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고흐 그림에서 보는 사다리의 미학
[문화산책] 고흐 그림에서 보는 사다리의 미학
  • 전기복 기자
  • 승인 2022.03.12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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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자리에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는 꽃 피는 과수원【그림1】, 아를, 1888년 4월, 뉴욕 리처드J. 베른하르트 컬렉션
가장자리에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는 꽃 피는 과수원【그림1】, 아를, 1888년 4월, 뉴욕 리처드J. 베른하르트 컬렉션

(내외방송=전기복 기자) 열정으로 따지면 어떤 난관이나 벽도 담쟁이덩굴처럼 기어코 넘을 고흐겠지만. 그에게 '사다리가 필요했다'면 어떤 의미일까.

그림을 그리는데 필요한 화구는 아닐테다. 프로방스의 거친 미스트랄 때문에 '땅에 말뚝을 박고 이젤을 고정했다'거나 어둠 속에서 '모자창 위에 촛불을 밝히고' 그림을 그린 일화들은 익히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림 그리는데 사다리를 이용했다는 이야기는 낯설다. 더구나 오브제로써 '사다리'도 단순하기 그지없지 않은가.

'오르지 못할 거목이라면 사다리를 놓고'라도 오르는 심정으로 그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사다리'가 갖는 의미를 알아보고자 한다.

고흐는 뜬금없이 프로방스의 과수원을 그린 그림에서 실재하지 않는 '사다리'를 그려 넣는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을지라도 '표현한다'는 것은 '정신의 발로'인 것은 지당한 일이다.

가장자리에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는 꽃 피는 과수원【그림2】, 아를, 1888년 4월, 오테를로, 크뢸러 뮐러 미술관
가장자리에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는 꽃 피는 과수원【그림2】, 아를, 1888년 4월, 오테를로, 크뢸러 뮐러 미술관

동일한 풍경을 두 가지 버전으로 그린 '가장자리에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는 꽃 피는 과수원'(1888년 4월)이라는 그림에 대한 이야기다. 첫 번째 버전(그림1)에서는 없던 '사다리'를 두 번째 버전(그림2)에서는 눈에 띄지 않게 그려 넣은 것.

실제 고흐가 아를에 도착하고 한 달 보름여 지난 4월 초순경 화가 에밀 베르나르(1868-1941)에게 보낸 편지에 동봉한 현장스케치(그림3)에도 사다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갑자기 등장한 이 사다리는 어디서 왔는지, 그 현상의 역사성은 무엇일까.

가장자리에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는 꽃 피는 과수원【그림3】, 고흐가 화가 베르나르에게 보낸 편지(1888. 4. 9)에 동봉한 “프로방스의 과수원 입구”라고 소개한 스케치
가장자리에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는 꽃 피는 과수원【그림3】, 고흐가 화가 베르나르에게 보낸 편지(1888. 4. 9)에 동봉한 “프로방스의 과수원 입구”라고 소개한 스케치

굳이 '사다리'라는 화제의 작품이라면, 1885년 5월경에 그린 '사다리, 다른 인물, 묘지와 남자의 스케치'가 있다. 한 용지에 검은 분필로 각기 다른 장면 속에 건장한 남성으로 보이는 사람이 좌측 어깨에 사다리를 메고 선 모습을 드로잉한 것이다.

이렇게 고흐의 그림에 사다리는 등장한다. 그 유명한 '감자먹는 사람들'을 막 세상에 내놓은 뒤의 네덜란드 누에넌 시기의 일이다.

이후 고흐가 거쳐 간 벨기에 항구도시 안트베르펜이나 프랑스 파리 어디에서도 '사다리'가 그려진 그림은 나는 찾아보지 못했다. 그렇게 보면, 프로방스의 과수원 입구에 그려놓은 '사다리'는 농부의 영역에 속하는 도구인 것. 선적을 위한 용도나 도심의 공장용 또는 공사장용 사다리는 아닌 것이다.

사다리, 다른 인물, 묘지와 남자의 스케치, 누에넌, 1885. 5월, 오테를로, 크뢸러 뮐러 미술관
사다리, 다른 인물, 묘지와 남자의 스케치, 누에넌, 1885. 5월, 오테를로, 크뢸러 뮐러 미술관

"존재의 의미는 곧 나타나는 것에서 시작하고, 이렇게 나타나는 것 또는 외양은 정신의 표현"이라고 생각해 본다면, 고흐가 프로방스 과수원 입구에 내려(그려)놓은 '사다리'라는 현상은 그가 누에넌 시기 농부와 농촌 풍경을 그렇게도 많이 습작하든 마음같이 그들에 대한 애정과 그들의 성취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도구의 본질을 드러냄은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된다.

이쯤에서 그림을 살펴보자. 사선으로 길게 묘사된 도랑과 길, 양옆의 노란 울타리, 방풍림으로 조성된 사이프러스 나무 그리고 한가운데 흰꽃이 자체발광하듯 만발한 과수원을 그린 그림이다.

전문가들은 첫 번째 버전(그림1)이 "도랑과 길의 사선이 강조되는 등 색채보다 선의 측면에서 주제를 파악하기 때문에 스케치에 가깝고, 튜브에서 짜낸 두꺼운 흰색 덩어리들이 다소 어울리지 않게 나무들 위에 올라가 있어 미완성된 인상을 준다"는 평가다. 반면에 두 번째 버전(그림2)은 "붓질은 더 고르고 섞이지 않은 거친 색채들과 기다란 윤곽선도 사라졌으며, 없던 사다리가 덧그려져 두 번째 버전이 나중에 그려졌다"고 한다. 우측 노란 울타리 하단에 사다리가 보인다. 종합해보면 결국 첫 번째 그림이 두 번째 그림을 위한 습작이라는 이야기다.

개화기라 농가에서 사다리의 쓰임새는 그리 많지 않을 듯하다. 그래서인지 사다리는 눕힌 모습으로 없는 듯 묘사되어있다. 따라서 지금 당장 필요한 도구가 아닌 앞으로를 위한 '예비해 놓은 도구'라는 생각이 든다. 미학적으로도 이질적이고 불필요한 표현일 수도 있겠다. 그림을 자세히 볼수록 실재하지 않았던 사다리를 왜 여기에 내려놓았는지 궁금증은 더해진다.

기실, 사다리는 위아래를 오르내리는데 사용하는 도구다. 고흐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사다리의 용처는 첫 번째, 건초(밀짚)더미를 쌓거나 두 번째, 과실을 수확할 때 사용하는 도구로 묘사되고 있다. 첫 번째 사례는 '프로방스의 건초더미'(1888.6), '몽마주르가 보이는 크로 평원의 추수'(1888.6) 등이다.

프로방스의 건초더미, 아를, 1888. 6월, 오테를로, 크뢸러 뮐러 미술관
프로방스의 건초더미, 아를, 1888. 6월, 오테를로, 크뢸러 뮐러 미술관

두 작품 모두 건초며 밀짚을 높이 쌓아 올리기 위해 두 개의 사다리가 놓였다. 굳이 사다리가 묘사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림이 이상하게 보여질 개연성도 그다지 없어보인다. 특히 '프로방스의 건초더미'에서는 뙤약볕에 그을린 농부의 강인하고 듬직한 구릿빛 얼굴처럼 배경의 농가보다 더 큼직하게 자리잡은 건초더미가 압도적이지 않는가. 건초더미의 꿈틀거리는 선처리며 사다리가 놓여있어 금방이라도 일꾼들이 분주하게 건초를 더 쌓아 올릴 듯한 활기가 느껴지는 동적인 느낌을 준다. 아를의 햇살에 반응하는 바짝 마른 건초의 강렬한 노랑이 인상적이다. 곧 한여름에 그려질 해바라기의 색채를 연상하게 한다.

올리브 따기, 생레미, 1889. 12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올리브 따기, 생레미, 1889. 12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두 번째의 경우는 올리브 나무 아래 사다리를 놓고 여인네들이 올리브 열매를 따는 몇 편의 동명의 그림들에서 나타나는 사다리이다.

풍경화에서 나타나는 사다리의 존재 자체, 불필요하고 무의미하리만큼 사소해 보이는 사다리의 현상이 고흐 그림의 많은 특징 중 하나로 부각되어 보인다.

장 프랑수아 밀레, 건초더미가 있는 가을 풍경, 파리, 1873.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장 프랑수아 밀레, 건초더미가 있는 가을 풍경, 파리, 1873.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사실인즉 일찍이 '최초의 농민을 그렸다'는 장 프랑수아 밀레(1814-1875)도 '건초묶기'(1850), '이삭줍기'(1857), '건초더미가 있는 가을 풍경'(1873) 등 수많은 농촌 풍경을 묘사했으나 야외 어디에서도 사다리까지 그려넣은 작품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뿐인가 인상주의적 표현의 개척자인 클로드 모네(1840-1926)도 1880년대 그린 그 유명한 '건초더미' 연작에서도 하루의 시간대별 계절별 빛과 대기의 변화에 따라 색채며 달라지는 형태를 세세하게 표현했으나 건초더미 어디에도 사다리는 묘사하지 않았다.

클로드 모네, 건초더미. 파리, 1890. 파리, 오르세 미술관
클로드 모네, 건초더미. 파리, 1890. 파리, 오르세 미술관

고흐와 거의 동시대 화가라 할 수 있는 존 윌리엄 노스(1842-1924), 윌리엄 스톳(1857-1900), 조반니 파토리(1825-1908), 오딜롱 르동(1840-1916), 빅토르 비뇽(1847-1909) 등 어떤 화가도 건초(밀짚)더미에 사다리를 세워놓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굳이 사다리의 존재를 언급한다면 실내 창고에 보관 중인 사다리를 묘사한 밀레의 '타작하는 사람'이나 '짚을 자르는 촌부'를 언급할 수 있겠다. 또한 건초더미에 세워진 사다리는 아닐지라도 그 옆에 놓인 사다리를 묘사한 작품에는 인상파의 영향을 받은 이후 그려진 폴 고갱(1848-1903)의 '금빛 수확'(1889) 등에서 찾아볼 수 있을 정도다.

폴 고갱, 금빛 수확. 프랑스 퐁타벤 르 풀뒤, 1889. 파리, 오르세 미술관
폴 고갱, 금빛 수확. 프랑스 퐁타벤 르 풀뒤, 1889. 파리, 오르세 미술관

이쯤에서 사다리를 왜 여기에 내려놓았는지에 대한 궁금증으로 돌아가 보자. 누에넌 시기 농촌을 주유하며 소작농들이 겪어야 하는 곤궁한 삶과 일터 여기저기에 놓였던 사다리를 가슴에 담고 흑색분필로 '사다리를 든 사람'을 묘사했을 게다.

이후 아를의 과수원 농가 입구에 이르러, 고향 네덜란드에서 지난한 농부들의 일터를 보아온 마음의 짐을 내려놓듯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오래전 '사다리를 든 사람'이 짊어졌던 사다리를 내려놓은 것이다. 건초(밀짚)더미를 쌓는 농부와 올리브를 따는 아낙네들에게 풍성한 수확의 기쁨을 예비하는 부적처럼 응원의 메시지를 담은 사다리로 해석하면 무리일까.

달리 표현하면, 고흐의 그림에 사다리라는 현상 즉 '나타냄'은 농부의 성취를 돕는 객체의 본질을 더러내고자함은 아닐까.

사다리를 든 농부가 투박한 신발로 대지를 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은 마치 아름다운 멜로디를 준비하는 연주자가 피아노의 페달을 밟듯 경건하고 힘차다.

건초(밀짚)더미며 과수 사이로 굳건하게 세워진 사다리는 무대 위 덮개를 펼쳐놓고 연주자를 기다리는 피아노의 그 자태다. 한 단 한 단 더 높게 쌓아 올리고자 건초(밀짚)더미 위로 분주한 손길, 튼실한 올리브를 따고자 높낮은 가지 사이로 뻗는 검게 그을린 손들도 아름다운 선율을 위해 고저의 음정 여기저기를 오가는 건반 위의 손처럼 아름답다.

건반 하나하나, 사다리 한칸 한칸……. 악보의 높은 음자리에 그려진 음표를 노래하듯 농부의 발걸음이 힘차게 내딛을 때마다 사다리는 더 높은 한 계단씩을 농부의 발에 내어준다.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은 그 계단의 터진 공간 사이로 떨어지고 건반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선율같이 농부의 흥얼거리는 콧노래가 세워진 사다리를 감돌아 흐른다.

연주자가 피아노를 통해 아름다운 곡을 연주하듯이, 농부와 아낙네들은 사다리라는 도구를 통해 더 높이 건초(밀짚)더미를 쌓고 더 많은 올리브를 수확하는 성취의 기쁨을 갖게 되는 것이리라. 객체를 통해 이러한 본질이 드러날 수 있도록 지지하고 응원하는 고흐의 마음을, 그림을 통해서 감상하고 느껴본 시간이었다.

한때 일명 '빽'이니 요즘 말로 '부모찬스'라는 의미로 사다리 타고 온 녀석, 쉽게 누군가의 도움으로 성취한 결과에 이름을 두고 사다리를 놓고 올랐냐는 의미를 사용하곤 한 적이 있다. 이러한 부정적인 의미와 맥을 같이 하는 그 사다리가 아니다.

어려운 시기 힘든 이에게 살포시 놓아주는 사다리. 마치 건반같고 악보의 선율같은 사다리, 그래서 각자의 음색에 맞는 음역대에 표기된 음표처럼, 그렇게 자유롭게 자신만의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지지하고 돕고 응원하는 사다리라는 '현상'이 더 많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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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성 2022-03-16 15:16:33
아주 좋습니다 색체가 곱고 이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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