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향나무스럽지 않음의 미학, 천년향
(내외방송=전기복 기자) 천년 세월을 압축적으로 시각화하면 향나무 형태일까. 노거수인 향나무를 볼 때면 그런 생각이 든다. 그만큼 더디 자라는 성질이기도 하지만 뒤틀려 응축된 줄기며 뻗고 굽은 가지는 멈춤인지 성장인지 역사가 예측불허이듯 그런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감흥을 준다. 향나무라고 다 그럴까? 서초대로와 반포대로가 교차하는 서초사거리 도로 중앙 녹지대에 있는 나무 ‘천년향’은 그런 의미에서 반전의, 향나무스럽지 않은 향나무라하겠다.
‘서초동 향나무’가 ‘천년향’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2009년 시민 공모를 통해서다. 서울특별시 내 생존하는 향나무 중 최고령인 886년을 산 훈장같은 의미겠다. 그러나 훤칠하게 위로 쭉 뻗은 외관에서 향나무라는 수종명이 더 고풍스럽게 다가올 뿐 그 이름 천년향은 귓전에 닿고 입술에 감기는 어감이 낯설다.
이는 어쩌면 향나무에 대한 선입견인지도 모르겠다. 왕명이라도 받드는 양 한없이 넙죽 엎드린 창덕궁 향나무며, 기도발이 하늘에 닿을 듯 소용돌이치듯 감아올린 두 줄기의 송광사 향나무나 나지막이 뒤틀린 줄기 위에서 사방으로 빼곡히 뻗어 나간 가지의 기세는 우물과 한 쌍을 이뤄 장관인 안동시 서후면 대두서리 향나무, 큰 키에 넓은 품의 웅장함이 일품인 울진군 죽변면 화성리 향나무의 영향일까.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전문 원예서인 ‘양화소록’에서 향나무를 표현한 한 구절을 인용해 보면, 기호는 개인 취향이겠으나 듣고 읽는 앎의 영향도 배제하지 못하겠다.
“층층의 가지에 푸른 잎이 실타래처럼 늘어지고, 줄기는 붉은 뱀이 수풀에서 뛰어오르듯 뒤틀리고 굽어 있으면서, 맑고 강한 향기를 지닌 것이 좋은 품종이다”
이쯤에서 천년향을 자세히 보자. 지하철 2호선 서초역에서 내려 6번 출구나 7번 출구로 나가면 도로 중앙 녹지대에 있는 향나무를 각 각 오른편과 왼편으로 볼 수 있다. 물론 도로 사이에는 건널목이 있어 길을 건너면서도 향나무를 관찰할 수 있다. 천년향은 사거리 건널목에서 법원행정처 정문 못 미쳐까지 좁다랗게 형성된 도로 중앙 녹지대에 자리하는데 마치 아스팔트와 도로라는 용기에 담긴 분재처럼 놓였다.
애써 몽득 선생의 누실명(陋室銘)을 떠올리며 ‘비록 누추한 도로 중앙 녹지대이나 오직 천년향이 있어 서초가 향기롭구나’며 안타까운 마음을 다스려볼 뿐이다.
가슴팍 높이에서 두 줄기로 갈라져 한줄기는 주 줄기를 이루며 비스듬히 서너 층의 가지를 옆으로 뻗으며 하늘을 향해 미끈하게 자랐다. 그 옆 줄기는 가늘게 자랐고 줄기 끝부분에서 가는 비늘처럼 생긴 잎을 둥근 공처럼 달았다. 유일하게 손을 위로 올린 높이쯤에서 굵은 가지를 하나 형성했으나 고사하고 잘린 모습이다.
가는 줄기는 그럴 것이 지면에서부터 대부분의 부위가 수술의 흔적이라 성장에 한계가 있었을뿐더러 보강재로 속을 입혀 예전의 온전한 형태를 짐작하기는 어렵다. 한마디로 세 손가락을 편 모양새다.
짧은 엄지는 고사했고 집게손가락은 가는 줄기로 끝부분만 잎을 달아 살아있음을 알리는 듯하고 중지는 수령에 걸맞지 않은 날씬함이나 제법 굵고 잔가지도 형성하며 가장 높게 자랐다. 보는 각도에 따라서는 반쪽짜리 나무 형태를 하고 섰다.
원래 향나무는 어린 가지엔 뾰쪽한 가시 같은 잎이 돋는다. 어린 향나무를 보면 이런 가시를 단 어린 가지를 사방으로 하고 원뿔형으로 자란다. 더디게 자라는 약점을 이겨내기 위해 진화를 그렇게 한 결과란다. 그러나 수령이 쌓이면 잎은 부드럽고 가는 비늘형으로, 줄기며 가지는 자유분방하게 자라고 가지 사이의 틈을 더 넓게 하여 햇살을 속 깊은 곳까지 닿게 하면서도 균형을 잃지 않게 자란다.
그런데 천년향은 왜 뒤틀림 없는 훤칠한 키에 반쪽짜리 수형을 하고 섰을까? 어릴 적 시골 마을 같은 또래도 여유가 있는 집안의 아이는 혈색도 좋고 성장이 빨랐다. 나무라고 다를까.
향나무가 선 자리는 불과 40, 50년 전만 해도 어느 시골 풍경과 다르지 않았다. 서초구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서초리는 조선말까지 경기도 과천군 동면 서초리였다. 상서로운 풀, 서리풀에서 난 쌀이 임금에게 진상될 만큼 서리풀이 빼곡한 데서 그 이름이 유래된 것에서도 알 수 있겠다. 한마디로 도성 밖 강 건너 한적한 말 그대로 땅 좋은 곳에서 자란 덕이 훤칠한 키에 향나무스럽지 않게 자란 배경이랄까.
그러나 1960〜1970년대 강남개발 열풍을 거치면서 서초동 법조 단지 도로변으로 나앉게 되고 크고 작은 역사의 굴곡을 거치면서 받은 충격에 반쪽짜리 외형만 부지할 수 있었던 건 아닐까. 그 옛날 서초리에 빽빽했던 서리풀이 벼듯이, 현대사회의 모든 영역과 밀접하게 연결된 것이 법이라면 법이 곧 생활이요 밥이 된 현실에서 잊고 살거나 잃어버린 정리(情理)가 곧 나머지 반쪽 사회를 표상하는 것은 아닐까. 곧 법조 단지 향나무가 우리네 모습으로 다가왔다.
뒤틀리고 굽고 뻗는 인상적인 향나무는 아닐지라도 서초동 향나무의 진정한 가치는 통념의 미적 기준이 아니라 선조들의 특별한 경험이나 우리가 그를 대하는 태도로 결정될 게다. 그래서 우러러봐야 할 대상을 수년간 그냥 지나친 무지, 결례에 대한 무거운 마음에, 이후 서초사거리를 지날 때면 하마비라도 있는 것처럼 차에서 내려 걷지는 못하지만 ‘좌로 봐’를 하며 예를 갖추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