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나무 인문학 - 만해의 마음을 숭모한 북정마을 앵두나무
[특별기획] 나무 인문학 - 만해의 마음을 숭모한 북정마을 앵두나무
  • 전기복 기자
  • 승인 2025.04.10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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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원전 뒤편 좌측편에 있는 우물과 전면 우측에 V자 형태로 줄기를 여럿 뻗은 앵두나무, 그 뒤편으로 두 그루가 더 있다. (사진=전기복 기자)
함원전 뒤편 좌측편에 있는 우물과 전면 우측에 V자 형태로 줄기를 여럿 뻗은 앵두나무, 그 뒤편으로 두 그루가 더 있다. (사진=전기복 기자)

(내외방송=전기복 기자) 남녀노소 누구나 좋아하는 추억 속의 나무 한두 번째에 앵두나무가 있으리라. 그럴 것이 옛날 시골 마을 집 집마다 우물가며 담장 옆에는 앵두나무가 많았고 이를 보고 열매는 간식으로, 특히 “아가야 나오너라 달맞이 가자 앵두 따다 실에 꿰어 목에다 걸고” 흥얼거린 「달맞이」 동요 가락은 입이며 귀에 익다. 서울 도심 속 앵두나무는 어떤 모습일지 찾아 나서보자.

요즘은 조선시대 왕보다 더한 호사를 누리며 살다 보니 앵두를 주전부리 꺼리로 생각하는 경우는 드물다. 아예 접하기 자체가 어렵다. 그러나 70〜80년대까지만 해도 시골 어르신들은 허다하게 “니들 오면 따서 먹으라고 뒀는데 다 떨어지고 없네”라며 내리사랑을 표현하곤 하셨고 몇 남지 않은 앵두를 그릇에 담아내기도 했다. 

개구쟁이 몇이 모이면 군것질거리며 놀이의 대상이 된 앵두다. 잘 익은 앵두는 손만 닿아도 잘 떨어진다. 한 움큼 따다 입에 넣고 몇 번 오물거리면 쉽게 씨앗이 과육에서 분리된다. 한 녀석이 툭 뱉으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누가 누가 앵두 씨 멀리 뱉나 시합 아닌 놀이’가 되었다. 

이렇듯 생활 곁에 선 그런 친숙한 앵두나무였다. 어쩌면 장독대 일부이자 담장 일부로, 1950년대 말 ‘앵두나무 우물가에〜’라는 노랫말이 라디오 전파를 타자 마치 ‘앵두나무 선 우물가’는 농촌 마을의 전형처럼 굳어졌다. 

동네 어르신과 초여름 소 먹이러 산에 갈 때는 간혹 산앵두라며 내밀면서 ‘이스라지’라고 불렀다. 무슨 외국어인가 생각한 적도 있었고 한 참 후에 안 일이지만 앵두나무를 순우리말로 ‘이스라지’라고 한다나. 앵두나무는 ‘꾀꼬리가 즐겨 먹으며 복숭아를 닮았다’고 꾀꼬리 앵(鶯)자에 복숭아 도(桃)를 써서 앵도라고 부른다. 세월이 변하여 ‘어린 복숭아’ 앵도(櫻桃)가 되었다가 ‘앵두’로 변했다고 하고 국어사전에는 앵두나무이나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식물도감에는 앵도나무로 표기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경복궁 아미산 화계 전경. (사진=전기복 기자)
경복궁 아미산 화계 전경. (사진=전기복 기자)

이렇듯 앵두가 서민들의 간식 꺼리로, 생활 공간의 동반자 같은 존재였다면 조선시대 양반가에서는 형제간 우애의 상징나무로 여겼다. 4월경 희거나 연한 붉은색 꽃을 피운 앵두나무가 6월이 되면 광택을 내며 빨간색 열매로 익는데 열매가 다닥다닥 달리는 모양새를 형제간의 우애에 견주어 보았으므로, 그래서 우리나라 양반가에는 거의 예외 없이 앵두나무를 심고 가꿨다고 한다.

나아가서는, 경복궁, 창덕궁 등 궁궐에도 앵두나무는 있다. 특히 경복궁 근정전 북쪽 왕의 처소인 강녕전을 지나 왕비가 거처한 교태전과 그 부속 건물인 함원전 뒤편을 유심히 보자. 아미산을 조성하고 그 비탈진 면에 계단식 정원(화계)을 만들었는데 여기에서 작은 키에 흙 부분부터 줄기를 여럿으로 뻗어서 마치 몇 그루가 함께 자란 듯 선 앵두나무를 발견할 수 있다. 교태전을 정면에서 바라보면 우측 후원에 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앵두나무다. 특히 교태전 옆 함원전 뒤편 좌측면에는 우물이 있는데 그 우물 오른편 정원에 앵두나무 세 그루가 나란히 섰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의 말을 빌리면 “화계는 앵두나무·진달래·철쭉·미선나무·목단 같은 키 작은 나무들과 금낭화·옥잠화·작약·국화·수·원추리 같은 풀꽃이 꽃밭을 꾸민다. 곳곳에 기이한 형상의 괴석을 배치하여 단조로움을 피했다. 이는 우리나라 건축과 조원(造園)의 독특한 형식이자 큰 자랑”이란다. 앵두나무가 궁궐 정원의 한 구성요소인 이유를 말하는 듯하다. 

아미산 화계며 함원전 우물가에 선 앵두나무는 ‘효심깊은 나무’로 알려 있어 나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굳이 찾아서 방문하는 순례지 같은 곳이기도 하다. 이는 조선 제5대 문종이 세자 시절 아버지인 세종에게 손수 심은 앵두나무에서 익은 앵두를 따다 올린 이야기에서 연유한다.

“국조보감 제8권 문종조에 보면 문종은 항상 후원에다 앵두나무를 심고 손수 가꾸어 잘 익으면 따다가 세종에게 올렸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왕조실록 중 문종실록 등에는 이에 세종이 반드시 맛을 보고서 말하기를, 외방에서 올리는 것이 어찌 세자가 직접 심은 것만 하겠는가”라는 기록이 등장한다.

시간은 쌓여 세자에 책봉되고 1451년 37세 때 왕위에 오른 문종, 임진왜란으로 인한 경복궁의 소실과 150여 년 전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한 역사를 다시 되돌아봐도 앵두나무는 가냘프고 너무 작다. 그래도 옛날 문종이 심은 나무의 후계목이라 생각하자.

서울 성북구 성북로29길 24 소재 심우장, 만해 한용운 스님이 거처한 곳이다. (사진=전기복 기자)
서울 성북구 성북로29길 24 소재 심우장, 만해 한용운 스님이 거처한 곳이다. (사진=전기복 기자)
좌측 전면 붉은 벽돌 담장 위로 자란 앵두나무 방향에서 심우장 대문 쪽을 바라본 모습, 골목 좌측 끝머리에 심우장 대문이 흐릿하게 보인다. (사진=전기복 기자)
좌측 전면 붉은 벽돌 담장 위로 자란 앵두나무 방향에서 심우장 대문 쪽을 바라본 모습, 골목 좌측 끝머리에 심우장 대문이 흐릿하게 보인다. (사진=전기복 기자)

효심의 상징목이 궁궐 뒤뜰 화계에 선 앵두나무라면 민족의 독립을 갈구한 시인의 마음을 숭모한 앵두나무는 서울 성북구 북정마을에 있다. 북정마을은 “성북동 토박이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50년 넘게 이 마을에 사는 사람도 있고, 3대에 걸쳐 살아가고 있는 집안도 있다. 함께 모여 김장을 하고 김장을 나누어 가며 사는 요즘 서울에서는 찾기 힘든 오래된 마을이다.” 이 마을을 들먹인 이유는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인 만해 한용운 스님께서 만년(1933〜1944)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난 심우장이 있어서다. 

심우장 대문을 기준 삼으면 옆집이요, 본채를 봐서는 뒷집인 그 집에는 앵두나무가 자란다. 좁은 골목, 담장 위로 수줍은 듯 고개를 내밀었으나 열매 익는 계절 6월에 와 보라. 반질반질한 표면이며 속까지 붉은 열매가 익는다. 누가 ‘어린 복숭아’ 앵도(櫻桃)라 했던가, 복사꽃보다 복숭아보다 더 붉은 앵도를 두고. 매일 심우장을 들고 나며 가슴에 간직했을 ‘오도송’의 붉은 심장을, 그 앵두나무에서 다시금 보게 된다.

북정마을 앵두나무. (사진=전기복 기자)
북정마을 앵두나무. (사진=전기복 기자)

지금은 블록담장이 높다. 하지만 그 시절은 아마도 담장이 없거나 나무 울타리였을 동네였을 게다. 옆집 앵두나무는 만해의 걸음걸이 소리를 들으며 줄기를 곧추세웠을 터이고 자랐을까. 나는 곧잘 그 모습 자랑스럽게 지켜봤을 나무라고 상상하곤 한다.

한번은 앵두나무집 초인종을 누르자 할아버지와 손녀가 나왔다. 나무의 내력을 여쭙자, “이사든지 십수 년밖에 되지 않아 그 전부터 있었다는 것밖에 모른다.”였다. 손가락 굵기보다 조금 굵은 줄기 서넛과 주변에는 새순이 여럿 돋아 있다. 그것만으로 수령을 따질 수는 없는 노릇이나 썩은 줄기며, 움갈이를 하면서 대를 잇는 앵두나무의 특성을 생각하면 어찌 그 역사가 선생의 발치쯤에 이르지 못한다 할 수 있겠는가.

북정마을 앵두나무. (사진=전기복 기자)
북정마을 앵두나무. (사진=전기복 기자)

서울 종로구 백석동2길 35-1 일대에 있는 일명 ‘뒷골마을’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주변 일대는 온통 앵두나무 일색의 울타리였다. 규모도 규모이거니와 앵두나무 속내를 살폈더니 손목 굵기를 한 줄기는 썩고 있는가 하면 그 옆으로 내 키를 넘는 새 줄기가 여럿 자라고 있었다. 

마을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조상 때부터 이어져 온 것이라 한다. 보이는 줄기의 굵기나 단순히 키의 높낮이로 앵두나무의 수령을 예단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은, 움갈이를 하면서 세대를 잇는 앵두나무의 생태적인 특성을 근거로 하는 것이다.

옛날 어르신들이 자식, 손자 기다리며 익은 앵두 바라보던 내리사랑을 지켜보았을 우물가 앵두나무가 있다. 또한 세자의 치사랑이 나은 화계의 앵두나무도 있었고, 독립운동가의 뛰는 심장 소리 발걸음 소리 듣고 자란 북정마을 앵두나무도 있었다. 이들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앵두나무 모습에서 어찌 크고 작음이나 더 아름다운 수형이며 우열을 논할 수 있겠나 마는, 궁궐 화계의 그 나무보다 후대의 심겼을 북정마을 앵두나무가 더 장성하게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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