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비일상적인 삶이 준 비극, 선의로 만들어 낸 자유"
영화 '파란' 강동인 감독
(내외방송=임동현 기자) 폐섬유증으로 목숨이 위태로운 국가대표 클레어 사격 선수 태화(이수혁 분). 아버지의 폐를 이식받고 살아나지만 그 아버지는 병원으로 가던 중 뺑소니 사고를 내고 시신을 유기한 '살인자'였다. 살인자의 폐를 이식받았다는 죄책감에 고통스런 삶을 살던 그는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피해자의 딸 미지(하윤경 분)를 찾아나서고 그를 우연히 만나게 된다. 미지가 자신의 예물을 훔치는 것을 눈감아주며 속죄를 했다고 생각한 순간, 미지는 태화에게 그날의 진실을 밝히게 되고 자신의 엄마를 같이 찾으러 가자는 제안을 하게 된다.
지난 9일 개봉한 영화 <파란>은 자신들이 선택하지 않은 일로 인해 일상을 잃고 고통 속에 살아가야하는 두 남녀가 서로의 '어긋난 운명'을 극복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비일상적인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의 모습이 우리에게는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지만 죄책감과 배신으로 가득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분명 우리가 사는 곳에 존재하고 이들이 어떤 식으로 서로를 치유하고 있는지를 이 영화는 보여주고 있다. <파란>이 전해주는 메시지를 좀 더 알기 위해 영화 <파란>을 만든 강동인 감독을 개봉날인 9일, <파란>을 개봉한 서울의 한 영화관에서 만났다.
<파란>이 관객들에게 선을 보였다. 소감을 먼저 듣고 싶다
제작된 지 3년 정도의 시간이 지났고 극장 개봉까지 긴 시간이 걸렸는데 개봉을 하게 되니 떨리기도 하고 관객분들이 어떻게 봐주실지 궁금하기도 하다. 영화제 관객들과 일반 관객들의 차이도 있을 것이고 어떤 반응을 보이실 지 예상도 되지 않아서 긴장도 되지만 또 설레이기도 하다. 관객분들의 평가가 정말 궁금하다.
'살인자의 장기를 이식받는다'는 설정, 그리고 그로 인한 태화의 죄책감이 이야기의 중심이 됐는데 어떻게 이야기를 구성하게 되었는지?
단편 시나리오의 아이디어로 먼저 시작했다. 죄의식이라는 키워드에 호기심을 가진 시기에 '내가 저지르지 않은 죄를 책임져야하는 순간' 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 하다가 죄를 지은 사람의 장기를 받아 삶을 이어가는 사람이 그 사람의 죄를 책임져야하나라는 상상을 했다. 이 테마를 살리려다보니 클레이 사격이라는 소재가 들어왔고 아버지의 폐를 받았다는 것으로 한 세대의 유대도 표현하려 했다.
한국 영화 최초로 '클레이 사격'을 소재로 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우선은 제가 클레이 사격을 한 경험이 있었다. 클레이 사격은 움직이는 표적을 총으로 쏴서 맞추는 경기인데 다른 사격 경기와 달리 파편이 터지는 파괴적인 이미지가 있다. 공중에서 터지는 강렬한 이미지가 주워담을 수 없을 정도로 부서진 사람들의 이야기와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또 하나는 두 개의 다른 물체가 공중에서 만나 터질 확률이 희박한다 그것이 태화와 미지의 거대한 운명과 맞닿아있다고 봤다. 파괴적인 이미지를 깔고 싶었다.
두 인물이 등장하는 장면이 굉장히 강렬하면서도 불안하다. 태화의 첫 등장은 흔들리는 화면과 함께 쓰러지는 장면이고 미지의 첫 등장은 면도칼로 자신의 허벅지를 살짝살짝 누르는 모습이다
영화가 비극으로 시작해서 완전한 해소는 아니더라도 한 줄기 희망으로 귀결되는 구성이기에 인물이 가지고 있는 가장 부정적인 특징들이 두드러지는 장면들로 인물을 먼저 소개하고 싶었다. 관객들이 두 인물을 보면서 '왜 저런 행동을 할까'라는 궁금증을 갖게 하고 싶었고 그 행동들을 이해시킬 수 있도록 표현하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하다가 가장 비극적인 속성을 띠는 것을 비주얼로 표현했다.
미지가 면도칼로 자기 허벅지를 누르는 것은 엄마가 알려줬다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물려받은 것이라 보고 있다. '행복한 세포가 나온다'는 말을 듣고 그런 행동을 하는데 이는 거짓된 정보이고 어른의 잘못된 말이지만 엄마의 말이기에 피로 묶인 느낌이 들 것이고 또 믿을 수 밖에 없고 진실로 해석하고픈 느낌도 있었을 것이다. 정확하지 않은 정보도 어린아이처럼 믿을 수 밖에 없는 미지의 특징을 설명하고 싶었고 엄마의 세대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을 표현하려 했다.
태화와 미지가 만나는 장면들을 보면 '우연'이라고 느껴지는 부분들이 있다. '최대한 자연스러운 우연'을 추구했다고 하는데 어떤 의미인지?
초반에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태화가 미지의 존재를 찾아가는 서사가 중심인데 아무리 호의일지언정 성인 남성이 이제 막 성인이 된 여성을 추적하고 미행한다는 설정이 위험하다는 판단이 있었고 '그렇게까지 했어야할까'라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극중 태화의 성격상 죄책감을 해소하고픈 마음으로 미지를 찾아가는데 그 여정에 당위성을 부여하고 정교하게 다루는 것도 좋지만 그렇게 되면 인물의 행동에 대한 설득력이 없다고 봤기에 영화적인 우연을 과감히 사용해야겠다고 판단을 했다.
저는 <파란>을 하나의 우화로 느꼈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우리가 어릴 때 읽은 우화들은 결말의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해 극적인 상황과 장치들을 넣기도 하는데, 물론 현실을 무시하면 안되지만 우리와 다른 감정을 가진 이들이 있고 어떻게 치유가 되어가는지를 전하고 싶었다. 조명 등에서 비일상적인 톤을 많이 넣으려했고 주인공이 꿈과 현실을 왔다갔다하는 장치를 만든 것도 그 이유다.
어떻게 보면 <파란>은 '우연한 만남' 이후의 과정이 더 중요하고 봤기에 촘촘히 과정을 만들기보다는 우연을 선택했고 그렇게 만날 때 태화가 가지는 감정이 자연스럽게 나올 것 같았다. 둘의 만남을 '운명적'이라고 이해하면 좋을 것 같다.
태화의 별난 성격이 보이는 장면이 있다. 미지를 떼놓으려할 때 보통은 혼자 차를 타고 그냥 가버리는데 태화는 미지와 자신의 차를 길에 두고 택시를 타고 가버린다
시나리오 단계에서 내부적으로도 이견이 가장 많았던 신이다. '개연성이 떨어진다', '보편적이지 않다'는 의견이 많았는데 그럼에도 제가 이 장면을 고집한 이유는 태화의 '별난 성격'의 정수라고 봤기 때문이다. 장기를 이식한 이가 살인범이라는 생각과 그가 처한 환경 자체에서 이미 태화는 보편적인 인물이 아니었던 것이고 태화라면 일반인들이 해석하기 어려운 선택들을 할 수 있다고 봤다.
결정적으로 <파란>은 보편적인 인물의 일상을 따라가는 영화가 아니기에 돌발적인 지점이 있어야한다고 봤다. 태화와 미지 모두 본인이 선택하지 않은, 본인과 무관한 일로 극한으로 내몰리면서 일상과 다른, 비일상적인 삶을 살아가고 여기서 비극이 일어나고 있기에 생소하다고 할 수 있는 설정들을 의도적으로 영화에 넣으려했다.
'타인을 믿는다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에서 영화가 시작됐다고 들었다. 영화를 만들면서 혹시 답을 찾았는지
시나리오 쓸 당시에는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믿는다는 것은 결국,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자기를 속이는 일이라고까지 생각했다. 내가 이 사람을 믿으려면 결국 내가 이 사람을 받아들여야한다는 것인데 절대적인 진실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모든 진실은 각자의 관점에 따라, 그 순간순간의 판단에 따라 달라지기에 온전하게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파란>의 미지도 어머니, 친구 등 가까운 이들에게 계속 배신을 당하지만 오히려 '자신을 믿지 말라'고 말하는 태화에게 사건의 진실을 이야기하게 된다. 그 순간부터 미지는 태화를 믿을 수밖에 없게 된다. 이상한 호의를 베풀며 그녀를 맴돌던 이들과는 다르게 자기를 믿지 말라는 태화가 미지에게는 오히려 진실하게 느껴지면서 믿음이 생기지 않았을까 싶다. '이 사람도 잘못 알고 있는 정보 하나로 나에게 이렇게까지 했을까'라고 보고 자신이 진실을 알고 있기에 잘못된 생각으로 인한 태화의 죄책감을 갚고 싶어하고 결국 진실을 털어놓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직 그 고민의 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결국 믿음이 형성되는 것은 각자의 관점에 따라 흔들릴 수밖에 없다. 너무 비관적인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맹목적인 믿음은 아닌지 한 번은 의심할 필요도 있다고 본다.
태화에게 미지는, 미지에게 태화는 어떤 존재일까?
(잠시 생각 후) '업(業)'이라고 표현해도 될까? 두 사람은 서로 선의를 가지고 있다. 태화는 외면할 수 있는 문제를 어떻게든 바로잡고 싶어하고 미지는 묻어버릴 수도 있는 진실을 태화의 마음을 알게 되면서 밝히게 된다. 그 선의로 인해 오해가 풀리고 물론 이후에 어떤 삶을 살게 될 지는 모르지만 이전보다는 조금 더 자유로운 상태에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당장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 부정적인 효과를 가져오지만 결국 어떻게든 움직이면서 남은 인생을 만족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 본다.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이수혁 배우, 하윤경 배우의 호연이다. 감정을 표현하기 쉽지 않은 캐릭터를 잘 소화해냈는데 감독으로서 특별히 디렉션을 한 것이 있는지?
특별하게 뭔가를 하라고 하기 보다는 시나리오를 보면서 많은 이야기를 한 것 같다. 태화는 현실에 무심해 보이지만 내면의 고통으로 자신을 괴롭히는 것을 표현해야하기에 감정 과잉을 보이면 절대 안 될 것 같고 모호한 경계에서 사람들을 납득할 수 있는 확률이 높은 걸 찾았던 것 같다. 디렉션보다는 캐릭터 이야기를 많이 했다.
미지의 경우는 극중 나이는 만 19세인데 하윤경 배우가 미지보다 나이가 많기에 어떤 느낌을 줄 것인지를 이야기했다. 이제 갓 성인이 됐지만 마음은 아직 여리고, 겉으로는 가시가 돋아있는 느낌이 있기에 어른들의 거짓 속에서 살아가는 감정선과 상황에 대한 반응을 표현하려했다. 또 진실과 거짓을 이야기하려면 거리감이 중요하기에 그 부분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했다.
다른 독립영화들과 다르게 이동이 상당히 많아 장면도 뒤죽박죽으로 찍어야했고 여건상 찍어내기 바쁜 스케줄이었기 때문에 시나리오를 가지고 각자 이야기를 많이 했다. 쉽게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아니기에 배우들이 많이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는데(웃음) 잘 표현을 해주셨다.
<파란>을 보실 관객들에게 하고픈 말이 있다면?
너그럽게 봐주셨으면 좋겠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파란>은 보편적인 감정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고 싶지 않은 감정을 이야기하는 것이기에 '이런 생각을 하는 인물도 있다, 이런 일도 생길 수 있다'라고 생각하시면서 너그럽게, 그리고 재미있게 봐주셨으면 좋겠다.
극장 상황이 많이 좋지 않다고 하지만 독립영화가 상영이 된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다고 보고 엄청난 성과를 기대하기보다는 생명력을 계속 가지고 있었으면 좋겠다. 관객분들이 영화를 보고 영화가 주는 여운을 느끼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