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과 거짓이 구별되지 않는 '모호성', 우리가 만들고 있었다
진실과 거짓이 구별되지 않는 '모호성', 우리가 만들고 있었다
  • 임동현 기자
  • 승인 2023.12.04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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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극단 연극 '컬렉션'
서울시극단 연극 '컬렉션'. (사진=세종문화회관)
서울시극단 연극 '컬렉션'. (사진=세종문화회관)

(내외방송=임동현 기자) "세상은 원자와 빈 공간뿐, 나머지는 의견이다".

그리스의 철학자 데모크리토스가 한 말이자 과거 한동훈 현 법무부 장관이 장관 후보자 시절 자신의 좌우명이라고 밝힌 말이다. 최근 한동훈 장관은 송영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저격하면서 이 격언의 말투를 사용했다.

'팩트는 변하지 않는다'라는 뜻으로 사용했다고 하지만 어떻게 보면 이 말은 '진실'이라는 것은 마음만 먹으면 쉽게 묻을 수도 있다는 의미가 아닌가라는 생각도 해 본다. 어차피 세상이 '원자와 빈 공간' 뿐이라면, 나머지를 모두 '의견'이라고 치부한다면 본인의 진실을 굳이 스스로 밝힐 필요가 있는 것일까? 남의 진실에는 그리 민감하게 굴면서 말이다.

지난 1일부터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공연 중인 서울시극단의 연극 <컬렉션>을 한 마디로 표현하라고 하면 필자는 데모크리토스의 이 말을 그대로 옮기고 싶다. 진실인지 거짓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인물들의 대사와 행동을 보면서 관객들은 어느 순간 진실을 알고 싶어하기보다는 '과연 진실이란 무엇인가?'라는 고민을 하게 된다.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생각하고 싶은대로 생각하고, 그리고 이를 어느 순간 자기 스스로 신봉하게 되는 지금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이 작품은 바로 1961년 해롤드 핀터가 쓴 희곡이다. 60년대에 씌여진 이야기가 2023년 대한민국을 반영하는 이 상황. '고전의 힘'이라고 하기에는 마음이 정말 뜨끔하다.

제임스(강신구 분)와 스텔라(최나라 분) 부부. (사진=세종문화회관)
제임스(강신구 분)와 스텔라(최나라 분) 부부. (사진=세종문화회관)

<컬렉션>은 네 명의 등장인물이 나온다. 부부인 제임스(강신구 분)와 스텔라(최나라 분). 한 집에 같이 사는 해리(김신기 분)와 빌(정원조 분)이 그들이다. 어느 날 제임스는 스텔라에게 바람을 피웠다는 고백을 듣게 되고 그는 스텔라와 하룻밤을 보냈다고 하는 빌의 집을 불쑥 찾아간다. 

한편 해리와 빌은 한 집에 살지만 점점 관계가 서먹해지는 상황이었다. 해리가 집에 없는 사이 빌은 갑작스런 제임스의 방문을 받게 되는데 처음에는 경계하지만 어느 순간 제임스와 말이 통하는 사이가 된다. 그 사이 제임스의 상황을 알게 된 해리는 이번엔 제임스가 집에 없는 사이 스텔라의 집을 찾게 된다.

무대는 양옆에 해리의 집과 제임스의 집을 배치하고 그 사이에는 공중전화 부스를 놓았다. 이 공중전화 부스는 서로의 집에서 만남을 갖는 것을 암시하는 역할을 한다. 초반부만 놓고 보면 이 작품은 스텔라와 빌이 과연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는지, 그날 밤의 진실은 과연 무엇인지를 풀려는 이야기로 보이게 된다.

하지만 이들의 이야기는 어느 순간 어느 것이 진실이고 어느 것이 거짓인지를 분간할 수 없게 만든다. 과연 제임스와 빌은 인간적으로 친해진 것일까? 제임스는 정말로 빌을 알게 한 스텔라에게 고마워하는 것일까? 갈수록 모호해지는 이야기는 어느 순간 나름대로의 결론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최후의 대사는 결국 "그게 사실이지?"라는 제임스의 질문, 그리고 스텔라의 침묵이다. 그리고 빌은 자신의 손, 그리고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 질문과 침묵, 상처. 연극은 그렇게 막을 내린다. 

(사진=세종문화회관)
(사진=세종문화회관)

등장인물들은 각기 다른 이야기를 하며 진실이 드러나는 것을 피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불륜을 저질렀다고 고백한, 아니 정확히 말하면 '고백했다는' 스텔라는 침묵하고, 제임스에게 자신이 스텔라와 함께 있었다고 말한, 아니 정확히 말하면 '말했다는' 빌은 어느 순간 부적절한 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빌은 제임스에게 호감을 보이지만 어느 순간 그들의 관계도 뒤틀리기 시작한다. 제임스는 여전히 빌을 의심하는 것처럼 보이고 해리에게 빌은 '빈민가에서 데려온 소년' 그 이상으로 그를 보고 있지 않다. 이 때문에 필자는 어쩌면 이 연극의 실제 주인공은 빌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처받을 수밖에 없는, 그 상처를 겪지 않기 위해 자신을 방어하지만 결국 상황을 받아들여야하는 나약한 인간이 그였기에 그랬던 것 같다.

사람들은 누구나 진실이 밝혀지길 원한다. 사건의 크고 작음을 떠나 모든 것이 명확히 밝혀지길 원한다. 그래서 영화 <범죄도시> 시리즈의 마석도 형사(마동석 분)가 CCTV를 가리면서 "진실의 방으로"를 외칠 때 사람들은 좋아했다. 하지만 역으로 이런 상황은 마석도가 주먹이 세지 않으면, 형사들이 폭력을 눈감아주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상황이다. 사람들은 비현실적인 방법으로라도 진실을 찾고 듣길 원한다는 게 이 장면에서 나오는 것이다. 왜?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진실이 도통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모른다. 우리의 침묵, 혹은 우리가 소위 '자기 방어'라고 생각하고 하는 말과 행동이 진실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앞에서 말한 데모크리토스의 말처럼 연극 속 인물들은 '진실'이 아닌 '의견'을 말할 뿐이다. 그렇게 침묵하고 방어하는 순간, 진실은 멀어져간다. 그게 지금 우리의 모습이다. 어느 순간 진실을 떠나보내고 그 진실을 찾아야한다고 외치는 우리들의 문제가 연극 속에 담겼다. '모호성'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컬렉션>은 오는 10일까지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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