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산책] '대중성과 실험성' 자기만의 길을 간 거장의 길을 따르며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 '배창호의 클로즈 업'
(내외방송=임동현 기자) 지난 4월 30일부터 5월 9일까지 열렸던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는 '가능한 영화를 향하여'를 통해 전 세계에서 독립적인 방식으로 영화를 만드는 창작자의 사례들을 소개하고 세계 여러 나라의 정치 상황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모은 '다시, 민주주의로'를 통해 시대의 화두를 전했다. 이는 OTT 등 매체들에 밀리고 있는 영화, 그리고 극장의 타개책을 찾는 노력이면서 동시에 영화라는 매체의 역할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를 만드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와 더불어 올해 전주국제영화제가 주목한 것은 바로 80년대 '한국의 스필버그'라는 별명을 얻었던 배창호 감독이었다. 배창호 감독은 80년대 <고래사냥>, <기쁜 우리 젊은 날>, <적도의 꽃>,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등 흥행작을 만들었던 인기 감독이자 소설가 최인호, 배우 안성기와 함께 '트로이카'를 이루며 걸작을 만들어냈던 거장이었다. 여기에 자신의 조감독이었던 이명세 감독의 데뷔작 <개그맨>에서는 배우로 등장해 같이 출연한 배우 안성기, 황신혜의 존재감을 뛰어넘는 연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대중의 인기에 안주하지 않고 <황진이>, <꿈> 등의 실험적인 영화를 만들어냈고 부인 김유미씨와 함께 한 <러브스토리>, <정> 등을 통해 한국인의 정서가 담긴 사랑과 인생의 이야기를 그렸다. 안타까운 것은 후자에 소개된 영화들은 대부분 흥행을 하지 못했고 특히 <황진이>의 경우는 배창호라는 이름을 믿고 본 관객들이 당시에는 생소했던 '롱테이크' 기법을 이해하지 못해 항의를 하는 소동이 났을 정도로 관객에게 철저하게 외면당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념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자본이 삐딱한 시선을 보내자 독립영화 감독으로 변신했고 이는 곧 나이와 상관없이 스스로 길을 열고 길을 만든 영화 작가로 많은 이들에게 인식되고 오늘날까지도 차기작을 기다리게 하는 감독으로 자리매김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전주영화제는 올해 실험성을 보여줬지만 관객들에게 외면당했던 <황진이>를 비롯해 80년대 배창호라는 감독의 존재감을 알린 <꼬방동네 사람들>과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그리고 90년대 배창호의 대표작 중 하나로 실험성과 대중성이 조화를 이루었다는 평을 받고 있는 <꿈>을 선보였다. 그리고 놓치기 아까운 영화 한 편도 선을 보였다. 바로 배창호 감독이 자신이 영화를 촬영했던 장소를 돌아보며 영화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배창호의 클로즈 업>이다.
<배창호의 클로즈 업>에서 배창호 감독은 그의 작품 속에 나오는 촬영지를 다시 찾아가 공간과 작품의 관계, 삶과 영화를 이야기한다. <황진이>의 롱테이크를 찍었던 강원도의 폭포와 마지막 장면을 찍은 해변, <꼬방동네 사람들>에 나온 남대문, <안녕하세요 하나님> 에 나온 서울역 등을 통해 당시 '서울'이라는 곳이 사람들에게 주었던 이미지를 이야기한다. 설악산, 제주, 경주, 김제 평야, 태백, 여기에 '미국 올로케'라는 파격적인 시스템을 도입한 <깊고 푸른 밤>을 찍었던 로스앤젤레스, <흑수선>을 찍은 일본까지 그의 여정과 영화 이야기가 각 영화의 명장면들과 함께 이어진다.
이 영화가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그의 영화를 추억하고 영화 속 공간과 관련된 에피소드들을 듣는 것을 넘어 지금의 영화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들을 사이사이에 전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강원도에 갔을 때 배창호 감독은 자신이 영화를 찍었던 눈 내린 벌판이 스키장으로 바뀌고 롱테이크 장면을 찍었던 폭포가 '접근 금지'로 막혀있는 것을 본다. 이를 본 그는 '요즘 영화는 자연을 '배경'으로만 소비한다'고 평한다. 지난 3일 전주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그가 한 말을 들어보자.
"지금의 영화는 배경이 이용당한다고 생각한다. 아름답게 보이기 위한 장치일 뿐이니 '굳이 저기까지 가서 찍을 필요가 있을까'라는 마음이 들 정도다. 자연은 같은 출연자다. 제가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지금도 기억하는 이유는 사막이다. 흔들리는 나뭇잎의 느낌, 바람의 느낌 등은 (감독이)자연을 소중히 느낄 때 표현이 가능하다".
문득 배 감독의 말에서 요즘 관객들이 굳이 큰 스크린에서 영화를 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느껴지는 듯하다. 자연이 영화를 지배하는 이미지, 영화의 느낌과 와닿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배경'에 불과한 것이라면 굳이 '자연이 주는 위대한 아름다움'이 없는 작품을 비싼 돈을 주고, 극장까지 가서 볼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큰 화면이 주는 매력은 바로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있고 그 속에서 작게 느껴지는 인간을 만나게 되는 것인데 이 매력이 없다면 큰 스크린은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거장이 전한 메시지라는 생각을 한다.
그는 길 위에서 영화를 찍었고 길을 따라가며 영화를 만들었다. '시간이라는 공간에 삶을 압축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그리고 그 길을 그는 몇십년 만에 다시 걷고 몇십년 전의 이야기를 전한다. 그 자신도 자신의 영화에 가장 많이 나오는 공간으로 '길'을 꼽았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에는 우연찮게도 페데리코 펠리니의 고전 <길>이 나온다. 여전히 젤소미나의 여정을 가려 하는 그의 모습이 어렴풋이 느껴진다.
아쉽게도 <배창호의 클로즈 업>은 상영 여부가 불투명하다. 어쩌면 극장이 아닌 다른 공간에서 공개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어느 공간이든 이 영화가 소개된다면 다시 한 번 보고 싶고, 그리고 꼭 권하고 싶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감독의 길, 영화의 길을 담아낸 작품이기 때문이다.
설혹 배창호라는 감독을 모른다면 이 영화를 통해 알아보기를 또 권하고 싶다. 지금의 한국영화가 나오기까지의 과정이 선명하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지금의 영화가 무너지고 있는 이유를 역으로 보여주고 있는 영화이기에 꼭 공개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