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살인의 추억: 사코와 반제티 사례 보고서
사법살인의 추억: 사코와 반제티 사례 보고서
  • 박석윤 기자
  • 승인 2020.03.10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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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cco and Vanzetti

(내외방송=박석윤 기자) 역사가 시행착오를 통해 진보한다고 말한다면 역사의 희생자들에게는 너무 가혹한 말이 될지도 모르겠다. 상당한 수준의 민주주의를 이룩했다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에서도 여전히 동시대 우리 사회의 주요 이슈 중 하나가 사법개혁이라는 점은 사법에서 공정과 정의를 실현하는 일이 그만큼 어려운 문제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대한민국 사법의 흑역사를 얘기할 때, 군사 독재시절의 인혁당(인민혁명당) 사건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사실 현재의 민주주의체제에서도 사법의 인권침해는 부지기수로 발생한다. 특히 한 개인이 국가권력에 의해 소송을 당한다면 그 폐해는 상상하기 힘들 규모로 커질 수도 있다. 여기에 눈먼 언론까지 가세한다면 그것은 파쇼적 광기로 치달을 것이다. 이건 비단 우리나라만의 얘기가 아니다. 20세기 초 세계 일류국가 미국에서 벌어진 사법살해는 그러한 현상의 일단을 잘 보여준다.

옛날 옛적 미국에서

1927년 8월의 어느 월요일, 미국 매사추세츠주 교도소에서 두 명의 죄수가 전기의자에 앉았다. 가난한 이탈리아 이민자인 제화공 니콜라 사코(Nicola Sacco, 1891~1927)와 생선장수 바르톨로메오 반제티(Bartolomeo Vanzetti, 1888~1927)였다. 이들에 대한 사형집행이 임박했을 때부터 세계 곳곳에서는 다양한 반향이 일어났다. 파리에서는 미국 대사관 앞으로 몰려간 성난 군중 때문에 전차가 동원됐고, 요하네스버그에서는 성조기가 불에 탔으며,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동맹파업이 일어났다. 시드니, 도쿄, 런던, 로마, 부에노스아이레스, 아테네, 프라하의 거리에도 성난 군중들이 몰려나왔다.

“사코와 반제티가 살해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사람들은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뉴욕 월드’는 그 장면을 “군중들은 크게 울부짖었다. 수십 군데에서 여성들이 기절해 쓰러졌고, 어떤 이들은 옷을 찢고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사람들은 서로 기대고 흐느껴 울었다”고 묘사했다. ‘별 볼 일 없는’ 대우를 받던 제화공과 생선장수의 사형 소식에 전 세계가 이렇게까지 분노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적색공포의 시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19년이 되자 미국의 국내 상황은 좋지 않았다. 물가 상승과 빈부격차의 심화, 그리고 스페인 독감의 유행으로 60만명 이상이 희생되면서 민심도 흉흉했다. 1차 세계대전에 따른 결과로 연합국과 독일간에 협약된 베르사유 조약의 내용은 실질적으로 유럽 강대국들의 이해관계만이 반영된 것으로 미국에는 매우 실망스러운 결과였고, 이에 따라 구대륙의 전쟁에 휘말려 들어갔던 미국의 참전을 후회하는 목소리가 힘을 얻어갔다. 미국 사회는 급격하게 보수화되고, 과거의 고립주의(isolationism)로 회귀하고 있었다. 여기에 1917년에 발생했던 러시아 혁명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미국 국내에서 잇따른 폭탄테러 미수사건까지 터지면서 공산주의 확산에 대한 공포심은 더욱 증폭돼갔다.

사회주의 혁명의 파고는 이민을 통해 미국 사회 깊숙이까지 밀려들어왔다. 1919년에 시애틀을 시작으로 노동자들의 파업이 연달아 일어나자 미국 중산층 사이에서는 러시아식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두려움이 커졌고, 이에 대한 반동으로 국민들 사이에서는 외래적인 것을 배척하는 맹목적 애국주의(chauvinism)가 횡행하게 된다.

미국 사회에 사회주의 혁명과 무정부주의 이념이 급속히 퍼지자 위기감을 느낀 사회지도층과 중산층 사회를 중심으로 적색공포(Red Scare)로 불리는 반공운동이 일어났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1920년 1월 법무장관 미첼 파머는 훗날 ‘파머의 습격’이라고 불리는 급진주의자의 대량 체포사건을 주도했다. 그는 보안법을 적용해 3천명의 외국인을 체포하고, 556명의 급진주의자를 국외로 추방했다. 또, 범죄조직 단속법(Criminal Syndicalist Laws)이 주별로 제정돼 혁명을 선동하는 급진주의자들을 체포했다.

사코와 반제티의 수난극

미국 정부로서는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의 파급을 미리 차단하고, 전국적으로 확산일로에 있는 노동조합 운동과 반사회적 급진주의 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희생양이 필요했다. 1920년 4월 15일 매사추세츠주 사우스 브레인트리에서 구두공장 경리직원인 파민터와 경비원 베라르델리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두 사람은 공장 직원들의 급여를 보관하고 있던 책임자였는데, 그날 두 명의 남자가 침입해 경리직원과 경비를 살해하고, 1만 6천 달러를 강탈해갔다고 경찰이 밝혔다. 그리고 사건이 발생한 지 20일 후인 5월 5일 니콜라 사코와 바르톨로메오 반제티라는 두 이탈리아계 노동자가 이 사건의 용의자로 체포된다.

제화공인 사코와 생선장수인 반제티, 두 사람은 사실 살인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다만, 가난한 이탈리아 이민자 출신인 이들은 무정부주의에 심취해 있었고,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도 무정부주의자로서 참전을 거부했던 바 있다. 그런데 명백한 살인증거가 없음에도 1년여의 심리가 끝날 무렵 배심원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이들에게 유죄 평결을 내렸다.

유죄 평결이 내려졌다는 소문이 타전되자 사회주의자들과 무정부주의자들은 거세게 항의했다. 유죄 평결의 근거가 그들이 살인을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무정부주의자이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재판과정을 지켜본 방청객들도 두 사람에게서 살인을 저질렀다는 어떠한 용의점도 발견하지 못했다. 게다가 애초 사코와 반제티가 살인범이라고 주장하던 증인 또한 후에 자신의 증언이 잘못된 것을 인정하고 재심을 요청했다.

배반당한 아메리카의 꿈

이때부터 두 사람의 사건은 미국 내 사건에 머무르지 않고 국제적 관심사가 됐다. 세계의 진보주의자들은 곳곳에서 집회를 열고, 이 사건의 재심을 요구하면서 미국 정부에 강력한 항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진보 지식인들은 피고들이 급진주의 사상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기소된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버트란트 러셀, 앨버트 아인슈타인, 마리 퀴리, 이사도라 덩컨, 아나톨 프랑스 같은 저명인사들은 탄원서를 제출하고 구명운동에 나섰다.

재판이 잘못된 것이라는 확실한 반증이 그 뒤에 확인됐다.

1925년 셀레스티노 마데이로스라는 죄수가 ‘사코와 반제티’는 진짜 범인이 아니며, 진범은 ‘로드아일랜드’에 근거지가 있는 ‘조모렐리 갱단’이라고 증언한다. 사건 당시 두목인 조 모렐리와 또 다른 공범이 살인강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을 놀라게 한 파렴치한 일이 그 뒤에 일어난다. 1심 판사가 주 대법원에 상고돼 있던 이 사건에 대해 새롭게 확인된 증거를 바탕으로 재심을 요구했지만, 대법원은 재심을 기각해버린다. 1심 판사가 자신의 판결이 잘못됐다고 인정했는데도 이를 무시한 것이다.

매사추세츠 주지사 앨번 풀러는 독립조사위원회를 발족시켰는데, 이는 형식적인 조치에 불과했다. 1927년 8월 3일 두 사람에 대한 사면권을 거부한 주지사 풀러에 대해 조사위원회는 면죄부를 내렸다. 이로써 사코와 반제티, 두 사람에 대한 사형선고가 확정됐고, 사형이 임박하자 사형에 반대하는 운동이 전세계적으로 일어났다. 사코는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감옥 안에서 단식투쟁을 벌였고, 반제티는 『어느 프롤레타리아의 삶』이라는 책을 쓰며 자신들의 무죄를 항변했지만, 모두 허사였다.

주 정부는 반대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이들에 대한 사형을 신속하게 집행했다. 사코와 반제티는 마침내 8월 23일 살인범의 누명을 쓴 채 세상을 떠났다. 사코는 당시 33세, 반제티는 36세였다. 떠오르는 세계 일류 민주주의 국가 미국에서 벌어진 사법살인이었다.

매카시즘 광기의 예고

사코와 반제티에 대한 재판과정이 보여준 일련의 부조리함은 삼권분립의 현대 민주주의 체제라는 것이 얼마나 취약하고, 권력에 의해 쉽게 농락당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 사건이었다. 사회의 광기 앞에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인 사법의 안전장치는 작동하지 않았다.

재판은 또한 사상의 자유에 대한 유죄선고이기도 했다. 사코와 반제티는 가난한 이민자였고, 1차 세계대전 징병을 거부했으며, 무정부주의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법정에서 이들은 줄곧 혐의를 부인하면서도 당당하게 자신들의 무정부주의 신념을 옹호했다. 문제는 이들에게 공정한 재판을 받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중립에 서야 할 판사는 배심원들 앞에서 공공연하게 ‘애국주의’를 강조하고, 그들을 노골적으로 ‘무정부주의자 놈들’이라고 부르며, 유도신문을 자행해 일부러 피고인에 불리한 재판을 진행했다.

사건 당시 미국 행정·사법당국을 규탄하고 사코와 반제티에 대해 사면을 요구하는 여론이 비등해지자 앨번 풀러 매사추세츠 주지사는 사코와 반제티의 사면 여부를 로렌스 로웰 하버드대 총장, 새뮤얼 스트래튼 매사추세츠공대(MIT) 총장, 로버트 그랜트 판사 등에게 물었는데, 이들 세 사람 역시 사형선고를 옹호했다.

사코와 반제티를 사형에 처한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무정부주의 조직인 ‘그루포 아우토노모(Gruppo Autonomo)’ 소속이었으며, ‘크로나카 소베르시바(Cronaca Sovversiva)’라는 무정부 신문을 구독하고 글을 투고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한 사회가 광란의 도가니에 빠지면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나는 법이다. 극심한 불안과 공포는 한 사회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대중은 편견과 증오와 빠져 쉽게 우중(愚衆)으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당시 미국 사회가 보여준 완고한 확증편향이 그 시대만의 유산이었을까?

법무장관 미첼 파머가 주도한 급진주의자의 대량 체포사건인 1920년 ‘파머의 습격’에서 급진주의자 대량 체포를 현장에서 지휘한 파머의 보좌관이 바로 30년 후 연방수사국 국장으로 매카시즘 광기를 이끈 인물인 존 에드거 후버였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반성하지 않는 역사는 다시 반복된다.

사건의 반향과 재평가

사코와 반제티 사건은 1차 세계대전 직후 사회 혼란의 공포 속에서 급진주의자를 통제할 방법으로 희생양이 필요했던 미국 정부가 가난한 이탈리아 이민자 출신이자 무정부주의자인 사코와 반제티를 이용해 이들이 무죄임에도 사형을 선고한 미국 현대사의 치욕스러운 사건이었다. 그리고 50여년이 지난 후 1970년대가 돼서야 매사추세츠 주지사 마이클 듀카키스가 사코와 반제티의 신원을 복권했다. 이제는 한 이름처럼 늘 같이 붙어 다니는 사코와 반제티는 사후 그림과 소설, 시, 노래, 드라마, 연극, 오페라, 영화, 다큐멘터리 등으로 되살아나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민중의 고통과 슬픔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렸던 화가 벤 샨은 1931년~32년에 걸쳐 템페라 기법으로 그린 ‘사코와 반제티의 수난’ 연작 그림을 선보였다. 그는 연작을 통해 정치 재판의 희생자였던 사코와 반제티에 대한 동정을 표하고, 미국 사법계를 비판했다. 사코와 반제티의 죽음을 그린 유명한 그림에서 벤 샨은 관 앞에 서 있는 법관의 얼굴을 죽은 사코와 반제티와 같은 색으로 그려, 그들 또한 이미 죽은 존재임을 암시했다.

미국 포크송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우디 거스리는 노래 11곡을 수록한 앨범 ‘사코와 반제티의 발라드’를 발표해 그들의 죽음을 추모했고, 이탈리아의 줄리아노 몬탈도 감독이 1971년에 만든 영화 ‘사코와 반제티’는 새로운 세대에게 다시 한번 20세기의 비극을 환기시켰다. 이 영화의 시작과 함께 흐르는 주제곡 ‘사코와 반제티를 위한 발라드’와 반제티의 최후의 결기를 가사에 담은 엔딩곡 ‘Here’s To You’는 엔니오 모리꼬네가 작곡하고 존 바에즈가 작사해 직접 노래를 불렀으며, 오늘날까지 세계 곳곳에서 연주되고 있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브루스 왓슨이 30년에 걸쳐 당시 재판기록과 각종 언론보도를 뒤지고 생존자들을 인터뷰해 한 편의 다큐멘터리로 완성한 책 『사코와 반제티』는 20세기 미국에서 벌어진 마녀재판의 전모를 실증적으로 재현한 저작이다. 반제티가 사행 집행 전 ‘뉴욕 월드’와 진행했던 마지막 인터뷰에서는 그의 결연한 최후의 결기를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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