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대 대통령 이재명 낙선...소년공에서 대통령 도전까지 그가 걸어온 길
제20대 대통령 이재명 낙선...소년공에서 대통령 도전까지 그가 걸어온 길
  • 김승섭 기자
  • 승인 2022.03.10 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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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공으로 일하다-검정고시-사법고시-인권변호사-지자체장-대통령 도전까지
1980년 성남으로 이사온 지 4년 만에 지하를 벗어나 처음 1층으로 이사한 날. 가족들과 밥 나누어 먹는 장면.(사진=더불어민주당 선거대책위원회)

(내외방송=김승섭 기자) 제20대 대통령 선거에 도전했다가 낙선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지난 1964년 12월 22일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났다. 7남매 중 다섯째 4남으로 출생했다. 

본관은 경주(慶州) 이씨(李氏)다. 1972년 2월 안동 삼계초등학교를 졸업했고, 1978년 8월 고입(중학교) 검정고시 합격에 합격했고, 1980년 4월 대입(고등학교) 검정고시를 치른 뒤 중앙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 1986년 2월 법대 학사 학위를 땄다. 

본적은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상대원동, 부인 김혜경씨와 2남(이동호, 이윤호)를 두고 있다. 산업재해로 인한 지체장애(6급)이 있어서 군은 면제됐다. 

1976년~1981년 성남공단 노동자로 일했고, 1986년 7월 사법시험 합격 후 연수원을 거쳐 1989년 변호사 사무소를 개업했다. 

1989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국제연대위원으로 있었고, 이천노동상담소 소장, 광주노동상담 소장, 성남참여연대 집행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2006년 정계에 투신 후 성남시장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열린우리당).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선거에 출미했으나 역시 고배를 마셨다(성남시 분당구 갑, 통합민주당).

민주당·민주통합당·새정치민주연합의 공천천을 받아 성남시장에 당선되며 2010년부터 민선5기 성남시정을 이끌었다. 민선6기 성남시장에 재선됐고,2017년 제19대 대통령선거에 더불어민주당 경선 후보로 출마했으나 떨어졌다. 

절치부심한 끝에 2018년부터 민선 7기 경기도지사를 지냈고, 2021년 7월 제20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해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를 제치고 앞으로 5년간 국정을 이끌 권좌에 앉았다. 
 
이 후보의 가훈은 '역지사지(易地思之)', 좌우명은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이 최선을 다한 뒤 하늘의 명을 기다린 것이다. 

이 당선자는 평생의 멘토로 '어머니'를 꼽는다. 스트레스 해소법은 배우자와의 수다. 

이재명 당선자 고입 검정고시 시험 응시원서 사진.(사진=더불어민주당 선거대책위원회)
이재명 당선자 고입 검정고시 시험 응시원서 사진.(사진=더불어민주당 선거대책위원회)

이재명 후보가 걸오온 길살펴보면 그는 경북 안동에서 가난한 화전민의 아들로 태어나 도시빈민 가정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졸업 후 6년 동안 소년공으로 살며 검정고시를 통해 중고등학교 졸업 자격을 얻고 3년간 전액 장학생으로 대학에 진학해 만 23세에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이후 40대 중반까지 노동인권 변호사, 시민운동가로서 살다가 2010년 이후 8년간 성남시장으로, 또 2018년 이후 경기도지사로서 부패 기득권 세력에 저항하며 민생 중심의 '개혁적 실용 정치'를 펼쳐 왔다.
 
최악의 조건에서도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내는 불굴의 용기와 의지, 공정한 세상을 향한 그의 열망이 '변화와 혁신'을 바라는 국민들의 열망과 맞닿아 '대한민국 제20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할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됐다. 

대전환의 시기, '위기'를 돌파해 대한민국 대도약의 '기회'로 만들어 최고의 '국민 일꾼' 인간 이재명의 삶은 처절한 가난과의 사투로부터 시작됐다.

'‘흙수저'였다. 아들이 태어난 날조차 헷갈릴 정도로 삶의 무게에 짓눌렸던 어머니, 가족을 잘 돌보지 않았던 아버지 밑에서 굶주림을 채우려 산나물을 캐 먹으며 빈곤하게 성장.

5km 산길을 홀로 걸어 초등학교 가야 했고, 가난을 이유로 학교에서 매를 맞는 일을 자주 겪기도 했지만 교무실 옆 작은 도서실에서 '해저 2만리', '암굴왕(몽테크리스토 백작)' 등 소년 소녀 명작을 읽으며 '앎의 쾌감', '독서의 즐거움' 알게 됐다. 

1976년 2월,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경기도 성남 상대원 시장 꼭대기 월셋집으로 이사해 아홉 식구의 단칸방에서 생활의 서막이었다. 

중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한 13살에 소년노동자 생활 시작했다. 어린 나이로 형 이름을 빌려 위장 취업을 해가며 성남 상대원 공단 공장 곳곳을 전전하며 일당 400원을 받기 위해 크고 작은 산재 사고 겪으며 특근과 야근, 철야를 반복하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취업한 야구 글러브 만드는 공장에서 프레스에 왼팔 손목 관절이 눌리는 사고를 당한 뒤 손목이 뒤틀린 '굽은 팔로 성장했다. 이 사고로 6급 장애인 판정을 받고 군 복무에서 면제받았다.

공장에서 겪은 지속적 폭력과 가난에서 탈출하기 위한 길은 공장 관리자가 되는 것 뿐이라고 판단, '고졸' 우대 조건을 맞추기 위해 검정고시 치르기로 결심했다. 

1978년 4월 말 검정고시 학원 등록, 월급 1만 5000원 중 1만원을 학원비에 쏟아 붓고 재봉틀 위에서 공부에 전념하는 각고의 노력 끝에 1978년 8월 고입, 1980년 4월 대입 검정고시 합격했다.

소년공 6년, 쇠붙이와 화공약품 공장 6곳을 거치며 지문과 후각을 잃고, 흉터와 장애 얻으며 이름 없는 '소년 공돌이' 생활은 지속됐다.

전두환 정권 시절이었던 1981년, 본고사가 폐지되면서 학력고사 성적만으로 4년 장학금을 주는 사립대학이 생겨났다. 

공장일이 끝나면 성남에서 버스로 한 번에 갈 수 있는 유일한 학원인 답십리 신답극장 앞 삼영학원 입시 종합반 등록해 오후 7시부터 밤 10시까지 공부, 하루 두 시간 수면으로 버스에서 졸다가 종점인 사기막골에서 깨 집으로 걸어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이 후 학원을 그만 두고 상대원 고개에 위치한 독서실에서 밤새 공부와의 씨름에 돌입했다.

1981년 7월, 6년 간 지속해 온 공장 생활을 끝내고 학력고사 준비에 만전울 기했다. 10월 말 무렵, 입시 예상 대상자 65만 명 가운데 모의고사 점수 1500명 등 안팎에 도달해 돈을 받고 대학 다닐 수 있는 점수대애 진입했다.

대입 검정고시 합격 후 '이재명' 이름으로 종전 근무했던 시계 공장에 재입사하며 마침내 이름 없는 소년공 벗어났다.

1982년 서울대 1~2개과 제외한 모든 대학·학과에 합격할 수 있는 대입점수 취득했는데, 중앙대에서 학점 관계없이 3년 등록금 면제, 월 20만원 생활비 지원 혜택 제안받게돼 중앙대에서 합격선이 가장 높았던 법학과를 선택해 진학했다.

이재명 당선자는 세상의 '거악'에 눈을 떴다.
 
이재명의 대학시절은 군부독재 시기였다. 독재 반대 학생운동이 활발하던 시기다. 이재명은 대학 교정에서 군사독재 횡포에 맞서는 학우들을 흔히 목격할 수 있었다. 

중앙도서관 건물 외벽 밧줄에 매달려 "독재 타도"의 구호를 외치고 유인물을 뿌리던 학생이 전경에게 끌려가는 장면에 충격을 받기도 했다. 그렇지만 세상의 부패 기득권 구조에 대한 인식은 아직 어렴풋했다. 그 때만해도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폭도들에 의한 반란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학교에서 광주학살 사진집과 비디오를 접하며 점차 '광주학살'의 참상에 대해 알게 됐다. 광주학살의 실상을 알게 되면서 무지했던 자신을 깨닫고 소수 기득권 부패 세력에 의해 자기와 같은 일반 대중이 쉽게 조종당하기도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훗날 이재명은 광주를 '사회적 어머니'라 지칭하곤 했다. 광주학살의 참상을 알게 되면서 거대한 부패 기득권 세력이 사회를 통제하는 부조리를 깨닫게 됐기 때문이다.

이재명도 학생운동 참여를 권유받았다. 소년공 출신임을 알고 더욱 적극적으로 학생운동 참여를 권유받았다. 하지만 애써 외면해야 했다. 유일한 생명줄과 같았던 대학생 신분을 잃을까 두렵기도 했다.

대학생 신분을 유지해야만 매월 생활비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사법 시험을 합격해 제도권 안에서 개혁을 하겠다는 생각도 강했다. 대신에 학생운동을 열심히 하는 동료들에 대한 미안함을 덜어내고자 4년 간 거의 고무신과 교복, 교련복만 입고 학교에 다녔다. 

대학과 청년 시절 남북분단의 비극에 관한 소설 ‘태백산맥’과 도시빈민의 가혹한 삶을 그린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등의 책을 접하며 삶의 방향에 대한 영감을 받았다. 

한반도 분단의 비극과 모순적인 사회현실을 자각하면서 ‘나도 누군가를 때려가면서 권력 부리며 살겠다’는 소년공 시절의 한에서 비롯된 생각을 버리고, 정의가 살아 숨 쉬는 공동체를 열망하며 사회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된 가난과 부조리를 타파하며 '공익'을 추구하며 살겠다고 결심하게 됐다.

판‧검사 대신 '인권 변호사'를 선택, 세상을 바꾸기 위해 정치를 결심했다.

1989년 가난한 사람과 강력 범죄, 철거민이 많았던 성남에서 변호사 사무소를 개업해 부당한 기득권 부패와 싸우고, 고통 받는 민중의 대변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인근 이천·광주시 노동상담 소장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활동을 하며 노동·인권변호사로 시국사건 변론 주로 맡다 보니 일반 법률 상담과 의뢰에서 멀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1995년 성남시민모임(현 성남참여자치시민연대) 창립 구성원으로 참여하며 시민운동 시작했다. 수도권남부저유소 수도권공동대책위원회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했고. 당시 노무현 변호사, 최열 환경운동가, 곽노현·김상곤 교수 등 여러 인사 참여했었다.

2006년 정치권 향한 첫 도전으로 성남시장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2008년 46세 나이에 직전 해 대선 패배 후, 분당구에서 '의무방어전' 식으로 치러진 총선에 전략 공천으로 출마해 낙선했다.

2010년 민선 5기 성남시장 당선, 9층에 있던 시장실을 2층으로 옮기고 시민 모두에게 개방하는 '열린 시정'을 실시했다. '시민과 함께 호흡하는 시장'으로 각인도했다.

전임 시장의 부실·방만·부패 시정으로 심각한 재정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지방정부 최초로 '모라토리엄' 선언. 성남시민의 정치적 관심을 높이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재명 후는 는 2014년 6월 민선 6기 성남시장으로 재선됐다. 96% 공약 이행률, 부패 청산, 복지 확대라는 실적과 증거로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스스로 자신을 '4년 계약직 공무원', '성남 1호 머슴'으로 일컬으며 국민에 대한 봉사 정신을 강조했다. 그는 실제로 그 자신을 리더나, 지도자로 표현하는 것을 싫어한다. 정치인은 보통의 시민보다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권한을 주어 일을 하는 '공복', 즉 '국민 머슴'이란 생각이 확고하다. 

2015년에는 ‘성남시 3대 무상복지 정책’ 발표하고 '청년배당, 무상교복, 무상산후조리 지원' 정책을 실시했다. 청년배당은 높은 청년실업이 청년 개개인들의 탓이 아니기 때문에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인식하에 추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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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청년배당금을 지역상품권으로 지급해 청년지원과 지역상권 활성화에 기여했다. 중학생 대상 무상교복 지원도 시작했다. 또한 65세 이상 노인들이 한 달에 20시간 일하면 10만 원을 지급하는 '소일거리 사업'을 실시하기도 했다. 이들 정책은 모두 보편적 복지에 대한 이재명의 확고한 신념을 반영한 정책이었다.

2017년 19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더불어민주당 대선 경선에 출마해 낙선했다.

2018년 3월 성남시장을 사퇴하고, 경기도지사 출마 공식 선언허고 6월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선 7기, 제35대 경기도지사에 민주당계 출신으로 20년 만에 당선됐다. 취임사를 통해 강자를 누르고 약자를 돕는 '억강부약(抑强扶弱)' 실천 의지를 표명했다.

이 후보는 2021년 7월 1일 '새로운 대한민국, 이재명은 합니다'라는 슬로건으로 대선출마 공식 선언했다.

'출마의 변'을 통해 현 대한민국 상황을 '위기'로 규정하고, 위기 근본 원인을 불공정·양극화로 진단하며 '공정성 확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 '강력한 경제 부흥책 시행'을 역설하며 '기본소득'을 핵심 공약으로 내걸고 '억강부약'을 통한 '대동세상' 실현 의지를 재차 강조했다. 

하지만 윤석열 국민의힘 대통령 당선자에게 신패 하면서 다음을 기약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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