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대공황 위기에서  초강대국이 된 미국
경제 대공황 위기에서  초강대국이 된 미국
  • 정영훈 기자
  • 승인 2022.04.10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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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보이지 않는 손’의 늪
1931년 무료 급식소에 줄을 선 시카고의 남성 실업자들 (사진=위키백과)
1931년 무료 급식소에 줄을 선 시카고의 남성 실업자들 (사진=위키백과)

(내외방송=정영훈 기자) 코로나19로 인한 경제적 파장을 안정시키기 위한 양적완화정책이 종료돼 가는 시점에서 전 세계적인 공급망 충격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 회원국이 근 31년만에 가장 높은 물가 상승률로 몸살을 앓고 있다. 여기에 우크라이나 사태, 유가 상승과 미국 기준금리 인상 등 지구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한 치 앞을 제대로 예상하기 힘든 복합적인 위기에 한국 경제가 감당해야 할 충격도 만만치 않을 것이라 예상된다.

문제는 글로벌 공급망의 유기적인 상호의존성과 취약성에서 충격을 덜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부의 공평한 분배가 이뤄져야 한다. 미국은 1차 세계대전에서 전쟁 물자보급을 지원하면서 세계 신흥패권국으로 황금기를 맞게 되지만, 그 이전 투기성의 주식투자와 생산과잉현상으로 경제 대공황이 시작된다. 이때 뉴딜 정책을 시행하며 불황에서 점차 회복돼 갔으나 대공황을 종식하지는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대공황을 종식시킨 것은 전쟁이었다.

그럼에도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뉴딜 정책에 담겨진 ‘오블리스 노블리제’ 정신이다. 이때 시행된 정책들로 미국은 복지국가로서의 기틀을 마련하고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코로나19가 휩쓸고 간 지난 2년 동안 세계 각국이 양적완화정책을 시행하면서 유동성 버블이 커졌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경제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국가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흐름과는 맞닿아 있다. 

경제 대공황 이전에도 공황은 있었다
1776년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역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띠는 해로 기억되고 있다. 먼저 미국이 독립을 선언한 해이자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 출판됐던 해이기 때문이다. 국부론의 핵심은 시장에서 이른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작동되기 때문에 정부가 민간 경제활동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 경제의 자생적 발전에 필수적이라는 일종의 경제 자유방임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미국의 본격적인 산업화를 주도했던 것은 정부가 아니라 금융왕 JP 모건, 철강왕 앤드류 카네기, 석유왕 존 록펠러 등과 같은 산업자본가였다.

미국에서는 1929년 경제 대공황 이외에도 몇 번의 큰 공황이 있었다. 세계 최초의 경제 대공황으로 알려진 1837년 금융공황은 청나라가 아편금지법을 발표하자 영국이 대중 무역수지 악화를 염려해 미국산 면화 수입을 크게 줄인다고 발표하면서 미국 면화가격은 폭락하게 되고, 이는 면화농장의 연쇄 도산으로 이어진다. 이후 면화농장에 신용융자를 해준 미국 지방은행 1500여개의 도산으로 이어지면서 사상 초유의 전 세계적 금융위기가 발생한다. 이후 아편전쟁을 일으킨 영국이 난징조약에서 받은 배상금이 들어오면서 금융공황은 해결된다.

미국 서부 개척은 캘리포니아 금광 발굴로 이어지면서 몰려든 이민자들로 철도산업이 발전하게 된다. 때마침 면화가격이 반등하고 부족한 화폐를 대신해 금이 사용되면서 경기가 활발하게 돌아가지만, 이때 크림전쟁이 발생하면서 외국인 투자가 줄어들고, 이는 투자심리 위축으로 이어져 1857년 공황이 발생한다. 미국 정부는 영국 자본을 다시 불러들이기 위해 관세를 내리는 등 안간힘을 썼지만, 공황은 남북전쟁이 시작된 1861년에서야 완전히 끝났다. 1857년 공황은 인류가 경험한 최초의 국제적 공황이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1873년의 공황은 미국의 철도건설 붐이 자본을 무리하게 흡수함으로써 자본시장을 왜곡시킨 데서 일어났으며, 6월에 발생한 유럽 빈 증권거래소 주가폭락으로 시작돼 미국에 영향을 미쳤으며, 미국의 금융경색 위기는 다시 유럽 전체에 퍼졌다. 미국은 남북전쟁이 끝나면서 일기 시작한 철도·건설산업 붐으로 경제는 호황을 구가했다. 미국의 철도산업에 대한 외국인 투자자들의 투자도 이어졌는데, 수요 급증에 맞춰 공급이 제때 이뤄지지 않으면서 원가 폭등으로 이어졌다. 불황은 20여년 동안 지속돼 장기불황이라고도 한다. 

1907년 공황은 몬태나의 구리왕이라 불린 어거스터스 하인즈가 주식을 사재기하고 바로 매도해 차익거래를 하려 했던 것이 공황 발생의 계기였다. 주식 매집에 실패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은행 및 기업 파산, 대규모 실업과 예금 대량인출이 벌어지는 뱅크런이 일어나게 된다. 이 위기를 해결한 사람은 JP모건인데, 당시에는 중앙은행이 없었기에 신탁회사 회장들을 전부 불러모아 유동성을 확보하고 은행 시스템을 안정시켜 최악의 상황을 막았다. 이듬해 공황의 원인을 밝히기 위한 위원회가 설립되고 연방준비체계 탄생으로 이어지게 된다.

1929년부터 1933년까지 약 4년간 1300만~1500만명이 직업을 잃었으며,하우스 렌트비를 내지 못해 쫓겨난 시민들은 ‘후버빌즈(Hoovervilles·노숙자타운)’를 지어 생활했다
1929년부터 1933년까지 약 4년간 1300만~1500만명이 직업을 잃었으며,하우스 렌트비를 내지 못해 쫓겨난 시민들은 ‘후버빌즈(Hoovervilles·노숙자타운)’를 지어 생활했다

분배의 불평등이 불러온 경제 대공황
세계경제는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침체됐다가 1920년대 초반부터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특히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쟁 물자보급으로 큰 경제적 이득을 봤고, 전후복구자금을 대출해주면서 세계 최고의 채권국이 됐다. 전쟁 후 유럽은 재정상의 위기와 산업의 타격을 입은 반면, 미국은 세계금융의 중심지로 부상했고, 중공업의 비약적인 성장을 이뤘으며, 1923년부터 1929년까지 전례 없는 호황을 누렸다. 이 사이에 산업생산은 두 배로 늘었고 GDP는 40%가 증가할 정도였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유럽은 미국경제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고, 1924년 미국자본이 독일로 유입돼 독일경제를 회복시켰고, 이러한 흐름이 유럽 전체에 영향을 줘 경기상승을 이끌게 되면서 유럽을 포함한 세계경기가 호황을 맞게 된다. 미국경제의 호황은 주식시장도 팽창시켰다. 이렇게 호경기가 계속되자 세계경제의 심장이 된 뉴욕 월스트리트 증권거래소는 하루 같이 오르기만 하는 주식을 사러 온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1929년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번영의 꼭대기에 올라섰다.

하지만 1929년 미국 역사상 최대이자 최악의 경제공황(Great Depression)이 발발하면서 미국 자본주의는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이는 단순히 경제적 공황을 넘어서 미국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근간을 뒤흔들었던 심각한 위기였다. 이는 미국의 주식투자자들에게 엄청난 타격을 줬으며, 그 충격은 점차 실물경제 부문으로 파급됐다. 미국 뉴욕 주식시장 붕괴는 세계 경제가 얼마나 허약한지 보여주었다. 또 미국경제가 전 세계경제에서 차지하고 있는 큰 비중 때문에 이는 세계적인 경기침체로 발전했다. 

1929년 10월 24일과 29일 미국 월스트리트의 주가가 급작스럽게 폭락하면서 그 여파로 세계 대공황이 시작됐다. 어제까지만 해도 주식을 사지 못해 안달이던 사람들이 24일에는 팔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고, 29일 하루만에 43%나 내려간 주가는 이후 계속 하락해 11월에는 9월의 절반 이하로, 다음 해 7월에는 8분의 1수준으로 떨어졌다. 대공황 당시 미국의 GDP는 30~40%가 증발했으며, 독일 노동인구의 44%가 실업자가 됐다. 미국은 대공황 이후 3년간 시가총액의 88.88%가 증발했다.

투자가들은 주식을 팔아도 빚을 갚지 못해 파산했고, 돈을 회수하지 못한 은행은 부도를 내기 시작했으며, 사람들은 예금을 돌려받기 위해 은행으로 몰려가는 악순환이 되풀이되면서 부도난 은행이 5천여개, 9백만명의 저금통장이 휴짓조각이 됐으며, 파산한 기업이 수만개, 거리로 쫓겨난 실업자가 2500만명이나 됐다. 미국은 유럽에 투자했던 원금을 회수했고, 그로 인해 유럽의 시총이 기존의 4분의 1수준으로 토막 나게 됐다. 미국의 대공황이 전후 재건중이던 유럽에 치명상을 입힌 것이다.

여기서 주의 깊게 봐야 할 점은 1920년대 미국의 분배가 매우 불평등했다는 사실이다. 1929년에 1%의 부유층에게 국가 전체 부의 40%가 집중되는 등 부의 편중이 매우 심각했는데, 이는 1963년의 32.5%, 1983년의 41.8%보다 약 1.5배에서 두 배가량 되는 수치다. 경기가 호황기에 접어들면서 기업가들은 설비를 크게 확장한 결과, 1928년과 29년에는 소비가 생산을 따르지 못했으므로 재고가 늘면서 생산이 줄어들며 고용도 감소했다. 소비자들은 소득이 줄고 일자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씀씀이를 줄일 수밖에 없는 악순환이 되풀이된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1933년 긴급철도운송업에 서명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1933년 긴급철도운송업에 서명했다.

수정자본주의 받아들이며 위기 극복에 주력
미국의 불황은 곧 전 세계로 파급됐고, 불황이 본격화되자 미국은 유럽에 대한 투자를 대폭 축소했다. 허버트 후버 대통령이 대공황에 적절한 정책구현에 실패하자 미국 유권자들은 1932년 11월 선거에서 소외된 계층을 위한 새로운 처방(뉴딜)을 공약으로 내세운 프랭클린 루스벨트 후보에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다. 뉴딜 정책의 핵심은 정부가 경제에 적극 개입해 공공사업으로 유효수요를 창출함으로써 경기를 되살리는 것이었다. 기존 자유방임주의 경제정책에서 벗어나 정부가 경제활동에 적극 개입하는 수정자본주의 이론을 받아들인 것이다. 

케인스 경제학에서의 핵심내용은 유효수요의 결정요인을 분석하는 것으로, 정부가 공공사업을 일으켜 실업자를 고용하면 국민소득이 증가하게 되고, 국민소득이 증가하면 소비재 수요 증가로 이어지며, 수요가 늘어나면 생산설비를 늘이기 위한 투자가 고용이 늘어나 다시 소득 증가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당시 그의 주장은 공산주의자들이나 하는 이야기로 별반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자본주의 국가에 전폭적으로 수용되게 된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국내재건을 최우선과제로 삼아 경제의 모든 부문에 걸쳐 적극적으로 공황대책을 강구했다. 우선 전국의 모든 은행을 폐쇄한 뒤 긴급은행구호법을 통과시키고, 농업조정법과 전국산업부흥법 제정으로 농민과 노동자를 보호하는 데 주력했으며, 대규모 댐 건설 계획인 테네시 계곡 개발사업을 추진해 일자리 창출과 전력 공급을 해결했다. 이외에도 경제법과 자원보존단, 연방긴급구제법 등 수많은 정책이 시행됐는데, 1차 뉴딜의 핵심 법안들이 대법원에서 위헌 판정을 받아 폐기되는 일도 있었다. 

제2차 뉴딜은 위헌 판결을 받았던 정책들을 대체할 방법들을 마련했다. 농업조정법과 전국산업부흥법 대신 토양보전법과 경작지 배분법, 전국노동관계법을 제정했으며, 대규모 토목사업과 공공시설물 건축, 예술활동 원조, 역사보존 등의 영역에 예산을 배정했다. 2차 뉴딜의 핵심은 미국 역사상 최초로 노동자의 단체교섭권이 인정되었고, 노동조합의 활동이 합법화되고, 사회보장법으로 노인연금, 실업보험, 빈민보조금의 영역에 연방정부 차원의 대책을 마련할 수 있게 되면서 미국의 복지국가로서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이다. 

뉴딜 정책으로 미국은 서서히 불황을 극복해 갔으며, 루스벨트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대통령에 재선됐다. 뉴딜 정책은 한동안 성과를 보이면서 경제가 회복세를 보이다가 1937년에 들어 모든 경제지표가 하향곡선을 그렸고 1938년까지 뚜렷한 대책이 나오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대공황은 미국이 제2처 세계대전에 참전한 후 전시 경제체제가 구축되면서 종식된다. 뉴딜 정책은 사회주의적 경향 등으로 인해 저항을 받은 측면도 많지만, 국가가 국민 다수를 위한 개혁적인 정책을 시행했다는 점에서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뉴딜정책은 미국경제의 행위와 구조에 중요하고도 지속적인 영향을 줬다. 뉴딜정책은 연방정부의 규제기능을 늘리고 부실한 경제를 안정시키는 데 도움을 줬고, 사회보장 프로그램 실시로 현대 복지국가의 기초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광범위한 공공지출의 결과로 도로, 댐, 교량, 학교, 병원 등의 사회간접자본이 형성돼 국부의 기반이 됐다. 뉴딜정책은 미국경제 나아가서는 세계경제를 전통적 자본주의의 붕괴에서 구하고 고도산업사회로 이행케 하는 위대한 전기를 마련했다고 말할 수 있다

마셜플랜은 대성공이었다. 유럽의 산업과 농업생산이 회복됐고 재정이 안정됐다.
마셜플랜은 대성공이었다. 유럽의 산업과 농업생산이 회복됐고 재정이 안정됐다.

유럽 전후 재건 마셜 플랜으로 영향력 확대
뉴딜정책이 미국의 정치·경제에 미친 영향력은 엄청났지만, 뉴딜정책으로 인해 대공황을 극복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뉴딜정책으로 400만명의 실업자를 구제했지만, 아직 900만명의 실업자가 남아 있었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사상 유례가 없는 인력을 동원해 군수공장을 풀가동하면서 전 세계 군수물품 생산량의 41%를 생산하게 된다. 미국 군수산업이 급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대공황이 발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라 일자리가 없는 사람들을 비롯해 여성까지 동원하고 있었다.

1941년 미국은 ABCD 포위진(미국·영국·중국·네덜란드)을 형성하고, 일본에 대한 석유 수출을 중단했다. 경제적 압박을 당하게 된 일본은 1941년 12월 8일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하게 되면서 미국은 본격적인 참전을 하게 되고 연합군의 승리로 전쟁은 끝이 나게 된다. 사실 1차 세계대전까지만 해도 전 세계의 패권은 유럽에서 미국으로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까지 거치면서 유럽은 산업기반들이 붕괴되고 경제시스템이 마비되면서 패권이 미국과 소련 중심의 냉전체제가 고착화된다.

베트남전쟁은 미군이 패배한 사상 최초의 유일한 전쟁이었다. 1970년대 이후에는 서방 여러 나라 가운데 압도적으로 우위에 서 있던 미국의 경제도 ‘통화의 위기’와 ‘석유 위기’를 경험하면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게 됐다.
베트남전쟁은 미군이 패배한 사상 최초의 유일한 전쟁이었다. 1970년대 이후에는 서방 여러 나라 가운데 압도적으로 우위에 서 있던 미국의 경제도 ‘통화의 위기’와 ‘석유 위기’를 경험하면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게 됐다.

전후 미국은 동유럽을 차지한 소련이 서유럽에 영향력을 확대할 것을 우려한 가운데 1947년 6월 국무장관인 조지 마셜이 유럽의 경제 부흥이 시급함을 느끼게 됐고, 그러한 복구작업에 미국의 대대적인 경제 원조가 필요하다고 공식 표명했다. 이러한 미국의 경제 원조 제의에 대해 서부 유럽 국가들은 물론 동부 유럽 국가들까지도 즉각적으로 환영의 뜻을 표했다. 미국은 유럽 16개국에 대해 1억 달러를 지원함으로써 재정상태를 안정시키고, 국가들간의 협력을 증진시켜 달러 부족을 메꿨다. 

마셜 플랜은 매우 성공적으로 이뤄졌으며 몇몇 서유럽 국가들은 이 기간 동안에 국민총생산이 15~25%까지 증가했고, 다양한 산업분야가 아주 빠르게 회복됐다. 마셜 플랜은 반소·반공주의를 전제로 한 것이기도 했지만, 미국에도 큰 도움이 됐다. 원조액의 약 70%는 유럽 여러 나라가 미국의 잉여농산물과 그 생산품을 수입하는 데 쓰여졌으므로 결과적으로 미국의 수출시장을 확대시켰고, 서구 여러 나라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증가시킨 일면도 있다. 이는 향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설립으로 이어진다.

재건금융공사는 1932년 대공황 속에서 금융기관에 긴급자금을 제공하기 위해 설립됐다
재건금융공사는 1932년 대공황 속에서 금융기관에 긴급자금을 제공하기 위해 설립됐다

패권 도전받으며 최강국 지위 흔들리는 美
2차 세계대전 이후 50년대와 60년대는 미국이 경제 및 사회 모든 면에서 최고의 호황기를 구가하던 때로, 한마디로 풍요의 상징이었고, 전 세계는 미국의 원조만 바라보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때까지 미국은 노블리스 오블리제 문화가 강조되면서 경제 불평등에 대한 불만이 가장 낮았던 시기로 법인세가 90%대에 육박하던 시기였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만든 부의 공평한 분배라는 뉴딜의 질서는 신자유주의를 표방했던 레이건 정부에서 무너지고 점차 양극화가 심화되게 된다.

미국이 점차 힘을 잃기 시작한 것은 65년 시작된 베트남 전쟁으로, 미국은 이 전쟁에서 모든 국력을 쏟아붓고도 패전하면서 위신과 신뢰가 추락하기 시작했다. 60년대까지 유일 초강대국으로 재정적자를 거의 보지 않았는데, 이 전쟁으로 재정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된다. 이로써 달러화의 가치가 하락하고 70년대 오일쇼크로 인한 스태그플레이션이 시작되는 불황을 맞게 되는데, 8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 미국경제 불황을 극복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은 레이건의 경제개혁 추진 덕분이었다.

냉전체제는 40년간 지속됐지만, 이 갈등구조도 결국 1991년 소련의 붕괴와 함께 미국의 완전한 승리로 종결되고 말았다. 90년대와 2000년대 중반까지는 다시 호황이 이어졌지만, 경제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금리를 인하해 양적완화를 통해 위기를 극복하게 된다. 하지만 시중에 풀린 돈을 회수하기 위해 금리를 인상하자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서 리먼 사태로 이어지는 2008년 금융위기를 맞게 된다. 이후 미국은 13년 동안 자산을 사들여 돈을 뿌리는 양적완화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중국의 추적도 만만치 않다. 과거 트럼프 행정부에서 벌어졌던 미·중 무역갈등만 보더라도 미국의 다급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비록 경제전문매체 블룸버그가 12일(현지시간) 현재 성장 추세를 따르는 ‘기본 시나리오’에서는 중국이 2030년대 초반이면 미국을 제칠 수 있다고 봤으나, 2008년부터 급증한 부채가 발목을 잡을 수 있다면서 중국의 경제규모가 영영 미국을 따라잡지 못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과거 일본 역시 세계 최대 경제 대국 자리를 노린 바 있어 미국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

천조국의 위상을 자랑하는 군사력에서도 이미지 손상을 입고 있다. 베트남에 이어 아프카니스탄에서도 수없이 많은 인력과 자원을 쏟아부었지만, 전쟁을 마무리하지 못한 채 미국으로서는 자존심이 구겨진 전쟁이었다. 현재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해서 군사력 투입에는 신중하면서도 경제 제재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대처하는 것도 미국의 고심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우크라이나에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중국이 대만지역에 군사적 도발을 감행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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