고 행차 기간 동안에 있었던 일을 담은 기록들을 볼 수 있다.
마루에 앉으니 맞은편에 한강이 보인다. 문득 정조가 이 곳에서 한강을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지가 궁금해졌다. 그가 꿈꾸었던 조선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리고 백성들에게 어떤 임금의 모습으로 다가가려했을까? '실패한 개혁군주'로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는 정조의 마음이 한강의 풍경 속에 전해지는 듯하다.
비록 일제에 의해 행궁이 훼손되고 그 뜻이 사라졌다고 하지만 정조의 숨결이 남아있는 용양봉저정은 지금 이 순간에도 정조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 '억만년 가는 국가의 기반을 의미하는 듯'하다는 용양봉저정. 이 모습 그대로 오래오래 지켜져야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