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추상으로 기록한 '1959~1975', 현실의 새로운 표현을 보다
아트선재센터 '하종현 5975'
(내외방송=임동현 기자) 하종현(1935~ ). 재료와 물질성에 대한 실험을 꾸준히 이어가며 독창적인 화풍을 구축하고 있는 작가다. 특히 그는 캔버스 뒷면에서 물감을 두껍게 밀어 넣는 기법과 그 위를 쓸어내고, 긁어내면서 흔적을 남기고 있다. 그리고 그의 화법은 지금도 '한국적 추상'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그 추상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전시, 현재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하종현 5975>다.
<하종현 5975>는 하종현이 대학을 졸업한 1959년부터 그의 대표작인 <접합> 연작을 시작한 1975년까지의 작품들을 선보인다. 즉 하종현이 구사한 '한국적 추상'의 태동을 살펴볼 수 있다는 의미다. 이 시기는 공교롭게도 한국 현대사에서 도시화와 혁명, 쿠데타, 억압으로 이어진 시기이기도 하다. 그 시가와 맞물린 작품의 변화가 이 전시의 가장 큰 볼거리다.
그의 작품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가 작품 활동을 하면서 받아들인 '엥포르멜'를 이해해야한다. 엥포르멜은 정해진 형상을 부정하고, 일그러진 형상과 질감을 살리는 회화인데 이는 한국전쟁 이후 혼란과 상처, 시대적인 불안을 표현하는 데 가장 적합한 표현이었다고 작가는 생각한 것이다. 두꺼운 물감, 불에 그을린 표면, 어두운 색조는 전쟁과 사회의 혼란에 대한 기억을 시각적으로 형성하고 이는 곧 '물질'에 대한 작가의 실험으로 이어지게 된다.
60년대 박정희 정부가 들어서고 경제 성장과 도시화가 화두가 된 상황에서 하종현은 박정희 정부의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인한 급격한 산업화와 근대화 과정을 구조적인 형태로 추상화한 <도시계획백서> 연작과 단청 문양, 돗자리 직조 기법 등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면서 전통과 현대의 융합을 꾀한 <탄생> 연작을 만들어낸다. 근대화, 도시화는 새로운 발전의 모델이 되기도 했지만 전통의 소멸이라는 그림자도 존재하는데 하종현은 이를 추상회화를 통해 살려내고 공존을 실험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아방가르드'의 세계가 펼쳐진다. 하종현은 1969년 12명의 작가와 이론가로 구성된 한국아방가르드협회를 결성해 협회지 발간, 전시 등 다양한 활동을 한다. 스프링, 신문, 휴지, 시멘트 가루, 철망 등 일상적인 물건은 하종현의 손을 통해 유신 시대의 억압과 경직, 검열 등의 상징이 된다. 언론 검열로 인해 밖으로 나오지 못한 신문들이 쌓이고 스프링은 탄력을 잃고 꼬여버린다. 특히 도면으로만 남아있던 거울 설치 작업 <작품>(1970)이 이번 전시를 통해 재현된다는 점을 알려줘야겠다.
마지막은 1974년에 나온 <접합> 연작이다. 이 작품은 '입체 실험에서 얻은 효과를 평면에 옮길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한 것으로 그의 독창적인 제작 기법인 '배압법'을 볼 수 있는 그의 대표작이다. 올이 성긴 마대자루를 캔버스로 활용해 캔버스 뒷면에 물감을 듬뿍 바른 후 커다란 나무 주걱으로 밀어내는 기법이 배압법인데 이는 뒷면에서 시작된 작업의 결과물이 앞면으로 드러난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하종현 5975>는 하종현의 실험을 따라다니며 한국 아방가르드와 추상의 역사를 살펴보는 기회를 제공함과 동시에 덧붙여 예술인이 자신의 시대를 어떻게 '자신만의 기법'으로 표현할 수 있는 지를 살펴볼 수 있는 전시이기도 하다.
그가 표현한 추상의 세계를 바로 이해하기는 어려운 점이 있을 수 있겠지만 추상이 '시대를 기록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느껴진다면 추상에 대한 막연한 어려움을 떨쳐낼 수 있을 것이다. 추상은 '비현실'이 아니라 '현실의 다른 표현'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전시는 4월 20일까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