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외 단상] 꼭 드라마의 주인공이 아니어도...
[내외 단상] 꼭 드라마의 주인공이 아니어도...
  • 임동현 기자
  • 승인 2023.09.19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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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현 문화부 부장.
임동현 문화부 부장.

(내외방송=임동현 기자) 소설가 이장욱이 쓴 단편소설이 있다. 제목은 <변희봉>. 주인공인 무명배우 '만기'는 어느날 밤 술에 취해 지하철역을 내려가다가 '변희봉'을 만난다. 그리고 그 후 시장에서 생선을 팔고 있는 '변희봉'을 만난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밴희봉 선생을 봤다 아이가"라고 말하지만 사람들은 이를 믿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변희봉'이라는 사람을 모른다. 심지어 인터넷조차도 '변희봉'에 대한 정보가 없다.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분명 자신의 우상은 <괴물>의 변희봉인데... 세상조차 자신을 외면한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을 만기다. 

그런데 이 소설의 마지막, 임종을 앞두고 만기의 아버지는 만기에게 묻는다. "만기야... 니 밴... 희봉이라고... 아나?" 만기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다. 열심히 끄덕인다. 멈추지 않고 끄덕인다. 소설은 표현한다. '만기는 부친의 고요한 몸 앞에서 그렇게 오래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배우 변희봉도 소설 속 '변희봉'처럼 될 뻔한 시절이 있었다. 젊은 시절에도 그는 주인공보다는 조연, 그것도 악역으로 많이 출연했다. <수사반장>의 사이비 교주, <안국동 아씨>의 무당 등을 거쳐 <설중매>에서 유자광 역을 맡아 "이 손 안에 있소이다"라는 유행어를 만들기도 했지만 90년대 들어 '트렌디 드라마'의 붐을 타고 젊은 연기자 위주로 드라마가 만들어지면서 그의 역할은 점점 사라져갔다. 그의 이름이, 존재가 세상에 지워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 때 영화를 만든다는 한 젊은이가 그를 찾아와 자신의 영화에 출연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런데 시나리오를 보니 '개를 잡는 이야기'였고 제안받은 역할도 개를 잡아먹는 경비원이었다. "그게 영화감이야?" 그 때 젊은이는 어렸을 때 본, 변희봉이 출연한 드라마들의 이야기를 줄줄줄 이야기했고 결국 그의 설득에 넘어가 오랜만에 영화를 찍게 된다. 그리고 이 대사를 외쳤다. "보일러 돈다잉~"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겠지만 이 젊은이의 이름은 봉준호. 변희봉은 <플란다스의 개> 이후 <살인의 추억>, <괴물>, <옥자>를 함께 작업한다. <괴물>로 영화제 남우조연상을 받았고 <옥자>로 칸영화제 레드카펫까지 밟았다. 어디 그뿐인가. <화산고>, <선생 김봉두>, <시실리 2km>, <주먹이 운다>, <하얀거탑>, <오로라공주>, <솔약국집 아들들>... 2000년대를 대표하는 영화와 드라마에는 늘 그의 이름이 있었다. 

"마치 70도 기운 고목나무에 꽃이 핀 기분이다. 두고 봅시다. 이 다음에 뭐를 보여줄 지, 죽는 날까지 연기하겠다". 2017년 <옥자>로 칸영화제 레드카펫을 밟았을 때 그가 한 약속이다. 그리고 이 말도 했다. "이제 다 저물었는데 미래의 문이 열리는 것 아니냐하는 기대감도 생겼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미래의 문'은 너무 빨리 닫혀버렸다. 완치됐다고 믿었던 췌장암의 재발로 결국 배우 변희봉은 2023년 9월 18일 팬들의 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을 추모하는 글들이 계속 인터넷 기사로 올라오고 있는 것을 보면 그에 대한 대중의 존경심이 어느 정도 컸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한때는 내가 세상의 주인공,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될 수 있을 것이라 믿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나의 드라마는 또 이렇게 끝나/ 나왔는지조차 모르게/ 끝났는지조차 모르게'(아이유, <드라마>)다. '하루 단 하루만 기회가 온다면 죽을 힘을 다해 빛나리'라고 마음을 먹지만 '조명이 꺼진 세트장에 혼자 남겨진 나는 단역을 맡은 그냥 평범한 여자'였다고 가수는 노래한다. 실제 우리가 출연 중인 드라마가 그렇다.

하지만 삶이 지속되는 한 드라마는 계속될 것이다. 반전이 일어날 가능성은 분명히 있다. 하지만 꼭 반전이 일어나지 않아도 좋다. 내가 주연이 아니더라도, 설사 단역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누군가에게 빛을 비춰주는 별의 역할을 한다면 어느 순간 주인공과 비슷한 자리에 있을 수도 있다. 변희봉의 '배우 인생'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배우 변희봉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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