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너머 세상으로 향한다'는 꿈, 한국 사진의 역사로 이루어지다
'바다 너머 세상으로 향한다'는 꿈, 한국 사진의 역사로 이루어지다
  • 임동현 기자
  • 승인 2023.12.18 15:1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서울시립미술관 '구본창의 항해'
자화상,  1972, 젤라틴 실버 프린트, 11×9cm. (사진=서울시립미술관)
자화상, 1972, 젤라틴 실버 프린트, 11×9cm. (사진=서울시립미술관)

(내외방송=임동현 기자) 보도자료가 두껍다. 그럴 수밖에 없다. 수많은 그의 작품들, 그리고 그가 추구했던 변화의 기록들. 이것을 단 몇 장의 종이에 기술하는 것으로 끝낸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가 걸었던 길이 한국 사진의 한 세기, 또는 두 세기에 이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는 '항해'를 하고 있다. 어디로 갈 지, 어느 방향을 향할 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이것 하나는 확실하다. 어디로 어떻게 가든 그 스스로 바닷길을 만들 것이라고.

지난 14일부터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는 한국 현대사진 역사의 시작이라고 칭할 수 있는 구본창 작가의 대규모 회고전 <구본창의 항해>가 열리고 있다. 구본창 작가는 1988년 워커힐미술관에서 <사진, 새시좌>를 기획하면서 이른바 '연출사진'을 소개하며 한국 현대사진의 서막을 연 인물이다. 이 전시는 구본창의 작품세계와 함께 한국 현대사진의 시작과 전개를 함께 볼 수 있는 기회를 관람객들에게 제공한다.

전시의 시작은 1972년작 <자화상>이다. 자신의 친구에게 부탁해 남해 상주 해안가에 앉아 수평선을 바라보는 자신의 뒷모습을 촬영한 사진이다. 이 사진에서 그는 언젠가 꼭 저 바다 너머 세상으로 향할 것이라는 다짐을 표현한다. 이 사진을 시작으로 바다 너머 세상을 향해가는 구본창의 '항해 기록'이 펼쳐진다.

일 분간의 독백, 1980~1985, 시바크롬 인화, 11×17㎝(×4). (사진=서울시립미술관)
일 분간의 독백, 1980~1985, 시바크롬 인화, 11×17㎝(×4). (사진=서울시립미술관)

구본창의 시작은 '호기심'이었다. 그는 유년 시절부터 사물에 대한 호기심이 남달랐다고 한다. 마당에서 발견한 그릇 조각, 아버지가 해외 출장길에 가져온 인쇄물, 국내외를 오가며 만난 손때 묻은 사물, 심지어 버려진 물건까지 그의 손에 들어오면 진귀한 수집품으로 변신했다. '라이프(LIFE)' 잡지, 밥 딜런의 음반 자켓 등은 그의 수집품이자 촬영 대상이 됐고 이는 그의 사진 인생을 이끄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호기심의 방'을 지나면 우리는 이제 구본창의 '모험의 여정'을 살피게 된다. 유학 시절 각종 아르바이트를 하며 모은 돈으로 여러 유럽 도시를 여행하며 촬영한 <초기 유럽> 시리즈(1979~1985)를 만든 그는 이 중 흑백 사진들을 모아 <일 분 간의 독백>(1985)이라는 작품을 내놓는다. 

이 작품에서 그는 독일에서 '이방인'으로 느끼는 소외감과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을 표현한다. 죽음을 의미하는 숫자 '4',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곳곳에서 마주친 '44'라는 숫자를 떠올리면서 44분에서 45분으로 가는 그 1분의 시간을 표현하면서 어머니를 향한 간절한 마음으로 점철됐던 6년간의 독일 유학 생활이 마치 일 분의 짧은 꿈처럼 느껴졌음을 알리고 있다. 

그렇게 유학 생활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오지만 그는 또다시 이방인이 된 느낌을 가지게 된다. 88서울올림픽을 앞둔 한국은 그가 독일로 떠날 때보다 너무나 많은 것이 변해있었다. 변화된 서울, 자신을 품어줄 것이라 믿었던 고국마저 낯설게 느껴진 상황에서 그가 선택한 것은 바로 서울의 구석구석을 사진에 담아내는 일이었다. 그렇게 그는 <긴 오후의 미행>을 통해 서울의 낮을 담아내고 밤에는 자신의 방에서 자신을 카메라에 담은 <열두 번의 한숨> 시리즈를 만들어낸다. 

탈의기 01, 1988, C-프린트, 111×80.5cm. (사진=서울시립미술관)
탈의기 01, 1988, C-프린트, 111×80.5cm. (사진=서울시립미술관)

'연출사진'이라는 명칭을 얻게 한 <탈의기>는 해변에 뒹굴던 밧줄 꾸러미를 자신을 옭아매는 틀로 규정하고 이를 벗어나 변화하려는 몸부림을 실험적으로 표현한다. 이런 그의 노력은 각각의 부분을 실버프린트와 바느질로 연결해 하나로 만든 <태초에> 시리즈로 만들어진다. 앞에서 보면 사람의 몸을 찍은 사진으로 보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각 부분을 하나하나씩 찍어 그 사진들을 바느질로 연결해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낸다. 한번에 찍는 사진이 아니라 각각을 찍고 연결하는 작업을 해나간다. 관념을 표현하려는 작가의 끈기가 아니라면 이런 작업 자체가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당시 영화 포스터 사진 작가로도 유명했는데 비옷을 입은 배우 황신혜의 매력적인 모습을 담은 <기쁜 우리 젊은 날>의 포스터, 이정재의 영화 데뷔작 <젊은 남자>의 포스터 사진이 그의 작품이다. 이는 모두 친구인 배창호 감독과 작업한 것이다.

작가는 이후 2004년부터 조선백자를 촬영하기 시작했고 세계 곳곳에 소장된 백자 달 항아리 12개를 촬영한 <문라이징 Ⅲ> 등의 작품을 선보인다. 또 종이꽃인 '지화'에 매료되어 <지화> 시리즈를 통해 화려함을 벗어난 은은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그림인지 사진인지 분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매끄러운, 조선백자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구본창은 놓치지 않는다. 그렇게 백자가, 지화가 사진을 통해 우리가 느끼지 못했던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문 라이징 III, 2004~2006,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100×80㎝(×12). (사진=서울시립미술관)
문 라이징 III, 2004~2006,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100×80㎝(×12). (사진=서울시립미술관)

이러한 그의 상상은 마침내 2010년 <콘크리트 광화문> 시리즈를 만들어낸다. 그는 경복궁을 찾았다가 야외에 놓인 콘크리트 광화문 부재를 발견하고 이를 촬영했는데 6개의 부재를 낮과 밤에 촬영하면서 광화문이 버텨온 역사를 이야기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을 겪고 일재강점기 일제의 철거 위협에 시달리고 한국전쟁의 폭격과 반쪽자리 복원에 시달려야했던, 우리가 인식하지 못했던 광화문의 역사를 그는 부재를 통해 증명한다. 

그는 '흔적을 어떻게 끌어낼 것인가'를 고민한다. 영화를 보고 감동을 받는 이들은 많지만 사진 한 장을 보고 감동하는 이들은 사실 많지 않다. 사진은 '한 순간'의 흔적만 담아내기 때문이다. 사실 사진을 보고 감동을 받는 이유는 사진 자체이기보다 사진 속에 숨겨진 '이야기' 때문일 것이다.

구본창은 사진 한 장 한 장에 자신을 담고 자신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그리고 나이 70이 된 지금도 그 항해를 계속해서 이어가고 있다. 자신의 수집품, 88올림픽을 앞둔 서울, 영화배우들, 사람들의 육체, 그리고 조선백자와 지화, 광화문... 무엇으로 단정지을 수 없는 그의 광범위한 항해를 즐길 수 있는 전시다.

콘크리트 광화문 01, 2010,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100×75cm. (사진=서울시립미술관)
콘크리트 광화문 01, 2010,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100×75cm. (사진=서울시립미술관)

구본창은 "가지고 있는 것을 소진하고 가는 것이 제 목표"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 목표를 이루려하면 아직 많은 시간이 더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호기심은 나이를 먹지 않기 때문이다. '언젠가 꼭 저 바다 너머 세상으로 향할 것'이라고 했던 스무 살 청년은 여전히 그 꿈을 가지고 살고 있다. 그리고 그 꿈이 우리 사진 역사를 발전시켰다. 구본창이 '대가'로 인정받는 가장 큰 이유다.

전시는 2024년 3월 10일까지 열린다.


오늘의 이슈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법인 : (주)내외뉴스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 서울, 아04690
  • 인터넷신문등록일자 : 2017년 09월 04일
  • 발행일자 : 2017년 09월 04일
  • 제호 : 내외방송
  • 내외뉴스 주간신문 등록 : 서울, 다 08044
  • 등록일 : 2008년 08월 12일
  • 발행·편집인 : 최수환
  • 서울특별시 종로구 대학로 13 (뉴스센터)
  • 대표전화 : 02-762-5114
  • 팩스 : 02-747-5344
  • 청소년보호책임자 : 최유진
  • 내외방송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내외방송.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nwtn.co.kr
인신위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