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의 노란 뽕나무
고흐의 노란 뽕나무
  • 전기복 기자
  • 승인 2020.12.02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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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뽕나무, 생폴, 1889. 10. 미국 노턴 사이먼 미술관
▲ 뽕나무, 생폴, 1889. 10. 미국 노턴 사이먼 미술관

(내외방송=전기복 기자) ‘노란 장관’, 가을 뽕나무 단풍을 상상하는 이는 없으리라. 뽕나무는 굳이 계절을 따진다면, 5~6월에 더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님도 보고 뽕도 딴다’는 그 열매, 오디가 초여름에 익지 않든가.

그리하여, 셰익스피어의 희극 “한여름 밤의 꿈”에서 극중극으로 등장하는 “피라무스와 디스비” 이야기의 극적 장면인 떨어진 붉은빛 오디 열매에 물든 디스비의 찢어진 외투가 나뒹굴던 곳도 여름날 뽕나무 아래였다.

이뿐인가, ‘뽕나무’ 목판화로 유명한 데이비드 캔델도 오디와 하트모양의 잎을 사실적으로 잘 묘사한 초여름 시기의 뽕나무를 남기지 않았든가.

가을 서정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뽕나무 단풍이다. 하지만 고흐를 만나면 뽕나무도 최고의 가을 풍경이 된다. 그 스스로 “최고의 가을 그림”이라고 한 ‘뽕나무’(1889.10) 이야기이다.

때는 1889년 10월 어느 가을날!. 고흐는 생폴드모졸요양원의 폐쇄적인 공간을 벗어나 생레미의 한적한 돌이 많이 흩어져 덮인 비탈에 이른다. ‘딱 가을이구나’라고 느끼게 하는 하늘 아래 노랗게 타오르는 뽕나무 한그루, ‘너는 무엇이냐’는 듯 살피는 기색으로 이젤을 나무 가까이 놓는다.

이제 우리는 그의 캔버스를 보며 선승이 남긴 “이 뭐꼬?”같은 선문답을 중얼거려야 될지 모를 일이다. 전경 가득한 노란나무와 대비되는 짙은 하늘의 푸르름, 햇살 가득한 흰빛 너덜겅을 배경으로 한 구도다. 제하가 ‘Mulberry(뽕나무)’니 ‘이게 뽕나무지’, ‘참! 이 뭐꼬가, 강렬하게 다가오는 요상한 그림’이라는 첫 느낌이다.

그럼 사실적인 뽕나무는 어떤 형태일까? 앞서 소개한 데이비드 캔델의 뽕나무 그림을 보자. 검붉게 익은 유두 모양의 오디며 사랑의 증표마냥 심장모양의 녹색잎만큼이나 사실적으로 표현된 뽕나무 작품을 나는 보지 못했다.

고흐의 있어, 1889년도 그림 주제들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그의 뽕나무 진면목을 쉬이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음이 사실이다. 봄 아몬드며 살구나무, 복숭아나무, 뙤약볕 여름의 사이프러스, 가을날 버드나무, 플라타너스, 올리버, 소나무까지 그 다양한 나무들 가운데 뽕나무 그림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허나, 그의 누에넨 시절 심취했던 직조공 연작(1884년)을 생각한다면 그리 생소한 주제는 아닐 수 있겠다. 옛날 뽕잎을 먹고 자란 누에가 실을 토하여 만든 누에고치로 실을 뽑았다. 목화며 삼 등이 옷감을 만드는 재료였다. 그가 직조공 연작에 천착했을 때는 영국이 주도한 산업혁명으로 증기기관을 이용한 기계식 직조기의 대량생산에 밀린 수동식 직조기 한 대에 의탁해 생계를 유지하던 농촌 직조공들의 암울한 시기였다. 그런 농촌 직조공들의 일상에 관심을 갖고 농촌을 전전하며 그림을 그린 고흐다.

들녘 여기저기에는 관심 밖으로 밀려난 뽕나무들이 있었을 것이고 고흐는 그 숲을 지나 또 다른 농가를 기웃했을까. 그의 편지 글이다.

“직조공들을 그린 그림을 본 적이 있니?·······직조공이 일하는 작은 방에서는 충분한 거리를 두고 그림을 그릴 수가 없어. 그림이 실패로 돌아가는 이유이기도 하지. 그런데 베틀 두 개가 설치된 방을 찾아내어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단다.”

유럽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우리네도 뽕나무밭은 다 사라지듯 했고 기념물로만 남아있는 상태다. 조선시대 실록을 보면 창덕궁 궁원(宮園)에 뽕나무를 심고 왕비가 누에를 친 기록이 있고 그 흔적인 천연기념물 제471호 창덕궁 뽕나무가 거목으로 남아있다.

서울시 서초구 잠원동 신반포16차 아파트 내에 있는 옛 왕실의 잠소(蠶所) 상전지(桑田址) 일명 ‘잠실리 뽕나무’(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호)도 마찬가지다.

단원 김홍도의 그림 ‘자리 짜기’(단원풍속도첩), 방 왼쪽 뒤편의 여인이 왼손으로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아 올리는 묘사를 보면 고흐보다 한 세기를 앞선 그 시절의 뽕나무의 중요성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게 한다.

이렇듯 네덜란드 누에넨 들녘에서 봤을 뽕나무!. 여기 생레미 거친 너덜겅 끝자락에서 외롭게 선 또 다른 노란 뽕나무를 마주하는 느낌은 ‘더 지탱할 수 없는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연민의 아린 마음’이었으리라. 그래서 ‘너 이제까지 무탈했구나 별고 없니’라며 쓰다듬을 듯 가까이 다가가 그린 그림이다. 뽕나무 가지 끝이 잘려나갈 만큼 캔버스를 가득 채우는 묘사가 그렇게 말하는 듯하다. 희망의 상실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함께 읽힌다.

보라. 전경 가득한 뽕나무잎과 줄기의 검은 색 윤곽처리는 뽕나무의 불타오르는 잎들을 더 강렬하게 표현해 주지만 한편으론 심연으로부터 불안감을 만들어 낸다. 배경의 흰색 돌무더기 들판과 파란 하늘이 맞닿는 비탈의 사선처리도 마찬가지 느낌을 준다. 고흐가 “노란 뽕나무를 그린 게 가장 훌륭하다”라고 쓴 편지의 또 다른 부분은 이렇다.

“앞날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없고 어떻게 될지도 모르겠구나. 도무지 어쩔 도리가 없음을 느낀다.”

‘노란색 장관’을 마주하는 아주 정상적인 자신의 건강상태도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를 일이었다. 사실 생폴드모졸요양원에 입소한 오월이래 7월말부터 9월초순 어간 정신을 잃거나 발작은 예고없이 찾아왔다. 어쩌면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리고 무성했던 숲은 다 사라지고 외롭게 서서, 노란 나선형 잎사귀들을 하늘로 쏘아져 나가는 불꽃마냥한 노란 뽕나무가 자신의 모습처럼 느껴졌을까.

생레미 시기의 특징인 원형의 붓질과 비틀린 구불구불한 선 처리가 잘 나타나 있다. 메두사처럼 꿈틀거리는 잎사귀며 가지, 백제금동대향로에 솟은 산봉우리들 같기도 하다. 양면성에 주물이라도 한 듯 입체적인 느낌이다.

고흐의 그림 중 나무 한두 그루만 표현된 그림은 단 몇 점뿐이다. 뽕나무 그림은 드로잉을 합쳐서 두어점이나 될까. 그가 그린 나무들에는 자신의 감정이 충분히 스며있다.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사이프러스는 삶과 죽음, 밝은 생동감과 어두운 침울함의 상징으로, 올리브는 고통을 견디는 힘과 그의 작업 등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여기 노란 뽕나무는 어떤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을까?

그림을 더 자세히 보자. 화면 가득한 뽕나무 한그루만 있는 것이 아니다. 뽕나무 오른편으로 뻗어 나간 가지 중간쯤을 보면, 늘어진 가지라고는 보기 힘든 수직으로 돋은 두줄은 분명 한 그루 나무다. 주변은 붉은빛을 띤다. 그리고 하늘과 땅이 사선으로 맞닿는 비탈의 오른편 끝 붉은 색칠한 부분이다. 가을이라 노란 단풍 뽕나무이지만 붉은색으로 표현된 부분은 계절을 뛰어넘어서 뽕나무의 오디가 떨어져 붉게 물든 빛깔로 뽕나무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은 아닐까.

이 세 그루의 뽕나무를 연결하면 하늘과 땅의 구분이 되는 사선과 맞닿는 소실점이 형성된다. 과거의 뽕나무숲, 현재의 화면 가득 표현된 뽕나무 그리고 작은 나무와 붉은색으로 주변을 묘사한 뽕나무, 저 멀리 붉은색으로만 표현된 나무, 사라져 가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 삶과 죽음, 불안한 미래 그러나 변하지 않는 중요한 그 무엇에 대한 이야기······

분명 고흐는 붉은 색채를 이용하여 몇 세기 전의 진정한 사랑 이야기를 담고자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오래전 올리브밭은 뽕밭에 밀려난 듯 그림중앙부 저 멀리 녹색 일부분으로 묘사되었다. 그런 뽕밭도 산업혁명의 바람 앞에 이제는 몇 그루만 남아 땅의 경계를 알리는 듯 드문드문 섰다. 뽕나무 밑둥에 세워진 돌은 다듬은 표지석처럼 그려졌다. 경계를 알리는 용도로 남은 뽕나무라면 저 멀리 두 번째와 세 번째의 나무 아래에는 관목이며 지난여름 자란 풀들을 벌초하듯 정리해서 그 주변이 더 잘 보이게 관리할 터이다. 그런 나무 주변에서 단풍이나 바랜 색을 띌 그 무엇이 있을 수 있을까. 그런데도 주변을 흐릿하나마 붉게 표현한 것은 어떤 의미일까.

주변을 붉게 묘사한 나무는 “마치 아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눈앞에 보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몇 세기 전의 작품인데도 늘 감동 받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그 무엇이 아닌가 생각된다.

▲ 오디가 열린 뽕나무 아래의 비극(목판화), 데이비드 캔델(1520-1592) 作
▲ 오디가 열린 뽕나무 아래의 비극(목판화), 데이비드 캔델(1520-1592) 作

셰익스피어가 일관되게 추구한 주제, 변하지 않는 진정한 사랑을 이야기한 희극 ‘한여름 밤의 꿈’이다. 고흐가 직접적으로 이 작품을 읽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지난 초여름에 동생 테오로부터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받고 “고맙다”는 편지(1889.7.2)를 남겼다. 그는 다독가였다. 내가 직접 세어 본 각종 편지에 언급된 작가나 화가의 이름이며 작품명만 해도 수백 건에 이른다.

‘주변을 붉은색으로 묘사한 나무는 어떤 의미일까?’로 돌아가 보자.

셰익스피어의 희극 “한여름 밤의 꿈”에서 극중극으로 등장하는 피라무스와 디스비 두 연인은 집안의 반대로 혼인을 못하게 되자 니누스왕릉에서 만나 도망가기로 한다. 먼저 도착한 디스비가 마침 나타난 사자를 보고 놀라 달아나다 외투가 벗겨져 떨어지자 사자가 그녀의 외투를 입으로 찢어 놓는다. 뒤늦은 피라무스는 뽕나무 밑에서 나뒹구는 피묻은 외투를 보고 그녀가 죽은 것으로 생각하고 칼로 자신의 가슴을 찔러 죽는다. 약속장소로 돌아온 디스비도 참혹한 모습을 보고 슬퍼하며 따라 죽는다.

뽕나무 아래에서의 죽음이 깊이 각인되지만 극의 전체적인 맥락은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극이다.

지난 시절 결혼을 운운한 사랑마다 집안의 반대에 부딪혀 방황했고 이제는 삼십대 중반의 노총각으로 폐쇄된 요양병원에 있는 신세가 아닌가. 언제 정신을 잃고 발작할지 모를 실존에 대한 불안감, 삶과 자연, 그림에 대한 사라지거나 변하지 않는 진정한 사랑, 그런 자신의 마음을 담은 그림으로 해석하면 비약일까.

노란 뽕나무를 볼 수 있는 초겨울 위의 가을이다. ‘어려운 시기, 무착륙 국제여행 상품이 나왔다’는 소식에 솔깃해진다. 혹자는 공항면세점에 더 관심이 갈지모를 일이다. 진열된 패션 브랜드 멀버리‘Mulberry(뽕나무)’에 관심이 더할 수 있겠지만 깊어지는 이 가을 고흐 스스로가 ‘최고의 가을 그림’이라 한 그의 ‘뽕나무’ 그림으로 시선을 돌려보는 것도 좋겠다.

늦가을 고흐의 그림 ‘뽕나무’ 감상을 다시 한번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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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희근 2021-11-20 11:54:04
늦가을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그림이네요.
잼나게 잘 읽었어욤

신대성 2021-11-10 19:28:35
고흐의 작품 너무 잘보고갑니다

박현재 2020-12-04 13:04:41
잘 보고 갑니더

박용헌 2020-12-04 12:21:17
기자님 잘 읽고 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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