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고흐의 포도밭 ①
[문화산책] 고흐의 포도밭 ①
  • 전기복 기자
  • 승인 2022.08.29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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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포도밭' 아를, 1888년 9월, 네덜란드, 크뢸러 뮐러 미술관

(내외방송=전기복 기자) "포도밭에는 시적인 분위기가 있다" 고흐의 말이다. 뿐일까. 그 나무 열매, 포도에는 사랑도 있다. 하여, 누구나 청순한 사랑을 '청포도 사랑'이라 하는데 굳이 젊은 남녀의 사랑만을 일컫는 말로 한정할 필요가 있을까. 고흐가 포도밭을 모티브로 그림을 그릴 당시 가졌던 영롱하고 청징했던 내면과 그림 세계를 일컫는 의미로 확대해 보면 어떨까.

고흐의 포도밭은 단지 그림으로 그려졌다는 이상의 의미가 있다. 다양한 화제로 그림을 일궜으나 오직 포도밭에서 생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팔린 그림이 나왔다. 얼마나 용기백배했을까. 그가 포도밭을 모티브로 한 작품에는 '푸른 포도밭', '붉은 포도밭', '농부 여인이 있는 포도밭', '오베르 풍경을 담은 포도밭' 등이 있다.  

'붉은 포도밭' 아를, 1888년 11월, 러시아, 푸슈킨 미술관<br>
'붉은 포도밭' 아를, 1888년 11월, 러시아, 푸슈킨 미술관

포도밭 그림은 아를과 생의 마지막을 보낸 오베르쉬르우아즈(이하 오베르) 시기에 각기 두 작품씩 그려졌다. 다른 시기, 다른 표현에도 불구하고 포도밭에서 공통적으로 안정되고 평온하게 느껴지는 감정은 왜일까. 먼저 아를 시기의 '푸른 포도밭'과 '붉은 포도밭'으로 발길을 옮겨보자.

한여름이다. 시인의 표현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대로 포도의 계절이다. 그래서 고흐의 '포도밭' 작품에도 더 눈길이 간다. 그러나 고흐의 '푸른 포도밭'은 시기적으로 조금 늦은 초가을, 9월 말에서 10월 초순경에 그려진 그림이다. 아마도 여름 한동안 해바라기 연작에 골몰하였고 또한 9월에는 라마르틴 광장에 있던 일명 노란집 맞은편의 시립공원을 연작하여 '시인의 공원'이라 명명한다. 노란집 코앞의 풍경이 먼저였을 것이다. 따라서 그가 한여름 동안 보아왔을 포도밭의 시적인 분위기를 캔버스에 옮기는 것은 후순위가 되었을 것이고 물리적인 시간의 여유도 허락되지 않았으리라.

그러면 이 시기에 '푸른 포도밭'을 그린 이유가 무엇일까. 당시 고흐가 생각한 가장 큰 관심사는 고갱의 합류로 시작할 화가공동체에 대한 꿈이었다. 하여, 고갱이 머물 방을 장식할 목적으로 해바라기 연작을 그렸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앞서 말한 '시인의 정원'도 "캔버스라는 작은 세상을 통해서라도 남프랑스 아를이 주는 서정적인 즐거움에 고갱을 매료시킬 목적으로 그려졌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당시 고흐의 편지를 보면 '푸른 포도밭' 그림 역시 노란집을 장식할 목적이었고, 시적인 분위기로 자신의 감흥을 자극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아, 내 포도밭 습작. 땀 흘리며 열심히 애써서 겨우 완성했다. 역시 이 집을 장식하기 위한 그림이지"(테오에게, 1888.9.29. 이후)

"지금 풍경화를 그리는데, 검정과 오렌지색 줄기 있는 초록색, 적자색, 노란색의 드넓은 포도밭으로 위는 푸른 하늘입니다. 빨간 양산을 쓴 부인들과 포도 따는 사람들의 작은 그림자, 짐수레 등이 이 그림을 더욱 활기 있게 만들어줍니다. 앞쪽은 회색 모래땅, 이 또한 30호짜리 캔버스로, 이 집을 장식할 그림입니다"(고갱에게, 1888.10.8.)

"별이 빛나는 밤, 시인의 정원, 포도밭. 얼마나 시적인 풍경인지!"(테오에게, 1888.10.4 이후)

여기서 그림 '푸른 포도밭'에 대한 설명은 위에서 인용한 고흐가 고갱에게 쓴 편지로 갈음하자. 화가의 직접적인 표현에 어떤 말을 덧붙일까. 단지 이 그림에서 느껴지는 안정되고 평온한 감정은 무엇일까로 돌아가 보자. 가난한 화가들이 함께 기거하면서 경제적 어려움도 해소하고 서로 창조적 자극제가 되는 공동체를 만든다는, 희망이 지평선 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시기의 행복감이 반영된 결과물이라 그런 것은 아닐까. 나아가 화가들에 대한 연대감, 연민과 위로의 마음, 그 영롱한 정신이 반영된 느낌이리라.

앞서 본 '푸른 포도밭'이 고흐가 고갱을 만나기 전의 포도밭이라면, '붉은 포도밭'은 그를 만난 이후의 포도밭 전경이다. 약 한달 터울이지만 포도잎이 석양이며 늦가을 햇살에 이렇게 순응한 빛을 띌까 싶다. 언젠가 고갱과 함께 로마시대의 공동묘지 알리스캉의 풍경도 캔버스에 담는 나들이를 했다. 귀가하는 길에 "적포도주처럼 붉은, 새빨간 포도밭을 봤어. 멀어질수록 노란색이 되었어"라고 한 그 전경이 지금 감상하고자 하는 '붉은 포도밭'이다. 가을 단풍이 두 사람을 사로잡고 단단히 묶어주는 시기였다. 고갱과 협업하는 흥분된 마음을 또 이렇게 동생에게 전했다.

"지금 그는 상상으로 포도 따는 여인들을 그리고 있는데 그림을 망치거나 도중에 그만두지 않는다면 아주 아름답고 독특한 그림이 될 거야……. 나는 심홍색과 노란색만 있는 포도밭을 그리고 있어"

이어지는 편지에서 '고갱이 서랍장과 여러 세간살이를 샀고, 화가 더 한과 이삭손이 노란집에 올 것을 기대하고, ……. 고갱과 함께 집에서 저녁을 해 먹기로 하여 비용이 더 적게 든다’는 이야기 등을 늘어놓았다. 혹자의 해석대로 "고갱이 노란집에 살며 그림 그리고 있다는 사실에 고흐는 태어나 처음으로 크게 만족감을 느낀 시기다"

고갱, '포도 따는 여인들 아를' 1888년 11월, 개인 소장

아직은 예술가로서 견해차가 표면화하지 않았지만, 앞서 고흐가 편지에서 거론한 고갱의 '포도 따는 여인들'을 보면, 설명없이는 한 무덤의 붉은 색으로 묘사된 것이 포도인지 포도나무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고 앉아 있는 여인들도 풍요 속에서 무슨 고뇌하는 여인을 표현하고자 한 것인지 헤아리기 힘들다. '상상해서 그린다'는 것은 고흐의 결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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