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105주년 기획 인터뷰]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자 '과거와 미래의 대화'"
[3.1절 105주년 기획 인터뷰]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자 '과거와 미래의 대화'"
  • 임동현 기자
  • 승인 2024.02.24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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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식 박사에게 듣는 전남 영광의 역사, 항일 여성 독립운동가 발굴 노력
정원식 박사. (사진=정원식 제공)
정원식 박사. (사진=정원식 제공)

(내외방송=임동현 기자) 전라남도 영광. 이 곳을 이야기하면 우리는 '영광굴비'를 먼저 떠올리게 되지만 이 곳은 불교, 원불교, 천주교, 기독교 등 4대 종교의 중요한 역사가 담긴 곳이자 일제 시대 의병운동의 중심지, 전라도 군 단위 최초로 3.1 만세운동이 전개된 곳이다.

(사)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는 정원식 박사. 그는 알려지지 않은 항일 여성 독립운동가를 발굴하고 알리고 있으며 고향인 전남 영광의 역사를 전하며 영광을 '한국 역사가 담긴 지역'으로 인식시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3.1운동 제105주년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내외방송은 정원식 박사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항일여성독립운동 강사 양성과정'에서 열띤 강의를 하고 있는 정원식 박사. (사진=정원식 제공)
'항일여성독립운동 강사 양성과정'에서 열띤 강의를 하고 있는 정원식 박사. (사진=정원식 제공)

3.1절 제105주년을 기념해 고향인 전남 영광군에서 열리는 '인문학역사 강연 콘서트'에 강연자로서 특별초청됐다고 들었다. 그 이야기부터 먼저 듣고 싶다

돌담시인학교 주최로 오는 27일 저녁 6시 30분에 고향인 전남 영광군에 소재한 영광예술의전당 대공연장(500석 규모)에서 '2024년 3.1운동 제105주년 기념 인문학역사 강연 콘서트'를 개최한다. 그 콘서트에 특별초청되어 ‘대한제국 패망과 영광(靈光)의 3.1운동’이라는 제목으로 역사강연을 한다.

강연의 주요 내용은

1919년 3.1운동이 한반도 전역에서 일어나게 된 것은 대한제국 패망에서 비롯됐다. 대한제국이 패망하게 된 원인과 배경을 내재적 요인에서 보면 국왕 고종 황제로부터 말단 관리까지 부정과 부패로 인한 국가기강 와해로 정리될 수 있으며, 외재적 요인에서 보면 대한제국이 일본 제국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국제정치 구도에서 철저히 고립되어 결국 싸움 한 번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1910년 8월 22일 국가 주권을 일본 제국에게 빼앗기는 세계사적으로 유래가 없는 대민족적 수난을 당했다. 

이러한 국가패망이라는 민중의 울분은 9년이 지난 1919년 3.1운동으로 표출됐고 보름쯤 지나 우리 영광 지역에서도 뜻있는 선각자들이 영광향교에서 3.1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영광지역 3.1운동은 일찍부터 교육운동을 통해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있던 교사 위계후와 조철현, 류일 등 서울 등지의 유학생들이 주축이 되었다. 

특히 영광지역이 전라도 군(郡) 단위에서 최초로 3.1만세운동이 전개된 배경에는 대마면 출신 김용구 의병장이 1905년 을사보호조약 이후 1907년 고종황제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을 이유로 의병활동을 적극 전개했던 영향도 한몫 했다. 이후 3.1운동을 계기로 영광체육단 사건 등 여러 많은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우리 영광 지역이 의병운동의 중심지이자, 3.1만세운동도 광주 다음으로 전라도 군 단위에서 최초로 선도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항일운동을 한 여성 독립운동가를 재발견하는 작업을 하고 계신데

제가 중국 북경(北京)대학교에서 국제정치학 석사와 국제관계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유학 당시 유학생 회장(2010년)을 맡으면서 약산 김원봉 장군이 의열단 단원들을 주축으로 확장하여 1938년 10월 10일 중국 우한에서 창립한 중국 관내 최초의 항일무장단체인 조선의용대와 중국 인민해방군의 전신이었던 팔로군과 연합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던 중국 하북성 한단시 타이항산(太行山)일대인 십자령과 석문촌 등 중국 대학원 학생들과 함께 재중국한국유생사 최초로 공동 탐방했다. 한중 간 민간 우호의 상징이었다. 

그 후로 탐방을 네 번 정도 했다. 방학 때가 되면 만주(동북3성) 일대와 상해-남경-북경 등 항일 유적지를 답사했고 이 내용을 중심으로 <타이항산 아리랑>(차이나하우스 출판)이란 책을 출간했다. 이러한 항일독립투쟁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연구가 지난해 2월 (사)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산하 연구소의 소장으로 발탁되는 계기가 되었다. 

지난 2022년 기준으로 남성 독립운동가는 1만 1,719명이 알려진 반면, 여성은 616명으로 남성의 3% 정도에 불과하다. 주로 남성 중심의 조명으로 인해 여성 항일운동가들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빛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남성에 가려져서 조명받지 못한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집중적으로 발굴하고 찾아내서 국가서훈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과 그분들에 정신을 후손들에게 계승 발전시킬 수 있도록 널리 선양하는 일도 우리 기념사업회 연구소의 역할이다. 

지난해에는 서울과 경기도 수원을 중심으로 초중고 방과후 교육 때 여성독립운동가를 집중교육하는 교사양성과정을 개설했는데 많은 분들이 관심과 과정에 참여해 주셔서 감사했다. 이분들이야말로 오늘날의 '독립군'이라 생각한다.

역사를 보는 박사님의 관점이 궁금하다

어떤 분야와 지역을 다루든, 역사연구의 최종 목표는 한 시대, 한 지역에 대한 전체적인 '시대상'을 파악하는 것이다. 이렇게 파악된 시대상은 그 연장으로서의 현재를 이해하는 시각이 되어야함은 물론, 미래를 향한 현재의 실용에 맞춘 행동들의 출발점이 되어야한다.

또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일 뿐만 아니라 '과거와 미래의 대화'가 되어야한다. 단재 신채호 선생께서 "과거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는 명구를 남기셨는데 민족적인 차원에서 보면 일제 식민지 시기에 역사의 본질을 정확하게 통찰했다고 할 수 있다. 

(사진=정원식 제공)
(사진=정원식 제공)

이제 '전남 영광' 이야기로 넘어가보자. 전남 영광군을 소개하자면

많은 분들이 전남 영광(靈光)이라고 하면 '영광굴비'를 떠올리겠지만 그 외에도 문화 콘텐츠가 상당히 많다. 특히 영광은 백제 불교가 최초로 도래한 성지이자, 원불교의 성지이며 기독교와 천주교 순교지이기도 하다. 일명 4대 종교 성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성리학을 전파시킨 수은 강항 선생의 출생지가 바로 영광이다. '종교가 집합된 곳'이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문화 콘텐츠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인데 아직 잘 활용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쉽다.

영광 인구가 5만 1,000명 정도 되는데 그 중에 68%가 농업에 종사하며 영광 한빛원자력발전소도 있다. 1호기부터 6호기까지 설치되어 있다. 어떻게 보면 '신령한 빛', 말 그대로 영광(靈光)인 거다. 지명과 딱 맞다. 백제 시대에는 '무시이군(武尸伊君)'이라는 명칭이었다가 신라 경덕왕(757년) 때 '무령군'으로 바뀌고 이후 940년 고려 태조 왕건 때 '영광군'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우선 우리에게 익숙한 영광굴비 이야기부터 해보자. 영광굴비가 유명한 이유는?

고려 인종 때 이자겸이 난을 일으켰다가 실패해서 영광 법성포로 유배를 왔는데 거기서 원주민들이 굴비를 만드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다. 굴비는 조기를 잡아 건조를 시켜서 만든 건데 칠산 앞바다가 바로 조기가 부화할 수 있는 조건이 되는 곳이었다. 그렇게 만든 굴비를 이자겸이 먹어보니 맛이 있던 거다. 이자겸이 인종의 사위였는데 굴비를 임금에게 진상하면서 '자신은 국가에 대역죄를 짓고 유배를 가지만 비굴하게는 살지 않겠다'고 쓴 상소문을 올리니 인종이 이를 보고 조기를 말린 것을 '비굴(非屈)'을 거꾸로 한 '굴비'로 명명하라고 했다. 비굴하게 살지 않겠다는 의미를 담아 비굴(非屈)을 굴비(屈非)로 바꾼 것으로 전해진다.

이 굴비가 매년 왕에게 진상이 됐고 조선시대에도 왕조만 바뀌었을 뿐 굴비가 계속 진상이 되면서 전국적으로 유명해지게 됐다. 정말 700, 800년을 사랑받았고 한때 1년에 4,000억~5,000억원 정도의 수입을 올릴 정도였는데 세대가 바뀌고 입맛이 변화하다 보니 점점 매출액이 떨어지고 있다. 

지금은 굴비와 더불어 '모싯잎송편'이 유명하다. 모시를 수확해 송편으로 만든 것인데 이건 약 15~20년 정도 됐다. 

앞에서 '4대 종교의 성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했는데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린다

서기 384년에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가 중국 동진을 거쳐 이곳 영광의 법성포와 구수리 일대로 왔는데 사실은 배가 표류를 해서 이곳에 온 것이라고 한다. 이때 마라난타가 아미타불 불상을 모시고 왔으며 이후에 불갑사를 세워 인도불교를 직접 전래했다. 고구려와 신라의 불교는 중국을 통해 들어왔지만, 백제불교는 인도불교를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이다. 법성포(法聖浦)는 ‘성인이 불법을 전래한 성스러운 포구’라는 뜻으로 '법성(法聖)' 그 자체가 바로 불교 용어에서 기원한다. 원불교는 소태산 박중빈이 창시한 종교인데 소태산 대종사가 탄생한 성지와 교화의 장을 연 성지가 있다. 일제시대 간척지를 통해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해주면서 주민들의 큰 호응을 얻기도 했다.

또 6.25 한국전쟁때 영광군의 교회에서 인민군이 집단으로 주민들을 매장, 학살했는데 그 순교지가 있고 조선시대 기해박해 때 천주교도들이 순교를 한 곳이 또 이곳 영광이다. 도래의 성지, 탄생의 성지, 순교의 성지, 영광이다. 여기에 일본에 성리학이 전파된 뿌리가 영광에 있으니, 그야말로 전파의 성지까지, 정말로 우리 5,000년 역사가 다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박사님도 영광에서 태어나 영광의 발전을 위해 애쓰고 계시다. '영광의 매력'은 무엇일까?

바다와 섬이 있고 산이 있고 들판이 있다. 바다와 내륙이 함께 있다. 그래서 자원이 풍부하다. 영광은 '옥당골'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데 중앙관료로 진출하게 될 성균관 자제들을 2~3년 간 인턴교육을 시켰던 곳이다. 귀한 자제들이 교육을 받고 '옥당(玉堂)', 빛나는 집이라는 이름을 붙일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다.

앞으로 영광의 문화산업 발전이 가장 큰 숙제가 되리라고 보는데

4대 종교지, 섬과 바다와 산, 들판, 평야가 어우러진 자연환경이 문화산업의 인프라라고 볼 수 있다. 천해의 자연환경과 오랜 역사가 전하는 이야기를 잘 조합시켜 관광객들이 머무를 수 있는 곳으로 변해야 한다고 본다. 지금까지는 외지 관광객들이 보고 스쳐지나간 곳이었지만 이제 더 나아가 머물면서 관광하고 즐기는 테마 공원이나 스토리를 만들어 영광이 굴비, 모시송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백제불교 도래지 순례길 개설과 천년고을 영광 지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박물관과 전국과 전세계도 없는 종교 박물관 건립 등 역사와 자연이 살아 숨쉬는, 전남 영광지역에서 1박, 2박을 하는 관광지로 가야할 것으로 본다. 

이를 특히 지속 가능한 발전으로 가기 위해서는 교통망 인프라도 동시에 구비되어 가야 할 것이다. 바로 서해안 철도와 영광군 지역 내 주요 도로망 4차선 개설 등이 우선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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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웅 2024-02-24 23:33:19
잘 읽었습니다. 역사와 지역 사랑이 느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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