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예술가의 집과 흔적이 남아있는 성북, 성북이 곧 박물관이다"
[인터뷰] "예술가의 집과 흔적이 남아있는 성북, 성북이 곧 박물관이다"
  • 임동현 기자
  • 승인 2024.02.11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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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간 '성북문화 지키기'에 앞장선 김보라 성북구립미술관장
김보라 성북구립미술관장. (사진=김보라 제공)
김보라 성북구립미술관장. (사진=김보라 제공)

(내외방송=임동현 기자) 2009년, 서울 성북구에 자치구 최초의 구립미술관이 들어섰다. 하지만 '구립'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미술관의 격을 낮춰보는 이들이 있었고, 개발의 논리는 성북에 존재했던 오원 장승업의 집, 김환기 작가의 집 등을 없앴다.

간송미술관을 자주 찾으며 성북의 매력에 빠져있던 김보라 성북구립미술관장은 사라져가는 예술가들의 흔적을 지키기로 마음먹는다. 그렇게 미술관의 전시 프로그램이 만들어졌고 조각가 최만린 선생의 집은 '최만린미술관'으로 새롭게 태어났으며 성북동의 탐방코스가 큰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윤중식, 서세옥 등 근대 화가들의 이름이 새롭게 부각됐고 성북구립미술관은 성북의 예술인들은 물론 해외에서도 찾는 미술관으로 도약했다. 성북에 담긴 예술의 기를 지켰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작가를 발굴하고, 그 작가의 흔적을 살리고, 새로운 작가를 찾는 일에 전념하고 잇는 김보라 성북구립미술관장, 그의 14년간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큰 건물을 짓는 것이 아니라 지역에 있는 것들을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그의 말이 묵직하게 다가왔다.

지난달 8일 문체부 장관상을 받은 김보라 관장(오른쪽). 왼쪽은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사진=성북구)
지난달 8일 문체부 장관상을 받은 김보라 관장(오른쪽). 왼쪽은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사진=성북구)

지난달 박물관·미술관 발전 유공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을 수상했다.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감사하다. 상이란 건 참 좋은 것 같다. 개인에게 주는 상이지만 성북구에서 오랜 기간 일을 하지 않았다면 받을 수 없는 상이기에 의미가 있었다. 자치구에 처음 생겼던 미술관이었는데 그동안 쉽지 않은 일들이 많았다. 그래도 제 나름대로의 비전이 있었기에 14년을 있을 수 있었고 그 14년의 시간을 인정해주시고 공감해주시는 느낌, 그 시간을 보상받은 느낌이 있었다. '내가 가는 길이 한국 뮤지엄 성장에 작게나마 도움이 됐구나'라는 생각에 기뻤다. 그날 행사에 학예사들이 모두 나와서 축하를 해줬다. 정말 감사했다.

14년 전으로 시간을 돌려보자. 성북구립미술관을 맡게 된 과정이 궁금하다

처음부터 뮤지엄의 변화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프랑스 파리에서 6년간 있었고 세종문화회관, 경기도미술관 등에서 큐레이터로 일했는데 '뮤지엄이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고민을 하고 있던 때였다. '큰 규모의 뮤지엄이 과연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정신적으로 힐링이 될 수 있을까'라는 회의가 들었다. 오히려 지역에 살던 예술가들의 집, 지역에 남아있는 예술가들의 흔적이 제게 감동울 줬고 현장에서 나오는 예술가의 감흥이 너무나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차에 성북구립미술관 채용공고를 우연히 신문을 통해 봤다. 제가 간송미술관을 자주 찾았는데 뭔가 고즈넉한 마을인데 이야기가 많이 숨겨져있는 느낌이 좋았고 간송 전형필 선생의 흔적이 남아있는 미술관도 있고 해서 성북이 마음에 들었다. 여기에 구립미술관은 최초로 생기는, 생소한 공간이기에 새로웠다. 뮤지엄의 새로운 지평을 열 계기라고 봤기에 마음이 가기 시작했다. 

이후에 조사를 해보니 '성북장학회'라는 곳이 있는데 이 곳에 살았던 예술가들이 마을에 사는 불우한 학생들을 위해 작품을 판매하고 그 수익을 장학금으로 조성한 것이다. 이 장학회가 1978년부터 시작됐고 서세옥 선생 등 작가들이 작품을 내놓았는데 그 당시에 얼마나 어려운 학생들이 많았겠는가. 작품을 내놓는 것만으로도 예술가들이 정말 많은 공헌을 하는 것이고 지역사회와 함께 하는 것도 너무 중요한 것이다. 그 매력에도 끌렸다.

정말 미술관에 가고 싶어서 포트폴리오까지 만들어서 열심히 준비했다. 그렇게 면접을 보는데 세상에, 서세옥 선생님, 최만린 선생님이 면접관으로 오신 것이다(웃음). 그분들이 저를 뽑아주셨다.

성북구립미술관 전시 모습. (사진=성북구립미술관 페이스북)
성북구립미술관 전시 모습. (사진=성북구립미술관 페이스북)

처음 왔을 때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을 것 같은데

많이 겪었다. '구립'이라는 선입견이 내적 구성원들에게도 있었다. '여기는 구립이니까 그냥 그 수준으로 하자' 그게 바로 깨기 어려운 벽이었다. 그 인식을 바꾸는 것이 첫째라고 보았다.

그렇다면 그 인식을 바꾸는 시작점은 무엇이었나?

콘텐츠로 승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뮤지엄에서 중요한 사업은 전시인데 어떤 전시를 하느냐에 따라 인식이 바뀔 것으로 봤다. 그것 외에는 답이 없었다. 당시에는 학예사도 없었고 미술관 직원이 5명도 채 안 됐다. 전시로 무엇인가를 알릴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선택한 것이 김환기였다. 김환기 화가와 김용준 화가의 인연이 담긴 '노시산방'을 기억하기 위해 <두 예술가를 만나다> 전을 기획했고 지금은 사라졌지만 이야기가 담긴 공간을 찾아내기로 한 거다. 

그렇게 해서 이미 사라졌던 오원 장승업 집터의 표식과 함께 최순우 옛집, 간송미술관, 심우장(만해 한용운 선생의 집), 그리고 윤중식, 서세옥, 김환기 집터를 성북동의 탐방코스로 만들어 김환기와 김용준의 전시를 열면서 운영을 했는데 이게 엄청난 인기를 모았다. 당시 이 탐방코스가 신문기사에도 나오면서 입소문이 나고 전시도 관심이 높아진 것이 시작이었던 것 같다.

그 때 당시에 학예사로 왔던 분이 지금도 미술관에 있다. 학예사들이 이 곳에서 계속 보람을 느끼기에 이직이 없다. 물질적인 부분은 사실 적지만 자고 일어나면 작가가 발굴되고 전시 계획이 계속 나오니 연구를 계속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10년간 발굴한 작가가 53명이다. 예술가들의 흔적들을 찾기 위해 10년 이상을 달려온 거다.

관장님이 보신 '성북의 예술적 가치'는 무엇인가?

한국 근현대 미술이다. 우리나라가 근대 미술이 굉장히 취약하다. 일제 시대와 6.25 전쟁을 겪으면서 많은 작품들이 손실됐고 이중섭, 박수근 외에는 알려진 작가나 작품이 많지 않다. 김환기 작가도 환기미술관 등으로 인해 나중에 알려진 분이고 윤중식 작가는 많은 분들이 잘 몰랐던 분이다. 우리가 잘 몰랐던 근대의 예술가들이 바로 이 성북에 살았고 성북에서 교류했다. 정말 '한국 근대 미술의 메카'라 할 정도로 시대의 초상을 많이 만들어냈다. 그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

최만린미술관 개관, 서세옥미술관 건립 추진 등 예술가들의 흔적이 배인 곳을 보존하는 노력이 돋보였는데 이를 활용해야겠다고 생각한 계기는?

예술가가 살았던 집이나 작업실은 작품의 모태가 된 곳이면서 작가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사라지게 되면 묻혀지게 되고 복원도 상당히 어렵다. 그런데 김환기의 집이 사라지고 장승업의 집이 사라졌다. 매일매일 사라짐을 경험하면서 '있는 거라고 지켜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성북동에서 하려던 일이 큰 미술관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근현대 작가들의 흔적을 남기는 것이었고 그렇기에 최만린, 서세옥, 윤중식, 박경리 선생 등의 집을 활용하는 작업들을 시작했다. 

최만린미술관을 만들 때 어려움이 많았다. 최만린 선생을 중요하게 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다행히 당시 공무원들이 성북구의회를 설득해서 결국 성북구가 매입에 성공해 미술관을 만들 수 있었는데 이 미술관이 대한민국 공공건축상을 받았다. 정말 좋은 사례가 되어서 감사했다.

작가의 온기가 느껴지는 곳에서 작품을 같이 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뮤지엄들이 미래에 다양한 형태로 변하겠지만 작가의 집 등을 이용하는 역할이 클 것이라고 본다. 이제 커다란 미술관은 실패하고 있다는 것이 국내외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너도 나도 거대한 뮤지엄을 짓는다고 하지만 실상은 건물을 짓는 것이고 결국 큰 손해를 입는다. 이 미술관이 무엇을 할 수 있느냐라는 문제제기가 나올 만하다. 그렇게 가면 안되는데 우리나라는 자꾸 크게 짓고 있다. 

성북은 다르다. 성북은 그 자체가 박물관이다. 건물을 지을 필요가 없으면 안 지어도 되고 활용하면 된다. 그 유명한 테이트 모던도 화력발전소를 활용해서 만든 것이다. 예술가들의 흔적이 남은 건물의 온기와 현대의 작품이 만날 때 느껴지는 기 역시 감동적이다. 

서세옥, 사람, 19x27cm, 종이에 수묵, 2008. (사진=성북구립미술관)
서세옥, 사람, 19x27cm, 종이에 수묵, 2008. (사진=성북구립미술관)

지금까지 한 전시 중 가장 구민들의 관심을 끌었던 전시는?

지난해 4월부터 6월까지 연 이중섭, 박수근, 윤중식 작가의 3인전 <화가의 벗 : 시대공감>이다. 역시 이중섭, 박수근을 좋아하는 분들이 많았고 재방문하시는 분도 많았다. 전쟁과 가난 속에서 어떻게 작품을 남기셨는지 참 존경스럽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참 공감이 많이 갈 것이고 그래서 두 화가를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신기한 것은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학교의 교장 선생님이 전시를 보러 오셨는데 소개를 받거나 정보를 들어서 온 게 아니라 그냥 성북동에 오고 싶었고 그림을 보고 싶다고 왔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아마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나보다. 

바로 그 전시 후 지난해 11월, 윤중식 작가의 작품 2점이 제주 이중섭미술관에 기증됐다

성북구립미술관이 없다면 정말 윤중식이라는 작가를 알릴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2012년 윤중식 선생님이 100세가 되셨을 때 개인전 <윤중식>전을 열었고 전시가 끝나자마자 돌아가셨다. 그 때 선생님께서 작품을 기증하시겠다고 했는데 작가가 뜻을 밝혔다해도 작고하신 이후에는 유족을 통해 기증 여부를 확인해야하고 작가의 의지와 유족의 생각이 다른 부분이 있기에 바로 기증받지는 못했지만 10년 뒤 선생의 10주기 전시를 하면서 유족 분들이 기증을 해주셔서 10년 전의 약속을 지키게 되었다. 

윤중식 작가는 이중섭 작가와 대학 동문으로 동경에서 함께 활동했고 한국전쟁 때도 피난 생활을 이어가며 월남미술인 작품전 등도 함께 했다. 지난해 전시를 통해 이중섭과 윤중식, 그리고 박수근과의 관계가 밝혀지면서 윤중식 작가가 더 알려지고 기증까지 하게 됐다. 윤중식 작가가 친구의 품에 안긴 거다(웃음).

기증하면서 또 신기한 에피소드가 있다. 제주 서귀포시장님이 작품을 받게 됐는데 포장된 작품을 뜯는 순간 갑자기 시장님이 눈물을 왈칵 쏟으셨다. 그걸 보고 유족들도 우시고 저도 울었다(웃음). 나중에 이유를 물으니 "모르겠다. 작품을 보니 눈물이 나왔다"라고 하더라. 그게 작품이 가진 힘인 것 같다. 친구를 찾아왔다는 드라마틱한 부분도 있다.

제주도에 이중섭이 살았던 집이 있고 이중섭미술관이 있지만 죽기 1년 전부터 정릉에서 살면서 정릉의 예술가들과 교류했다. 이중섭이 정릉에서도 살았고 그 이전 통영에서도 살았고 망우리에 묘지가 있어 이 지역들을 다 묶어 MOU를 추진한 적이 있는데 그 계획이 아직 있다. 이제 그 기반이 마련됐기에 서로 작품 교류도 많이 할 것이다.

지금 미술관이 갖고 있는 윤중식의 작품이 500점 정도 됐는데 순회전시도 할 거고 공동연구도 필요하다. 자료 교류를 통해 근현대 미술의 연구 영역을 확보할 수 있는 것도 가능하고 인력 교류도 모범이 될 것 같다. 미술관들의 공동의 자산으로 서로 교류 협력하는 초석을 다지는 계기로 만들 것이다.

서세옥, 최만린, 윤중식 작가 등이 자신의 작품들을 아낌없이 성북구립미술관에 기증했다

서세옥 선생님이 돌아가신 뒤 유족들이 3,000점이 넘는 작품을 무상으로 기증하셨고 최만린 선생님 유족들이 400점, 윤중식 선생님 유족들이 500점을 기증하셨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는데 윤중식 선생님의 작품을 기증받는 데 10년이 걸렸다. 신뢰가 없으면 되지 않는 게 기증이다. 그런 면에서 서세옥 선생님과 최만린 선생님이 우리 미술관에 쏟은 열정과 신뢰를 잊을 수 없다.

서세옥 선생님은 매일 미술관에 오셔서 한국의 미술, 한국의 미가 무엇인가를 항상 말씀해주시고 잊으면 안된다고 하셨다. 10여년이 넘도록 그렇게 하셨다.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너무나 중요한 말씀이기에 미술관 운영에 반영하고 선생님을 통해 제 세대에 접할 수 없었던 작가들을 알게 됐다. 서세옥 선생님이 코로나 시국 때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전 이미 기증 의사를 밝히셨다. 100여 점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하셨고 나머지를 성북구립미술관에 기증하겠다 하셨는데 3,000여점 중에는 본인 작품이 아닌 컬렉션이 포함되어 있기에 외부 인사들에게 감정을 부탁하기도 했다. 

작품들이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한 것보다 훨씬 더 좋았고 컬렉션을 통해 한국화의 뿌리를 봤다. 서세옥이라는 마지막 문인화 화가가 무엇에 뿌리를 두고 작업을 했는지가 보였고 한국화를 확장해서 연구할 길이 보였다. 왜 우리에게 주셨는지가 느껴졌고 '이건 무조건 받아야한다. 유산처럼 키우자'고 생각했다. 이 소장품을 가지고 미술관을 만들지 않는다는 것은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이다.

최만린 선생님도 생전에 중요 작품들을 다 선별하셔서 미술관 개관에 맞추어서 기증을 해주셨다. 최만린미술관 만들 때 어려운 과정을 겪으면서도 한 마디 불만이나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정말 인품이 좋으신 분이다. 공교롭게도 두 분이 모두 2020년에 돌아가셨다.

올해 전시 계획은 무엇인지?

최만린미술관에서 상반기에 '최만린의 원형'을 전시하려한다. 처음에 흙으로, 손으로 석고작업을 한 석고 원형이 많이 남아있는데 전시가 된 적이 한 번도 없다. 선생님 작품의 원형을 드라마틱하게 전시하려한다.

그리고 지난해에 시인이신 김남조 선생님께서 돌아가셨는데 최만린 선생님과 상당히 친하셨다. 미술관에도 자주 오셨고 최만린 선생님께서 돌아가셨을 때는 직접 조문을 써서 읽어주시기도 했다. 이어령 선생님도 성북에 사셨는데 김남조, 최만린 선생님과 교류가 있었고 김남조 선생님의 남편인 조각가 김세중 선생님이 최만린 선생님의 스승이였다. 그 관계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 너무 많다. 이를 중심으로 가을에 서정적인 전시를 할 예정이다.

14년의 시간이 지나다보니 원로작가들이 계속 등장한다. 제가 중견작가라고 생각했던 분들이 어느새 원로작가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 유근택 선생님의 전시를 하려한다. 유근택 작가는 성북동에 오래 거주하셨고 성북의 풍경을 그리는 한국화가다. 이 전시를 토대로 너무 근현대에 매몰되지 않고 중견작가에게 길목을 터주는 미술관으로 도약하려한다. 지금도 많은 중견작가들이 성북에 많이 사신다. 2, 3년에 한 번 중견작가 전시를 할 것이다. 

또 하반기에는 이쾌대를 중심으로 권진규, 김창열, 전뢰진, 조덕환 등이 활동하며 한국 미술교육의 발화점이 된 <성북회화연구소> 전시를 하려한다. 굉장히 의미있는 사설 연구소고 김창열 선생님 같은 경우는 유일한 스승이 이쾌대 선생이라고 하기도 했다. 지금 한두분만 남고 다 돌아가셨는데 이를 알리는 전시를 하려한다. 

윤중식, 소녀, 54.5x54.4cm, 종이에 수묵채색, 2009. (사진=성북구립미술관)
윤중식, 소녀, 54.5x54.4cm, 종이에 수묵채색, 2009. (사진=성북구립미술관)

신진작가의 발굴도 필요하다고 보는데

맞다. 가장 중요한 작업이다. 이 곳은 예향이고 작가로 발돋움하려는 작가에게 상당한 자극제가 된다. 한성대입구역에 있는 '성북예술창작터'를 통해 신진예술인 발굴, 지역네트워크를 하고 있다. 작가들을 발굴하고 전시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는다. 성북에 관련된 작가나 성북으로 테마를 삼는 작가들 누구나 괜찮다. 

또 성북구에 미술대학이 6개인데 이들 대학과도 연계를하고 있다. 학생들이 졸업을 하면 졸업 전시를 하는데 그 전시를 다 본다. 전시를 보면 눈에 들어오는 작가가 있다. 작가의 길을 가야하나, 작가가 되면 어떻게 먹고 살아야하나하는 고민을 하는 학생들이 있는데 물론 좋은 교수님들이 이끌어주지만 한계가 있다. 교수들의 추천을 받아 작가로 가야될 사람을 찾아내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려한다. 성북을 대표했던 과거의 작가와 미래의 작가를 잇는 전시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다.

미술관을 찾는 구민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실텐데 개선점은 없는지?

휴게 공간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아쉬움이다. 요즘은 뮤지엄이 전시장을 넘어 관람객들이 차도 마시고 책도 읽을 수 있는 복합 문화공간으로 가고 있는데 그 공간이 아직 없다. 여기 1층에 성북 글로벌빌리지센터가 들어와있는데 구청에서 노력을 하고 있지만 이전이 쉽지가 않다. 그것이 해결되면 주민들이 마음 편히 쉬어가는 공간으로 만들어놓으려 한다. 서세옥미술관이나 다른 미술관이 만들어지면 특성에 맞게 시설 운영을 할 생각이다.

관장님이 생각하는 성북구립미술관의 미래는?

'세계적인 지역 미술관'이다. 사실 지금의 뮤지엄들은 너무나 현대적이라 한국을 찾는 뮤지엄 관계자들이나 작가들이 큰 감흥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곳이 바로 성북동이다. 예술가들의 흔적이 모인 곳이다. 서세옥미술관, 윤중식미술관만 세워져도 충분히 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고 최근 추세인 '에코뮤지엄'의 하나의 형태가 될 수 있다. 성북동에서 한국 근대미술을 보고 이를 통해 한국화의 맥을 짚으며 서로 교류한다고 생각하면 너무나 설렌다. 성북구립미술관, 그리고 성북의 가치를 많은 사람들이 공감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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