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외 단상] '칼국수'를 떠올리며 쓰고 싶은 두세가지 생각들
[내외 단상] '칼국수'를 떠올리며 쓰고 싶은 두세가지 생각들
  • 임동현 기자
  • 승인 2024.01.19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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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현 문화부 부장.
임동현 문화부 부장.

(내외방송=임동현 기자) '신한국 창조'를 내세우며 1992년 대선에서 승리한 故 김영삼 전 대통령. 그는 취임 후 금융실명제 실시, 하나회 척결 등 개혁 정책을 단행했고 이로 인해 그는 취임 초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다. 

당시 그의 개혁 정책과 더불어 문민정부를 상징했던 단어가 있었으니 바로 '칼국수'다. 취임 후 정부 각료들이 처음으로 청와대에 모인 날, 오찬의 메뉴가 칼국수였고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등 전직 대통령들을 청와대에 초청했을 때 내놓은 메뉴도 칼국수였다. 여야 영수회담, 여당 의원들 모임, 심지어 외국 귀빈이 방문했을 때도 칼국수가 나왔고 그가 주로 드나들던 칼국수집들은 '대통령의 단골집'임을 홍보하고 나섰다. 서민의 음식 칼국수가 정부의 청렴함과 개혁을 상징하는 음식으로 부상한 것이다. 

당시 청와대 요리사였던 이근배씨가 쓴 책 <청와대 요리사>에는 이런 일화가 나온다. 故 김수환 추기경이 청와대를 방문했을 때 김영삼 대통령에게 '우리 밀 살리기 운동에 동참하시는 게 어떤가'라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즉시 우리 밀로 칼국수를 만들라는 지시가 떨어졌는데 우리 밀은 수입 밀에 비해 글루텐 함량이 떨어지다보니 반죽이 뭉쳐지지 않아 요리사들이 병원 신세를 질 정도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조리팀은 인원이 적을 시에는 100% 우리 밀, 인원이 많으면 수입 밀을 조금씩 섞어서 청와대 칼국수를 내놓았다고 한다.

이렇게 창대하게 시작된 문민정부 김영삼 정권이었지만 끝은 미약하다 못해 처절했다. IMF 사태는 김영삼 정부의 몰락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그의 지지율이 추락하면서 동시에 칼국수의 위상도 추락했다. 청렴함과 개혁의 상징은 한순간에 '머리가 나빠지는 음식'이라는 비아냥을 듣는 신세가 됐다. 그렇게 문민정부도, 그리고 김영삼 전 대통령도 역사 속으로 사라져갔다.

"칼국수가 뭐지?" 1년 전, 그룹 뉴진스의 멤버 민지가 한 유튜브 방송에서 무심결에 내뱉은 혼잣말이다. 이 한 마디, 단 여섯 글자로 인해 아직 스무 살이 채 되지 않은 민지는 온갖 비난에 시달려야했다. '시간이 지나면 잠잠해지겠지'. 하지만 민지의 이 판단은 오판이 됐고 1년 만에 "제가 칼국수를 모르겠느냐"라며 심경을 털어놨더니 이번엔 '무례하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결국 민지는 "좋지 못한 태도를 보여드렸다"며 사과를 해야했다. 

'바로 사과를 했어야했다', '좀 더 어른스럽게 대처했어야했다', '엄청난 인기에는 엄청난 책임이 따른다'는 지적을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칼국수'를 가지고 1년을 물고 뜯은 이들을 비호할 근거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졸지에 '칼국수'는 한 어린 여가수의 트라우마가 됐고, 쓸데없는 논란의 대표가 되고 말았다. 마치 김영삼 정권 말기 '머리가 나빠지는 음식'이란 비아냥을 들었던 것처럼.

우리는 언제부턴가 비난에 익숙해졌다. 그리고 사과를 해도 잊기는 커녕 잘못을 다시 꺼내고 꺼내서 논란을 재생산시키려한다. 마치 그 비난의 당사자가 죽기를 바라는 모습이다. '칼국수가 뭐지?'라고 물었을 때 '응, 칼국수는 이런 음식이야', '야, 칼국수엔 이런 이야기가 있어, 옛날 청와대에서...' 등등으로 반응할 수 있는 여유가 이제는 사라진 것일까? 

사람의 실수를 감싸주는, 사람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아량과 지혜가 그리워지는 오늘이다. 마치 추운 겨울 따뜻한 칼국수 한 그릇이 그리운 것처럼.

'너도 올 봄엔 벌써 열 살이다. 어머니가 양푼 가득 칼국수를 퍼담으시며 말했다. 알아요 나도 이젠 병아리가 아니예요, 어머니. 그런데 웬 칼국수에 이렇게 많이 고춧가루를 치셨을까'. (기형도, '위험한 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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