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오동 전투'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 그 의미는?
'봉오동 전투'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 그 의미는?
  • 이지선 기자
  • 승인 2021.08.13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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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장군처럼 이름 없이, 빚도 없이 쓰러져 간 무명용사들 위한 공원 필요
봉환 잘 추진되지 못하다가 문재인 대통령 국빈 방문으로 성사
▲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을 성공으로 이끈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봉환된다. (사진=연합뉴스)
▲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을 성공으로 이끈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봉환된다. (사진=MBC뉴스)

(내외방송=이지선 기자)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끈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봉환된다.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1937년, 1938년 그때가 독립운동하러 연해주를 간 많은 분들이 아주 참담한 사건을 겪은 시기다"며 "레닌은 식민지 운동을 도와준다고 했지만 스탈린 시대에 접어들자 그분들 중 많은 분들을 죽이고 강제 이주를 시켰다. 홍범도 장군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우 의원은 13일 MBC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 출연, "강제이주를 당했을 때 많은 분들이 주로 중앙아시아 쪽으로 보내졌는데 그때 홍범도 장군도 카자흐스탄을 가셨다"며 "원래 홍범도 장군 기념사업회 이사장을 하고 계시던 이종찬 전 국정원장께서 이 일은 제가 해야 한다면서 고려인 문제도 그렇고 독립운동하는 과정에 있어 가장 큰 아픔, 이 문제를 풀어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해 이 일을 맡게 됐다"고 설명했다. 

우 의원은 "고려인들에게는 홍범도 장군이 정신적 지주이자 민족적 지도자로 인식되고 있다. 묘역도 잘 조성돼 있다"면서 "일본군들에게는 하늘을 나는 홍범도 이렇게까지 불릴 정도였다. 그러니 고려인들은 홍범도 장군이 멀리 떠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게다가 아들이 둘 있었는데 1908년 전투에 다가 둘 다 죽고 그래서 손이 끊겨 유해봉환을 하는데 있어서 후손들의 입장이 중요한데 후손이 없어서 이 문제가 잘 추진되지 않고 있었다"고 밝혔다. 

유해 봉환에 급물살을 타게 된 계기에 대해서는 "2019년 문재인 대통령이 카자흐스탄에 국빈 방문 하셨다"면서 "거기서 합의가 돼 원래는 3월에 모셔오도록 돼 있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추진하기 어려웠다. 8.15 때 모시게 된 것이다"고 말했다. 

국내에 모셔오면 어디에 안장되는 거냐는 질문엔 "일단 대전 현충원에 모시게 된다"면서 "예산이 들어가고 국민적 동의를 얻어야 하는 문제지만 홍범도 장군을 위한 독립전쟁기념공원을 만들자는 사업계획을 기념사업회에서 거의 확정한 상태다"며 "홍범도 장군도 머슴, 고아, 군대 나팔수, 제지공장 노동자를 하다가 신계사 식객승을 했고 백두산 포수가 되셨다. 이름 없이 빚도 없이 하신 분이다. 홍범도 장군처럼 무명용사들, 이름도 빚도 없이 쓰러진 분들을 기리는 그런 공원이 하나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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