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30년’ 일본의 버블경제
‘잃어버린 30년’ 일본의 버블경제
  • 김연식 기자
  • 승인 2022.05.01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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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 점심은 없다

(내외방송=김연식 기자) 올해 들어 일본 내에서 자국의 침몰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일본의 저명한 경제학자인 노구치 유키오 히토쓰바시대 명예교수는 1웕 6일 경제전문지 다이아몬드 온라인판에 기고해 최근 일본이 반세기 동안 유지해온 선진국 지위에서 탈락할 가능성을 경고했다. 이어 일본 유력 경제주간지 ‘슈칸 다이아몬드’의 스즈키 다카히사 부편집장은 15일자에 ‘일본을 버리기 시작한 부유층…몰락 일본을 덮친 7중고’라는 특집기사를 게재했다.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하듯 최근 엔화가치가 달러당 127엔까지 하락하면서 일본 정부와 통화당국에 비상이 걸렸다. 주요 선진국들이 금리 정상화에 나선 가운데 일본만 양적완화정책을 고집하는 건 일본의 버블경제와 아베노믹스, 더 나아가 플라자 합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양날의 칼’ 같은 엔저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일본의 모습은 어쩌면 우리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미래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패전국에서 안보의 전략지 요충지로
한때 동아시아 패권을 장악했던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국이 된 후 연합국 군 최고사령부가 도쿄에 설치되면서 1945년 8월부터 1952년 4월까지 일본을 통치하게 된다. 연합국 군 최고사령부는 전범국가인 일본이 다시는 회생하지 못하도록 하는 군사적 조치이자 일본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던 군국주의적 요소, 비민주적 요소를 제거하려는 의도로 설치됐다. 1946년 1월 천황의 인간선언을 통해 천황의 신격화를 부정했고, 11월에는 전쟁포기를 선언하는 평화헌법이 공표됨으로써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패전국으로 암울하던 일본에게 행운이 찾아온다. 2차 세계대전 후 냉전구조가 전개되고, 중국까지 공산화되면서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안보를 위협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은 공산주의를 막는 데 있어서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고, 미국은 당초 계획과는 달리 일본을 공산주의 세력의 확장을 막는 거점지로 활용하기 위해 피폐해진 일본 경제를 재건하는 방향으로 전환하게 된다. 하지만 산업육성 초반에는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일본 경제가 심각한 불황에 빠지게 된다.

미국 뉴욕 플라자 호텔
미국 뉴욕 플라자 호텔

한국전쟁으로 재기 성공하며 G2로 성장 

이때 다시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에게 행운이 찾아온다. 일본은 UN군의 병참기지 역할을 하면서 경제가 급속도로 회복하기 시작해 전쟁 전 수준을 회복한 동시에 경제성장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맞게 된다. 여기에 미국의 안보 지원으로 인해 일본은 경제발전에 국가예산을 전부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고도성장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1950년대부터 일본은 각종 산업에 설비투자를 늘리게 되고, 저환율을 통해 가격경쟁력을 확보하게 되면서 1968년에는 일본의 국민총생산이 서독을 따라잡으며 미국 다음의 자본주의 국가가 된다.

값싸고 질 좋은 일본 제품은 전 세계에 팔리면서 1차 오일쇼크 전까지 연평균 10%가 넘는 경제성장율을 기록한다. 이때 일본의 경기는 57개월간 지속될 만큼 상상을 초월했다. 일본은 경제 규모는 세계 2위였지만, 구미 열강보다 산업 구조는 취약한 상태였다. 섬유와 화학섬유 위주의 수출과 함께 자동차나 전자제품은 2류 조악품 취급을 받던 시절이었다. 이후 일본 정부의 지원으로 혼다, 도요타를 비롯해 마츠시타, 산요 등의 자동차, 가전기업이 하이테크 산업에 진입해 전 세계 1류 메이커로 자리 잡는다.

Great Inflation의 시대 저환율로 성장 주도
1971년 8월 15일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달러 금태환을 중지함으로써 미국은 원하는 만큼 자유롭게 달러를 찍어낼 수 있게 됐고, 이에 따른 화폐 가치 하락으로 전반적인 물가 상승이 발생했다. 1973년 4차 중동전쟁으로 인해 1차 오일쇼크가 벌어지면서 원유가격이 폭등하고 인플레이션이 일어나게 되면서 기준금리 인상과 재정지출을 억제하면서 일본의 고도성장에 제동을 걸었다. 

일본은 1945년부터 1971년 11월까지 1달러는 무조건 360엔, 1971년 12월부터 1973년 2월까지 308엔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후 닉슨 쇼크로 인해 변동환율제를 도입하면서 260엔까지 떨어지는 엔고현상이 나타나기도 했고, 1980년대 중반까지는 180엔까지 떨어지기도 했으나, 200~250엔 사이를 기록하며 안정세를 보였다. 이러한 저환율로 일본은 1960년대에는 10%, 1970년대에는 5%, 1980년대에는 4%에 달하는 경제성장을 이룩하게 된다.

1980년대 초에 오일쇼크로 미국은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금리를 인상하게 되고, 일본은 원가 절감과 생산성 향상, 엔의 가치를 인위적으로 낮춰 국제적인 경쟁력이 더욱 높아지게 된다. 엔저의 덕으로 수출은 점점 더 확대돼 가고 일본의 경제는 호황을 맞게 됐다. 일본의 수출은 급상승하면서 10조엔 이상의 무역흑자를 기록하기도 한다. 1980년대 이후 글로벌 경기가 살아나면서 일본의 세계시장 점유율이 10%를 상회했으며, 세계 10대 반도체 기업 중 6개가 일본기업이 차지할 정도로 성장하게 된다.

플라자 합의 당시 모습 (출처=위키피디아)
플라자 합의 당시 모습 (출처=위키피디아)

미국 경제위기 틈타 부상하는 서독과 일본
금본위제 붕괴와 닉슨 쇼크, 오일 쇼크 등으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있었는데, 미국은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폴 볼커를 연준의장으로 임명한다. 폴 볼커는 물가를 잡기 위해 금리를 인상하기 시작했고, 기준금리가 20%에 육박하면서 스태그플레이션을 극복했다. 하지만 높은 이자를 감당하지 못한 미국 내 중소기업의 40% 이상이 파산했고, 제품 수요급감과 가격 하락현상으로 물가는 잡혔지만, 달러 강세가 유지되면서 1985년까지 달러의 가치가 50%나 절상되게 된다.

이 틈을 타 미국에 수출을 늘리며 좋은 시절을 보낸 제조업 위주 국가들이 있었는데, 그 대표주자가 바로 서독과 일본이었다. 서독과 일본은 달러 강세로 인해 상대적으로 저렴해진 자국산 제품을 전 세계시장에 팔기 시작하면서 급부상하고 있었다. 당시 미국은 재정적자와 무역적자가 심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무역 불균형과 달러 강세를 해소하고자 보호무역과 수입장벽 조치를 취하게 된다. 서독과 일본의 입장에서는 미국이 가장 큰 시장이었기 때문에 미국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다.

미쓰비시 갤랑 GTO(1970년)
미쓰비시 갤랑 GTO(1970년)

플라자 합의로 가격경쟁력과 경제성장률 떨어져
결국 1985년 9월 22일 뉴욕 플라자 호텔에서 G5(독일, 미국, 영국, 일본, 프랑스) 재무부장관과 중앙은행 총재가 이른바 ‘플라자 합의’를 하기에 이른다. 플라자 합의를 통해 미국의 달러 가치는 내린 반면, 일본 엔화와 독일 마르크화의 통화가치를 높였다. 보호무역 대신 엔화와 마르크화의 통화가치가 절상되면 달러는 상대적으로 인하되는 효과로 얻게 되며, 그만큼 재정적자도 줄어들게 되고, 미국 기업들의 수출 증가로 무역적자로 해소될 수 있게 되는 셈이다. 

플라자 합의에 따라 독일의 마르크화는 1주일만에 약 7%, 일본의 엔화는 약 8% 평가절상됐고, 달러 가치는 계속 떨어져 2년 후에는 약 30% 이상 평가절하됐다. 회담 직후 환율은 달러당 240엔이었는데, 1987년 말에는 달러당 120엔 정도로 떨어졌다. 미국인의 입장에서 싸고 저렴했던 일본산 제품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엔화가치가 상승하면서 일본제품의 가격경쟁력이 크게 낮아지고 수출이 감소하면서 일본의 경제성장률이 1985년 4.4%에서 1986년에는 2.9%로 떨어지게 됐다.

소니 워크맨
소니 워크맨

엔화 강세로 주식과 부동산 버블 본격화
수출로 인한 성장이 막힌 상황에서 경기 악화를 막기 위해 일본 중앙은행은 정책금리를 인하하기 시작해 1987년에는 2.5%까지 내리게 된다. 엔화가 절상되다 보니 환차익을 노리는 외국인 투자자가 유입되면서 주가는 상승하게 되고, 기업들은 주식과 채권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게 된다. 기업자금을 융자하던 은행들은 가계를 대상으로 저금리 부동산담보대출을 확대하게 되면서 은행간 대출경쟁이 심해진다. 이 시기 부동산 불패신화라는 인식이 강하게 자리 잡으면서 개인뿐만 아니라 기업까지 부동산 투자에 동참하게 된다.

유동성은 주식과 부동산의 가격을 1986년에서 1989년까지 매년 20~30%씩 폭등하고, 낮은 금리로 부동산 감정가 대비 200%까지도 대출을 해줬다. 대도시의 부동산 가격이 치솟자 내 집 마련을 못 한 실수요자들은 근교지역으로 밀려나면서 서민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게 된다. 일본 중앙은행은 금리를 인상했다가 경기가 침체되면 비판을 받으므로 섣불리 금리를 인상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던 1987년 블랙먼데이가 발생하면서 미국은 금리 인하를 선언하고, 전 세계가 금리인하 공조를 하는 상황에서 일본은 금리인상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동경의 땅을 팔면 미국을 다 살 수 있다
금리를 인상하지 못하게 되면서 금융시장과 부동산시장에 자금이 본격적으로 쏠리기 시작한다. 엔화 절상으로 수입제품의 가격은 저렴해져 소비심리가 증폭됐고, 달러 환전시 차액을 노리는 효과가 있었으며, 주식이나 집값이 계속 오르면 자산이 늘어나 돈을 쓸 수밖에 없었다. 1989년 말 닛케이 일본 주가 지수는 4년 전 12000에서 39000까지 세 배가 올랐고, 세계 50대 기업에 일본 기업이 70%를 차지할 정도였다. 오죽하면 당시 20대 초봉 1천만엔(1억원), 면접수당 1만 5000엔(15만원), 고등학생 세뱃돈 30만엔(300만원)일 정도였다.

당시 미쓰비시는 미국의 록펠러 센터, 파나소닉은 유니버셜 픽처스, 소니는 콜럼비아 픽처스, 미쓰이 물산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사들이는 한편, 인터넷 산업, 반도체 산업 같은 고부가가치 산업에서도 미국을 바짝 따라잡고 있었다. 이 시기에 일본인들의 엔화의 가치가 높아지다 보니 일본인들의 해외여행과 외국의 부동산 매입이 부쩍 증가하게 된다. 이와 같은 호황기가 이어지자 일본이 미국을 따라잡을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오면서 미국은 1989년부터 일본을 강하게 견제하기 시작한다.

일본 중앙은행인 일본은행 (출처=위키피디아)
일본 중앙은행인 일본은행 (출처=위키피디아)

일본 중앙은행의 버블 연착륙 실패
엔고와 저유가로 일본 물가 상승압력이 약하다는 이유로 일본 중앙은행은 통화정책 정상화 타이밍을 놓치게 되고, 2년 사이 버블은 더 커지게 된다. 버블이 심해진 만큼 물가가 오르기 시작하자 일본 중앙은행은 소비세를 도입하고 정책금리를 인상하기 시작해 6.0%까지 인상하게 되고, 이는 대출금리 인상과 주가 하락으로 이어졌다. 니케이225는 1989년도 12월 38915로 정점을 찍은 후 금리 인상이 본격화하면서 1990년도 10월에는 2만선 아래로 떨어지게 된다.

이 와중에 부동산은 투기심리가 더 자극돼 더 많은 자금이 흘러들어왔고, 1991년에서야 하락하기 시작한다. 1990년 3월부터 부동산 규제가 시작되면서 1991년에 ‘부동산대출 총량규제’(신규대출 전면금지)와 기존대출도 LTV(Loan-To-Vlaue: 감정가대비 대출금액)를 무려 200%→70%로 제한했다. 정책금리가 급하게 오른 만큼 대출금리가 부담스러워지면서 매물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부동산 시장은 패닉에 빠졌다. 상업용 부동산은 고점 대비 83%나 빠졌고, 아파트도 50% 이상 빠지면서 일본 경제가 패닉상태에 빠지기 시작한다. 

역플라자 합의와 제로금리 시대 개막
주식과 부동산 등 자산시장이 폭락하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 정부는 대대적인 경기부양책으로 인프라 투자를 시작하는데, 그동안 웬만한 지역에 인프라 투자가 진행됐기 때문에 이 정책은 큰 효과를 보지 못한다. 그래도 1994년 경기가 회복세를 보이면서 1995년 금리를 0.5%까지 인하하지만, 부동산과 금융시장의 가격 상승효과가 나타나지 않으면서 상황은 악화되고, 여기에 고베 대지진까지 겹치게 된다. 잇단 악재에 일본은 1995년 4월 G7 정상회담에서 엔화 약세를 요구하게 되는데, 이 합의가 역플라자 합의다.

역플라자 합의 이후 엔화 약세로 수출이 증가하지만 일본 경기는 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 하시모토 내각의 실정이 더해지면서 1998년부터 대기업과 대형금융사까지 견뎌내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만다. 자산가격이 한번 붕괴하기 시작하자 소비시장이 줄어들면서 내수시장이 정체돼 기업들의 불황이 장기적으로 이어지게 됐다. 일본은 1999년부터 무려 5년 동안 양적완화정책으로 전환하며 파산위기를 겪었던 은행들을 회생시키고자 제로금리를 실시하게 된다.

이후 일본 경제는 2000년부터 회복세를 보이지만, 기준금리를 0.24%로 인상하면서 다시 경기가 나빠지게 되고, 2000년 말 정부부채가 100%가 넘어서면서 재정건전성 문제가 대두되게 된다. 이에 고이즈미 내각은 불량채권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많은 기업이 도산하게 되고, 대량 실업자가 발생하는 등 경기침체를 겪게 된다. 전 세계가 저성장 기조에 접어든 마당에 유럽재정위기와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발생하면서 일본의 민간수요는 크게 위축되고 장기 침체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베 총리
아베 총리

윤전기를 돌려서라도 돈을 찍어내겠다
2012년 제2차 아베 내각이 출범하면서 아베노믹스가 시작된다. 아베 총리는 총선 전부터 “일본은행의 윤전기를 돌려서라도 무제한으로 돈을 찍어내겠다”며 20년 동안 이어지는 디플레이션 불황에서 탈출해 성장을 도모하겠다고 밝혔다. 쉽게 이야기해서 엔화를 마구 푸는 것이 아베노믹스의 핵심적인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베노믹스는 ‘탈 디플레이션’을 위한 경제정책의 통칭으로 양적완화와 재정지출 확대로 디플레이션을 탈피하고 공격적인 성장전략으로 장기적인 성장률을 높인다는 전략이다.

아베노믹스는 양적완화를 통해 유동성을 공급해 경기를 살리고, 엔화의 가치를 떨어뜨리게 되면 세계시장에서 일본제품의 가격경쟁력은 올라가게 돼 수출이 더 늘어나게 되고, 수출이 늘어나게 되면 고용이 늘어날 수밖에 없으며, 고용으로 소비와 투자가 증가하면 물가도 상승하게 될 것이라는 게 핵심이다. 아베 내각은 모두 4차례의 경제 대책을 통해 25.4조엔의 추경예산을 국가재정으로 추가 투입했다. 이같은 재정확대 정책으로 대규모 재정적자가 지속되고 있다. OECD는 일본의 GDP 대비 총부채 비중을 234%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다.

아베노믹스 실패로 ‘잃어버린 30년’
그 결과 일본의 경기가 살아나는 효과가 나타났다. 일본 기업의 수출은 늘었고, 오랜만의 호황에 일본 기업들은 반색했으며, 일본 주식시장의 주가도 상승했다. 8000선까지 하락했던 닛케이 지수가 2015년 20000선까지 회복하고, 엔 환율도 2011년 75엔에서 120엔 수준까지 상승하게 된다. 하지만 일본은 디플레이션에서 탈출하지 못했다. 엔화 약세엔 성공했지만, 일본 기업의 수출은 큰 변화를 보이지 않고 엔 표시 수출액이 증가했을 뿐이다. 그 사이 ‘잃어버린 20년’은 ‘잃어버린 30년’으로 바뀌었다.

아베노믹스 이전 시기에 일본의 1인당 GDP는 미국과 큰 차이가 없었지만, 지금은 큰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2020년 기준 일본은 4만 146달러를 기록한 반면 한국은 3만 1496달러를 기록하고 있다. 일본이 정체기에 접어든 30년간 한국이 그만큼 빠른 속도로 따라잡고 있는 것이다. 2000년부터 2020년까지 일본의 명목 1인당 GDP는 1.02배 증가했지만, 한국은 2.56배 증가했다. 한국의 1인당 GDP는 2000년 일본의 31.3%에서 2020년 78%에 육박할 정도를 기록하고 있다.

‘선진국’ 지위마저 흔들리는 일본
일본은 1970년대부터 50년간 1인당 GDP에서 OECD보다 높은 수준을 유지하며 선진국 지위를 지켜왔다. 하지만 2000년 이후 일본의 영향력이 계속 떨어지기 시작해 2020년에는 OECD 평균보다 밑도는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일본의 소비는 늘지 않고 오히려 국가채무에 대한 이자 지출과 고령화로 인한 소비력 감소 등으로 빚은 빚대로 늘어나고, 일본 경제는 살아나지 않는 악순환으로 마무리돼 가고 있다. 도쿄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통해 경제 도약의 계기로 삼으려 했지만, 이마저도 코로나19 팬데믹에 물거품이 되어가고 있다. 

최근에는 10년 내 일본의 1인당 GDP가 OECD 평균 이하로 떨어질 것이라는 전망치도 나오고 있는데, 일본의 저명한 경제학자인 노구치 유키오 히토쓰바시대 명예교수는 최근 격주간 경제전문지 다이아몬드 온라인판에 기고한 글에서 일본이 반세기 동안 유지해온 선진국 지위에서 탈락할 가능성을 경고했다. 대장성(현 재무성) 관료 출신인 노구치 명예교수는 “일본이 선진국 탈락을 목전에 두고 있다”며 일본의 1인당 GDP가 OECD 회원국 평균 밑으로 떨어졌고 앞으로 더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근거로 들었다. 

달러당 150엔까지 폭락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이를 반영하듯 최근 미 연준에서 공격적인 통화 긴축에 나선 가운데 오히려 일본에서는 통화 완화기조를 내세우며 양국간 금리차가 확대되고 있어 엔·달러 환율이 6년만에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다. 그럼에도 일본 정부는 저금리 기조를 고수하고 있어 엔화의 가치하락은 더 이어질 전망이다. 일본 중앙은행은 3월 29일부터 31일까지 10년물 국채를 0.25% 금리에 무제한으로 매입하는 ‘연속 지정가 매입 오퍼레이션’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금융완화정책을 이어가겠다는 굳은 의지를 내비친 것으로 해석된다.

최근 엔저현상은 크게 미·일 금리차 확대, 아베노믹스 부작용에 따른 엔의 기저적인 회복력 약화에 기인한다. 지난 1월 일본의 경상수지 적자는 1조 1887억엔으로 역대 2위를 기록했다. 통상 경상수지가 적자를 기록하면 기업 등은 대금 지급을 위해 엔화를 팔고 달러를 매입해야 한다. 이로 인해 엔화 가치는 더욱 하락하고, 수입물가는 상승하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엔화가치의 회복력이 급속도로 떨어지면서 안전자산으로서 지위도 흔들리고 있다. 이미 시장에서는 달러당 150엔까지 엔화가치가 폭락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일본 부유층, 일본을 버리고 있다’
건국대학교 경제학과 최배근 교수는 30일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해 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해 기축통화인 달러가 강세를 보이고 있는데, 엔화만 홀로 추락하고 있는 것을 지적했다. 엔화가치가 떨어져도 수출은 많이 증가하지 않으면서 수입은 크게 증가해 아베정권 8년 중 6년이 무역적자를 기록했고,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내수가 계속 줄어드니까 수출에 목을 맬 수밖에 없는데, 엔화가치를 떨어뜨리니까 인플레이션과 수입물가가 크게 증가하는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최근 각 국가들이 금리를 인상하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의 낮은 국채를 사려고 하지 않고 GDP 대비 260%가 넘는 국채에 대한 이자 부담이 증가하면서 진퇴양난에 빠져 있다고 진단했다. 여기에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수입 물가가 올라가자 기업들이 상품 가격에 인건비를 전가시키면서 2020년보다 임금이 줄어들어 가계 소비가 위축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현재 엔화 기준으로 직장인의 평균 월급은 1994년 수준을 기록하면서 일본에서는 최근 부유층들이 엔화로는 자산가치가 하락하니까 일본을 버리고 있다는 기사가 나오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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