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인터뷰] "사진은 이미지를 수집하는 것, 나는 '이미지 수집가'"
[신년 인터뷰] "사진은 이미지를 수집하는 것, 나는 '이미지 수집가'"
  • 임동현 기자
  • 승인 2024.01.07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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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진의 역사' 구본창 사진작가의 '항해록'
'한국 사진의 역사' 구본창 사진작가. (사진=임동현 기자)
'한국 사진의 역사' 구본창 사진작가. (사진=임동현 기자)

(내외방송=임동현 기자) 사진작가 구본창. 그의 발자취는 곧 한국 사진의 역사였다. 바다를 바라보며 '저 너머 새로운 세상으로 가고 싶다'는 꿈을 꾼 그는 독일 유학을 시작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군더더기없이 사진에 담아냈다. 근대와 현대가 뒤섞인 80년대의 서울, 무용수들의 몸, 조선백자와 지화, 콘크리트로 만들어졌다가 부서진 광화문의 흔적, 그리고 영화 포스터와 패션 사진... 그의 사진 한 장 한 장이 바로 한국 사진의 역사가 발전한 과정이었다. 

지난해 12월 14일부터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열리고 있는 대규모 전시 <구본창의 항해>를 본다면 앞에 쓴 이 글이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묵묵히 자신의 이야기를 사진으로 기록했던 구본창의 '항해'. 그 항해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 항해에 대한 이야기를 그에게 직접 듣고 싶었다. 2024년 새해를 앞두고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그를 만나 들었던 구본창 작가의 '항해록'을 소개한다. 

기자간담회에서 질문에 답하는 구본창 작가. (사진=임동현 기자)
기자간담회에서 질문에 답하는 구본창 작가. (사진=임동현 기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대규모 전시가 열리고 있다. 전시회를 연 소감은?

개인적으로 이번 전시가 회고전인 셈이다. 모든 활동을 총정리하는 회고전인 셈인데 내가 활동하고 작업한 것을 총정리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만으로도 정말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작가가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 발자취를 기록하고 다시 되돌아보는 기회가 흔치 않은데 나에게 그 기회가 왔다는 것 자체가 감사하고 행복하다.

또 사진작가의 입장에서는 선후배 동료들이 미술관에서 사진작가의 대규모 전시가 열린 것을 큰 이벤트로 생각하고 있다. 미술과 사진의 접합점이 많지 않은데 사진작가를 대표해 서울의 큰 미술관에서 전시가 열렸다는 것은 상당히 사진계로서는 고무적인 일이다. 올해 서울시립사진미술관이 개관을 앞두고 있는데 시립미술관이 사진작가를 더 조명해 부흥에 이바지하며 자리매김하려는 뜻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사진작가 구본창'의 시작은 '호기심'이었던 것 같다. 특별하게 수집품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어린 시절부터 어떤 물건이라도 용도가 다 할때까지 버리지 않고 최대한으로 쓰고 또 썼다. 부모님께서 절대 허투루 돈을 쓰지 않았고 모든 걸 아끼고 최대로 쓸 만큼 쓰시는 분이셨다. 그게 부모님의 가르침이었고 버리지 않고 모으는 것 자체가 훈련이 되어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어렸을 때 외톨이로 지냈기에 사물에 더 많은 애정을 표현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사회 생활에 익숙치 못하다보니 말을 못하는 물건이 오히려 더 사랑스러웠다. 말은 할 수 없지만 말을 붙일 수 있는 대상이었고 쓸모없는 것에 애정을 둔 것이 수집의 시작이었다.

따지고 보면 사진도 이미지의 수집이다. 나는 카메라로 수많은 이미지를 채집하고 수집한다. 내가 돈을 내지 않아도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사물, 아름다운 풍경을 필름에 담을 수 있으니 그게 수집이다. 구본창은 '이미지 수집가'다. 딱 기사 제목 나오지 않나? '이미지 수집가 구본창'(웃음).  

자화상,  1972, 젤라틴 실버 프린트, 11×9cm
자화상, 1972, 젤라틴 실버 프린트, 11×9cm. (사진=서울시립미술관)

1972년작 <자화상>으로 전시가 시작된다. '구본창의 항해' 시작을 알리는 의미로 여겨지는데

대학교 2학년 때 친구들과 해변으로 캠핑을 갔는데 바다를 바라보는 그 순간 어딘가 먼 곳을 마음 속에 동경하게 됐다. 저 바다 너머 새로운 세상으로 떠나야겠다 마음먹고 다짐하는 의미로 같이 간 친구에게 찍어달라고 해서 찍은 사진이다. 

제가 굉장히 애정하는 사진이고 제가 만든 <일 분간의 독백>에도 이 장면을 넣었다. 전시를 준비하면서 큐레이터에게 이 사진을 보여주며 제 생각을 이야기했더니 큐레이터가 바로 '이 사진이다'하면서 전시의 시작을 <자화상>으로 결정했다.

1968년에도 <자화상>을 찍었고 <열두 번의 한숨>도 작가님 자신을 찍었다. 본인을 모델로 한 사진들이 눈에 띠는데

1968년에 찍은 <자화상>은 입고 있던 스웨터에 재미있는 무늬가 있어서 형태적으로 찍었고 바다에서 찍은 <자화상>은 나라는 존재를 좀 더 의식을 해서 찍었다. 독일에서 공부할 때는 학교에서 자기 자신을 찍거나 그리는 과제를 많이 내줬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도 있듯 나 자신을 계속 되돌아보라는 뜻에서 의도적으로 나를 작품 속에 넣는 것이다.

반 고흐도 자화상이 많은데 작가마다 자기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자기를 되새기는 행위를 한다고 본다. <열두 번의 한숨>은 고민하는 내 모습을 퍼포먼스로 표현한 것이기에 내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자기를 파고 들어가고 싶고 해결점을 찾으려 할 때 그런 행위를 하는 것 같다. 내 존재는 무엇인가, 내가 뭘 해야하나 등을 자기 자신에게 질문하는 것이다.

열두 번의 한숨 01, 1985, 즉석 필름, 27×11.5cm
열두 번의 한숨 01, 1985, 즉석 필름, 27×11.5cm. (사진=서울시립미술관)

독일 유학을 선택한 이유는?

대기업에 입사했는데 틀에 박힌 삶이 너무 싫었다. 사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미술 배우겠다고 하면 보내줄 부모가 어디 있겠나. 외국으로 가고 싶었는데 미국을 가려니 학비가 많이 들었고 형이 또 미국에 가 있었다. 

아버지께서 '너까지 보내줄 돈은 없다'고 하셔서 미국행을 포기하고 해외로 나가는 방법을 알아보던 중에 작은 회사지만 해외 주재원으로 갈 수 있는 곳을 알게 됐고 다행히 고등학교, 대학교 때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배웠기에 독일로 갈 수 있었다. 그 때는 사진을 공부한다기보다는 그냥 한국을 떠나고 싶다, 뭔가 새로운 걸 배우고 싶다, 틀에 박히기 싫다는 생각으로 무조건 나가려했다.

그렇게 독일에 도착해 도시의 분위기를 보니 내가 평소에 좋아하고 배우고 싶던 비주얼이 있었다. 포스터와 잡지, 아름다운 그림과 사진에 완전히 푹 빠졌다. '하고 싶은 것이 여기에는 일상에 다 들어가있구나' 공부하고픈 마음이 생겼다.

독일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이 있다면?

독일은 모든 작품을 할 때 장식을 하거나 아름답게 꾸미는 것을 꺼린다. 군더더기 없이 딱 보여줘야할 것만 보여준다. 사진 역시 필요없는 장식을 다 쳐내고 보여줄 것만 최소로 보여준다. 초창기 도시에서 찍은 사진은 조금 복잡하지만 간결하고 단순한 선과 면으로 된 사진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여기 전시된 백자 사진도 장식이 하나도 없다. 금관 역시 금관만 있다. 있는 그대로, 본연의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이게 확실히 독일의 영향이 아닌가 싶다. 

독일에서 대표작 <일 분간의 독백>을 만들었다. 만든 과정이 궁금하다

한창 도시 사진을 찍고 있는데 학교에서는 사진을 잘 찍었다고 하지만 개인적으로 뭔가 아쉬움이 느껴졌다. 이 이상을 해야하는데 교수들은 다 잘 찍었다고만 하고 내가 답답해하는 무엇인가를 풀어주지 못하는 것이다 고민하던 중 책방에서 내가 좋아했던 사진작가 안드레 겔프케의 사진집을 보고 용기를 내서 겔프케의 전화번호를 찾아 무작정 전화를 했다. 한국에서 유학온 학생인데 한국가기 전에 사진을 보여주고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했더니 오라고 하더라. 결국 겔프케를 만났다.

내가 찍은 유럽 사진을 본 겔프케가 이렇게 말했다. "유럽에 살던 사람이 찍은 건지 한국에서 유학온 사람이 찍은 건지 알 수가 없다. 한국 유학생으로서 너의 이야기를 해야하지 않느냐". 지금까지 내가 찾고 싶었던 해답이었다. 교수들은 거기까지 생각 못하고 좋다는 말만 해줬지만 한국인, 이방인으로서 자기의 이야기를 하라고 해준 것이 바로 겔프케와의 만남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철이 든 거다. 

독일 유학 중에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전에 묘한 경험을 했는데 그 때 한창 계산을 하면 묘하게 '10마르크 44센트' 이런 식으로 나오고 자다가 깨서 시계를 보면 '44'가 보였다. 작품에서 '일 분'을 44분에서 45분에 이르는 시간으로 정한 것이 그 이유다.

왜 자꾸 '4'자가 보이나 뒤숭숭하던 차에 어머니가 하얀 소복을 입고 누나들과 함께 택시를 타고 저를 찾아오시는 꿈을 꿨다. 그리고 어머니를 꿈에서 본 지 하루 이틀 뒤에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갑작스럽기도 했지만 어머니를 떠나보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어머니를 잃는다는 것 자체가 제겐 큰일이었다. 

그래서 겔프케가 '너의 이야기를 하라'고 할 때 유학 중 경험 중 가장 큰 일이 어머님이 돌아가신 것이었기에 작품의 한 축에 넣은 것이다. 

일 분간의 독백, 1980~1985, 시바크롬 인화, 11×17㎝(×4). (사진=서울시립미술관)
일 분간의 독백, 1980~1985, 시바크롬 인화, 11×17㎝(×4). (사진=서울시립미술관)

<일 분간의 독백>은 어머니의 죽음, <숨>은 아버지의 죽음이 소재가 됐다

한국에서 치열하게 살다가 1995년 경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는데 서서히 아버지의 피부가 거의 뼈에 가죽 붙은 것처럼 수척해지고 병을 앓으면서 서서히 날아가듯이, 증발하듯이 없어진다는 것이 느껴졌다. 아버지까지 떠나시면서 완전히 혼자가 됐기에 상실감이 더 커진 것 같다. 모든 생명체의 삶은 유한하고 결국 떠나야한다는 존재라는 점을 느끼며 <숨>이 만들어졌다.

귀국 후 서울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아냈는데 당시 어떤 마음으로 카메라 셔터를 눌렀는지 궁금하다

완전히 '이방인의 눈'으로 한 것이다. 6년 밖에 떨어지지 않았는데도 한국이 저에겐 너무 낯설었다. 군사독재도 계속됐고 모든 것이 옥죄어 있었다. 여권도 무효가 되어 해외에 나가는 것도 불가능해지니 그 규제가 너무 답답했다.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있던 때라 한창 짓고 부수고 하던 때였는데 겉은 번지르르 화장을 하지만 뒷골목만 들어서도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다. 

근대와 현대가 뒤섞인, 도시와 옛 모습이 혼합된 것이 정말 흥미로웠다. 그 모습을 담아내며 나만의 기록을 했고 은연 중에 도시에 깔린 독재의 냄새, 분위기를 표현한 것도 있다. 이 사진들을 콜라주해서 만든 게 <아! 대한민국>이다. 

작가님은 '연출사진'을 소개하며 한국 현대사진의 서막을 연 작가로 알려져 있다

당시 해외의 트렌드였다. 길거리에서 찍은 사진 자체만이 아니라 허구를 실제처럼 만들거나 정물을 찍을 때도 사진작가가 일부러 상황을 만들어서 찍거나 하는 식으로 사진이 회화와 합쳐지는 듯한 분위기가 있었다. 독일에서 공부를 했기에 해외의 트렌드를 어렴풋이나마 아는 상황이었고 특히 한국에서는 도시를 찍은 사진을 화랑에 전시하거나 거래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내 자구책으로서도 변화를 해야하고 사진을 회화적으로 표현하면 조금 더 남들에게 어필할 수 있지 않나라는 고민을 한 것 같다. 초창기에는 모사도 하고 그림도 그렸기에 단순하게 그리기보다는 인화지에 그림을 그려보고 싶고 스크래치도 내고 싶은 마음을 행위로 표현한 것이다.

'태초에 06'. (사진=구본창 작가 제공)
'태초에 06'. (사진=구본창 작가 제공)

<태초에> 시리즈의 경우 몸을 찍은 사진으로 생각했는데 직접 보니 실로 사진들을 연결한 것이었다. 이 어려운 작업을 하게 된 이유는?

스님이 누더기 옷을 입은 모습을 보면 오래 수도를 한, 덕망있는 스님으로 보이지 않나. 오래된 세월의 흔적을 재현해보고 싶었다. 인화지 자체를 암실에서 꿰멘 것인데 여러 개의 사진을 인화해서 쪼개서 붙인 것이 아니라 한번에 딱 인화했다. 깜깜한 암실에 인화지와 재봉틀을 들고 가서 거기서 꿰매서 보자기처럼 크기 기본판을 만들고 거기서 인화를 한 것이다. 

상당히 과정이 복잡했다. 암실에서 인화지를 꿰맨다는 것 자체가 일이었고 인화를 할 때 너무 어둡게 나오거나 너무 밝게 나오면 작품을 망치게 되기에 큰 노고가 필요했다. 하나를 꿰맬 때마다 오랜 시간이 필요했고 여러 사람이 협동을 해야하는 일이었다.

암실에서 바느질을 하면서 한석봉을 떠올렸다. 석봉의 어머니가 석봉에게 불을 끄고 글씨를 쓰라고 하지 않나(웃음). 석봉이 붓글씨를 쓰듯 나도 땀을 흘리며 작품을 만들어야 작품에 내 혼이 담길 것이라고 위로하면서 작업했다.

<태초에> 시리즈를 만들던 시기에 '몸'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많이 선보였다

부업으로 무용단 단원들을 찍었는데 단원들이 표현하려는 자기들의 '신체 언어'라는 것이 현대인의 고민, 속박, 답답함을 어떻게 헤쳐나가냐라는 질문이었다 그들의 행위가 내가 한국에 와서 느낀 답답함과 너무 일치하더라. 그들을 촬영하면서 공감을 하게 됐다. 

내가 내 모습을 찍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포커스를 맞추기가 어렵다. 내가 멋있는 퍼포먼스를 해도 누가 찍어주지 않으면 타이밍이 잘 안맞게 된다. 그렇게 다른 사람의 신체를 통해 이야기를 해보자는 마음으로 한 것이다.

구본창 작가가 찍은 영화 '기쁜 우리 젊은 날' 스틸 사진. (사진=임동현 기자)
구본창 작가가 찍은 영화 '기쁜 우리 젊은 날' 스틸 사진. (사진=임동현 기자)

제가 지금도 좋아하는 영화 포스터가 비옷 입은 황신혜 배우를 찍은 영화 <기쁜 우리 젊은 날>(배창호 감독) 포스터인데 그 사진을 작가님께서 찍으셨더라. 어떻게 찍게 됐는지?

배창호 감독이 내 친구다. 고등학교, 대학교를 같이 다녔다. 배 감독도 대기업에 다니다가 이장호 감독을 따라가겠다며 회사를 그만두고 영화계로 뛰어들었다. 내가 다니던 대기업을 그만두고 공부를 하기로 한 것도 그 친구에게 자극을 받아 결정한 것이다.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 배 감독이 "돈 벌기 어려울텐데 내가 영화 만들고 있으니 (포스터) 하나 찍어라"고 해서 <기쁜 우리 젊은 날> 포스터를 찍게 됐다. 그때는 스튜디오도 없고 해서 연세대 교정 위에서, 홍대 카페에서 안성기, 황신혜 배우를 찍었는데 당시 태흥영화사 사장이었던 故 이태원 사장이 "황신혜 배우가 너무 예쁘게 나왔다. 앞으로 우리 영화 포스터 사진 찍자"고 해서 태흥영화사에서 제작한 영화들의 포스터를 하나하나 찍게 됐다. 

(기자 주 : 이번 전시에서는 <기쁜 우리 젊은 날>, <업>(이두용 감독), <개그맨>(이명세 감독), <경마장 가는 길>(장선우 감독), <젊은 남자>(배창호 감독) 포스터가 전시됐으며 그 외에도 <장군의 아들>, <서편제>, <태백산맥>(이상 임권택 감독) , <시>(이창동 감독) 등 포스터가 그의 작품이다.)

임권택 감독의 <아제아제 바라아제>에도 참여한 적이 있는데 당시 이태원 사장님은 내가 찍기를 원했지만 임 감독님은 사진작가가 참여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임 감독님이 내가 찍은 스틸 사진을 보면서 제 실력을 알아주셨고 그 덕에 임 감독님 영화 포스터 작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임 감독님은 내가 찍은 사진을 영화 장면에 그대로 반영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취화선>을 찍던 당시 '이 정도의 망나니 화가라면 지붕 위에 올라가서 뭔가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 주인공 장승업(최민식 분)이 술병을 들고 지붕에 올라간 스틸 사진을 찍었는데 그 상황을 영화로 고스란히 찍으셨다. 내가 연출가는 아니지만 사진을 찍으면서 '이런 캐릭터를 만들고 싶다'고 말하면 감독님도 좋다고 만드셨다. 

포스터 사진도 매력이 있다. 영화는 두시간짜리 필름으로 만들지만 사진은 한 장으로 그 영화의 느낌을 만들어야하기에 나에게 새로운 도전이 됐다. 그 도전을 항상 해보고 싶었고 결과가 좋으면 참 행복했고 도움을 요청한 사람이 좋아하면 나도 행복했다. 상업적인 사진도 많이 찍었지만 돈을 넘어선 즐거움, 다른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고 있다는 것이 정말 행복하고 좋았다. 

영화 이야기가 나오니 아무래도 이 분을 언급해야할 것 같다. 강수연 배우.

그렇다. 강수연 배우는 박중훈 배우와 나왔던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에서 처음 만났고 <업>에 출연했을 때 아주 추운 날 한복 입고 물에 뛰어드는 장면을 찍는데 오들오들 떨면서도 열심히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직업의식이 철저하다고 느꼈다. 전시장에도 자주 왔고 작품도 구입했다. 최근에 강수연 배우가 죽고 나서 출연했던 영화들을 다시 보게 됐는데 정말 어린 나이인데도 귀엽고도 발랄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더 좋은 감독을 만났으면 더 좋은 작품도 하고 훌륭한 연기도 보여줬을텐데 그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스러졌다는 게 정말 안타까웠다. 내가 사진을 찍었던 시절이 강수연의 하이라이트였던 것 같다. 

문 라이징 III, 2004~2006,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100×80㎝(×12). (사진=서울시립미술관)
문 라이징 III, 2004~2006,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100×80㎝(×12). (사진=서울시립미술관)

조선백자를 찍은 사진들이 정말 매력적이다. 앞에서 독일 이야기를 하면서 나온 '군더더기없는 매력'이 발휘된 느낌이다

1989년도에 한 여성 외국인이 조선백자 달 항아리 옆에서 찍은 사진을 보고 '조선백자인데 왜 외국인이 갖고 있지'라는 생각에 언젠가 해외에 흩어진 백자를 찾아 촬영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나중에 알고봤더니 사진 속 여성은 '영국 현대 도예의 아버지'라고 하는 버나드 리치의 제자였고 영국에서 그가 이 백자를 가지고 있었다. 

이후 2004년에 일본에 갔는데 누군가가 조선백자 특집을 다룬 여성잡지를 보여줬다. 일본이 도자기를 많이 가져갔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일본의 주부들이 조선백자를 즐기는데 한국에서는 조선백자에 대한 관심이 덜하다는 것에 동했다. 아무도 찍지 않은 조선백자의 매력을 찍어보자. 작가의 의무감이 생겼다. 

사람들이 대부분 화려한 고려청자만 생각하고 조선백자는 잘 드러나지를 않는데 드러나지 않는 존재라는 점에서 저와 약간의 동질감이 들었다. 고려청자는 아름다운 무늬가 있지만 조선백자는 무늬도 없고 손으로 둔탁하게 만든 것이기에 한눈에 보고 아름답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지 않다. 말이 없고 수수한 것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내가 할 일이었고 바로 내 작품이 된 거다.

이번에 처음으로 2010년작 <콘크리트 광화문>이 공개됐다

광화문은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가 대원군 때 새로 지어졌고 일제시대에는 총독부를 지으면서 경복궁 동문 쪽으로 이전했다가 6.25때 또 손실됐다. 박정희 정권 때 복원이 추진됐는데 목조가 아닌 콘크리트로 급조해 중앙청(총독부 건물) 앞에 섰다. 그리고 김영삼 정부 때 중앙청을 허물면서 목조로 다시 복원이 이루어졌다. 

콘크리트가 절단된 상태로 부재가 남아있는데 이전에는 영화로웠던 상징들이 쓸모없게 버려진 것이 안타까웠고 겉은 전통의 단청이지만 그 뒤는 콘크리트인 이질적인 모습이 마치 80년대 내가 찍었던 서울의 혼재된 모습과 맞아떨어졌다. 이것도 한국의 한 모습이라고 생각하며 만들었다.

콘크리트 광화문 03-1, 2010,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100×75cm. (사진=서울시립미술관)
콘크리트 광화문 03-1, 2010,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100×75cm. (사진=서울시립미술관)

전시작들을 보니 굉장히 다양한 내용의 '시리즈'를 만들어냈다

내 시리즈는 언급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 많다. 나는 한 가지 하고 끝낸 후에 또 한 가지를 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서너가지를 동시다발로 한다. 나는 라디오 주파수 돌리듯 내 머리를 회전시키려 노력한다. 인체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도시에 주파수를 맞추는 식으로 내 삶을 꾸며왔다.

도시를 찍다가도 무엇인가를 발견하면 다음 작업에 쓸 수 있는 밑거름으로 깔아놓는다. 담을 수 있는 것은 많이 담는다. 마치 검색 사이트처럼 내가 찍은 정보들을 내 머리를 통해 바로바로 전할 수 있게 했다.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정보들이 내가 지금까지 '항해'를 계속한 요인인 것 같다.

작가님이 생각하는 '최고의 사진'은 무엇인지?

최고라는 건 사실 없다. 작품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각자 다 틀리기에 최고라는 말을 쉽게 쓸 수 없다고 본다. 단지 최선을 다하고 있을 뿐이다. 누구나 사진 한 장을 멋지게 찍을 수 있다. 그 한 장으로 작가의 가치를 매길 수는 없다고 본다. 살아왔던 시간도 봐야하고 어떤 시리즈를 발표하나, 어떤 태도를 가지고 오랜 기간 작업해왔는가, 시간이 흘러야하는 것이지 사진 몇 장만으로 최고의 사진을 논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것 같다. 

익명자 71, 2019,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25×19cm. (사진=서울시립미술관)
익명자 71, 2019,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25×19cm. (사진=서울시립미술관)

지금도 <익명자> 시리즈를 발표하고 있다. 앞으로 시리즈는 어떻게 전개될지?

몇 년 내에 시리즈를 끝내야할 것 같다. 그동안 관찰했던 나의 눈이었는데 어느 순간이 되면 매듭을 짓고 책을 내든 전시를 하든 완전히 끝을 내고 싶다.

앞으로 '구본창의 항해'는 어떻게 이어질까?

내가 얼마나 건강한 몸으로 똑바른 생각으로 작업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배에 실은 많은 것들을 어떻게든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지고 소진을 시켜야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많은 책, 자료, 작품 등을 살아있는 동안 잘 정리해서 좋은 본보기로 남기고 싶고 그것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골고루 다 베풀고 싶다. 건강이 허락하고 정신이 맑을 때 정리하는 것이 내 마지막 항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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