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민주주의 3.0, 택시운전사, 1987을 보고 배웠다
K-민주주의 3.0, 택시운전사, 1987을 보고 배웠다
  • 조규필 기자
  • 승인 2020.08.05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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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3월 11일 박근혜 탄핵 다음날 촛불집회
▲ 2017년 3월 11일 박근혜 탄핵 다음날 촛불집회

(내외방송=조규필 기자) 지금까지 우리나라 국민들은 서구의 발전된 문명을 바라보면서 선망의 대상으로 여겨왔지만, 이번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면서 서구 사회의 방역대책과 사회적 대응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선입견을 품어왔는지 여실히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20th century에서는 서구 사회의 현상을 자세히 분석해 우리 사회를 투영해 봤지만, 최근에는 홍콩 보안법을 둘러싼 시위와 미국 흑인인종 차별시위를 통해 그들이 조명하는 한국의 발전된 민주주의의 위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부마민주항쟁, 서울의 봄, 서울역 회군까지

박정희 정부의 유신체제는 정치․사회적 갈등을 빚어오다가 백두진 파동과 박정희 대통령 취임 반대운동, 크리스찬아카데미사건, 오원춘사건에 이어 YH무역노조 신민당사 농성,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총재직 정지 가처분과 의원직 박탈 등 1979년은 한계에 이르렀다. 그해 10월 16일에 이어 18일 부산․마산지역을 중심으로 박정희의 유신독재에 저항하는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났다. 부마민주항쟁 직후 1주일도 안 돼 10․26 사건이 발발했고, 유신체제도 종언을 맞이했다.

서울의 봄은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의 봄’에 비유한 말로, 10․26 사건 이후 전두환 신군부가 등장하면서 우리나라에서 수많은 민주화 운동이 벌어졌던 1980년 5월 17일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조치가 단행되기 전까지의 기간을 일컫는 말이다. 12월 6일 최규하 대통령은 긴급조치를 해제해 개헌 논의 시작과 더불어 재야인사를 복권했다. 이에 국민들 사이에서도 유신체제 종말과 민주화 시대에 대한 열망이 컸고, 시민사회 원로는 최규하 대통령에게 유신헌법 폐지 및 민주적 선거를 요구했다.

여야는 20일 국회를 개최해 계엄령 해제와 유신헌법 개정논의를 진행하기로 합의했다. 5월 1일부터 전국 각지에서 민주화 일정 제시와 전두환 퇴진 등을 요청하는 대규모 대학생 시위가 발생했다. 이때 전두환 신군부는 비상계엄 전국 확대, 국회 해산, 비상기구 설치 등을 골자로 하는 ‘시국수습방안’을 마련했다. 신군부의 정권 장악에 맞서 학생들은 1980년 봄부터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5월 15일 서울역과 남대문에서 학생운동 지도부는 일단 여기서 시위를 멈추고 학교로 돌아가는 이른바 ‘서울역 회군’을 결정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신군부는 5월 17일 24시에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게 된다. 군부는 5월 17일 단행된 조치에 따라 모든 정치활동을 정지시켰고, 김대중과 김종필을 비롯한 정치인과 재야인사들이 체포됐으며, 김영삼은 연금됐다. 대학에는 휴교령이 내려졌고, 전국의 각 대학과 주요 도시에는 군부대가 투입됐다. 5월 20일 예정된 임시국회를 무산하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해 군부 주도로 정국을 이끌어나갔다. 결국, 서울의 봄은 그렇게 막을 내리게 됐다.

잊히지 않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광주 역시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대규모 집회와 횃불 행진시위를 벌였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계엄령 철폐와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비롯한 신군부 인사들의 퇴진, 김대중 석방 등을 요구하면서 시작됐다. 5월 17일 자정 전두환 신군부세력은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고, 경찰병력을 공수부대로 교체하면서 광주시민에 대한 학살작전이 벌어졌다. 공수부대는 시민들을 무자비한 폭력으로 참혹하게 짓밟았다. 시민들은 도청광장으로 향해 스스로 시민군을 조직해 무장한 공수부대와 대치했다.

5월 27일 새벽 공수부대의 광주 침공작전이 시작되면서 시민군은 탱크 앞에 힘없이 무너졌다. 그날 새벽 외곽도로를 봉쇄하고 탱크 등으로 무장한 계엄군의 대대적인 무력진압이 감행됐다. 결국, 시민군이 전원 연행됨으로써 광주는 계엄군에 넘어갔으며, 가택수색이 이루어져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가 상무대로 연행됐다. 이후 계엄당국은 군인과 공무원을 동원해 광주 시내의 핏자국을 지우기 시작했고, 상무관에 안치돼 있던 시신들은 상여도, 만가도, 흰 꽃도 없이 서둘러 광주시립묘원에 매장됐다.

5월 광주는 군사 쿠데타 세력에 의해 참담하게 진압됐고, 모든 것은 다시 일상의 평온함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분노가 가득한 침묵의 시간이 찾아왔고, 우리의 기억보다 그날의 광주는 더욱 처참했다. 총칼 앞에 굴복당한 그 날 광주의 진실은 침묵 속에 묻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진실은 분명히 기억되고 있었다. 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과 1987년 5월 부산의 노동자 황보영국 열사 분신, 6월 ‘5․18 광주의거 사진전’은 6월 민주항쟁의 기폭제가 됐고, 5월 광주 학살을 소환하는 계기가 됐다.

▲ 민주-AP 통신이 1999년 20세기 100대 보도사진으로 선정한 아! 대한민국, 우리나라 6월 민주 항쟁을 대표하는 사진이다. (사진=고명진 관장 제공)
▲ 민주-AP 통신이 1999년 20세기 100대 보도사진으로 선정한 아! 대한민국, 우리나라 6월 민주 항쟁을 대표하는 사진이다. (사진=고명진 관장 제공)

민주주의 1.0, 6월 민주항쟁과 6․29 선언

1987년 4월 전두환 대통령이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자 사회 각계 인사들의 비난성명이 이어지는 가운데 5월 재야세력과 통일민주당이 연대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를 발족했는데, 이후 6월 민주항쟁의 구심체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공식성명을 통해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알려지면서 전국적인 국민의 분노가 급속히 확산됐다. 이에 국민운동본부는 6월 10일 ‘박종철군 고문살인 조작․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부터 시작된 6월 민주화운동의 불씨는 전국적인 확산을 예고한다.

여기서 다시 국민적인 분노를 이끌어내는 기폭제가 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국민대회 하루 전 개최된 연세인결의대회에서 이한열 학생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게 된다. 이에 국민대회는 서울을 비롯한 전국 22개 도시에서 약 24만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시작돼 이후 산발적인 야간시위와 철야농성으로 이어지게 된다. 18일에는 전국 16개 도시에서 150만명의 시민과 학생이 참여했고, 여야 영수회담 결렬 후인 26일 국민평화대행진에서도 130만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면서 6월 항쟁의 절정을 이루게 된다.

6월 민주항쟁은 전국에서 400~500만여명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를 이끌어내면서 당시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가 대통령 직선제 수용, 대통령 선거법 개정, 김대중 사면복권 및 시국사범 석방, 언론자유 보장, 지방자치제 실시 및 대학 자율화, 자유로운 정당활동 보장 등 8개항을 수용하겠다는 6․29 선언을 발표했다. 6월 민주항쟁은 비록 민주화 세력으로의 정권 수립으로 이어지지 못했지만, 시민의 역량에 의한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 운동과 제5공화국의 실질적 종말을 가져오는 등 한국현대사에서 절차적 민주주의가 뿌리내릴 수 있는 계기가 됐다.

▲ 2002년 월드컵 당시 거리 응원 모습 (사진 = 중앙일보)
▲ 2002년 월드컵 당시 거리 응원 모습 (사진 = 중앙일보)

민주주의 2.0, 한․일 월드컵 길거리 응원과 광우병 촛불시위

2002 한․일 월드컵은 단순히 국제적인 스포츠 이벤트를 넘어 경기장 안뿐만 아니라 도심 광장, 학교, 공원 등지에서 붉은악마가 주도하는 대규모 응원단의 길거리 축제로 기억되면서 6월 한 달 동안에만 2200여만명이 운집하는 등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신선한 축제문화로 평가되고 있다. 붉은악마 열기는 단순히 응원문화를 넘어서 사회적 신드롬으로 발전했고, 레드 패션, 히딩크 리더십, 월드컵 세대 등이 주목받으면서 성숙한 응원 및 축제문화를 선보이며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특히, 길거리 응원은 악명 높고 폭력적인 서구의 홀리건과 차별되는 평화적 응원문화로, 이후 시위문화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무엇보다 자발적인 동기에 따라 소풍을 가듯이 경기장과 모임장소에 모여들었고, 스포츠문화에서 소외됐던 여성과 청소년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생활체육이 확산되는 계기가 됐다. 월드컵 응원열기는 응집력의 표출로 이어지면서 역동적이고 활기찬 다이내믹 코리아로 자연스럽게 변화하고, 한국인 특유의 냄비근성과 조급함을 벗어나 집단적 참여 속에서 자연스럽게 표출하는 장으로 변모할 수 있었다.

이후 2008년 촛불시위는 5월 이명박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전면개방에 대한 반대의사를 표시하기 위한 시위로, 처음에는 4월 고등학생 100여명이 정부의 ‘학교자율화’ 정책에 따른 0교시 수업 허용 등에 반발하며 모인 것을 계기로 주말마다 서울 청계광장과 광화문 등에서 다양한 명목으로 ‘촛불문화제’가 열렸다. 5월 2일 첫 집회 이후 2개월간 연일 수십만명이 참가했으며, 6월 10일을 정점으로 7월 이후에는 주말 집회가 계속됐다. 100일 이상 집회가 계속되면서 쟁점이 점차 정치적으로 확대됐다.

시민들은 대부분 광우병 촛불시위에 자발적으로 자녀를 동반한 가족단위의 참가도 많았으며, 문화축제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나, 집회과정에서 경찰들과 폭력적으로 충돌하기도 했다. 이때 시위를 두고 민주주의 2.0, 시위 2.0이라고 부르기도 했고, 정권의 시위 과잉진압, 소통 없는 정치에 대한 문제가 불거지기도 했다. 국제앰네스티와 유엔 인권침해조사관은 시위 초기엔 평화적이었으나 이후 시위대와 경찰 양쪽에서 폭력이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또한, 인터넷상의 감정적인 여론몰이와 현실여론의 거리감 역시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촛불시위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시위 참가자들이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발생위험을 과장해 ‘괴담’을 퍼뜨리고 있다는 비판이었다. 시위가 거세지자 정부는 미국과 추가협의를 거쳐 민간자율 규제형식으로 특정위험물질을 제외한 30개월 미만 쇠고기만 수입하기로 했다. 헌법재판소에서 야간집회 금지에 대해 헌법 불합치와 자정까지의 야간시위 금지가 위헌이라는 결정이 나와 이 시위 이후 합법적으로 야간집회와 야간시위가 개최되고 있다.

▲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외치는 시민들 (사진 = 뉴시스)
▲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외치는 시민들 (사진 = 뉴시스)

민주주의 3.0, 최순실 국정농단으로 촉발된 촛불시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박근혜 정부 당시 최순실이 박근혜의 비선 실세로서 대통령의 의사결정과 국정, 인사문제 등에 광범위하게 개입해 국정농단을 일삼았다. 이를 대통령 최측근들이 묵인, 방조, 협력하면서 공직자의 권한을 부당하게 남용하고 뇌물을 받은 것이 밝혀진 사건이다. 박 대통령은 이런 정치적 위기를 개헌 이슈 등으로 무마하려고 했지만, 10월 24일 JTBC에서 일명 태블릿 PC 보도가 나오자 박 대통령은 대국민사과를 통해 최순실과의 사적 관계를 일부 시인함으로써 사태의 여파가 본격적으로 촉발되기 시작했다.

국정농단 사태에 대해 시민사회가 받았던 거대한 충격은 머지않아 대학가의 시국선언과 집회 등으로 표출되기 시작했으며, 박근혜 정권은 전국적인 저항을 맞이하게 됐다. 10월 29일에 열린 1차 촛불집회는 총 23차례에 걸쳐 진행된 촛불집회의 서막을 여는 집회로, 주최 추산 3만명, 경찰 추산 1만 2천명의 시민이 참가해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했다. 언론들은 이번 집회가 특정 세력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점, 쇠파이프와 물대포가 등장했던 이전 시위와는 달리 평화롭게 진행된 점에 대해 주목했다.

초기에는 일부 혼란도 있었지만, 20회가 넘는 집회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시민들이 돌발행동을 하는 참석자를 ‘비폭력’, ‘평화집회’ 등을 외쳐 스스로 자제시키는 모습을 보이는 등 대체로 무력사태 없는 평화로운 시위를 이어갔고, 경찰도 시위대를 크게 자극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으며, 다음날 서울경찰청은 이성적으로 협조해준 시민들에게 감사를 표명하는 보도자료를 이례적으로 내기도 했다. 외신들은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첫 촛불집회에 주목했다.

▲ 촛불집회 후 거리를 치우는 시민들의 모습 (사진 = 뉴스토마토)
▲ 촛불집회 후 거리를 치우는 시민들의 모습 (사진 = 뉴스토마토)

해외 온라인 커뮤니티에 확산하고 있는 사진은 150만명이 모여 역대 최대 기록을 경신했던 11월 26일 5차 촛불집회의 모습으로, 12월에는 무려 232만명이 참여하는 시위규모가 1987년 6월 항쟁의 140만~180만명의 기록을 훌쩍 뛰어넘기도 했다. 그럼에도 경찰청에서는 2017년 폭력시위 건수가 통계관리를 시작한 1984년 이후 역대 최소 규모로 집계됐다고 밝혔는데, 당시 수백만명의 기록적인 인파가 모인 5차, 6차 촛불집회 당시 보수단체도 맞불집회를 열어 충돌 우려가 제기됐지만, 당시 불법시위로 경찰에 연행된 사람은 0명이었다.

이후 2016년 12월 9일 국회에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세월호 7시간을 포함한 9가지의 탄핵소추 사유가 담긴 탄핵소추안이 가결됐고, 2017년 3월 10일 박 대통령은 최순실과 관련된 비리 혐의로 헌법재판소의 재판관 만장일치 결정에 따라 탄핵됐다. 대법원은 지난 6월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 씨에게 징역 18년형에 벌금 200억원, 추징금 63억여원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5월 검찰은 박 대통령에게 뇌물 혐의에 징역 25년과 벌금 300억원, 추징금 2억원을,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등 다른 혐의에는 징역 10년과 추징금 33억원을 구형했다.

▲ 미국 워싱턴 DC의 백악관 인근에서 6월 7일 경찰의 과잉진압에 사망한 조지 플로이드 사망 항의 시위가 열렸다. (사진=VOA)
▲ 미국 워싱턴 DC의 백악관 인근에서 6월 7일 경찰의 과잉진압에 사망한 조지 플로이드 사망 항의 시위가 열렸다. (사진=VOA)

美 커뮤니티서 “150만명 모였는데 입건 0명” 큰 관심

한편, 북미권 최대 커뮤니티인 레딧(reddit)과 9개그(9gag)에서는 한국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데, 현재 미국의 시위와 극명히 비교되는 한국의 촛불집회가 주목을 받고 있다. 미국 레딧에서는 6월 1일 2016년 한국 박 전 대통령 탄핵정국 당시 촛불시위 사진과 함께 150만명이 시위를 벌였지만, 단 한 건의 폭력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게시물이 올라오자마자 6시간만에 15만명의 추천을 받았고, 10일 기준 30만명이 이 게시물을 추천하고 있다.

한국의 촛불집회 사진과 영상이 퍼지면서 한국의 질서정연한 시위문화를 배워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해외 누리꾼들은 “믿을 수 없는 통계다”, “아마 2000년대 한국의 최고 업적일 것”, “미국이 이렇게 시위할 수만 있다면”, “어떻게 약탈, 폭동, 방화 없이 목적을 이뤄낼 수 있나?”, “이라크 시위조차도 미국보다는 문명화돼 있을 것” 등의 반응을 보였다. 이처럼 수백만명이 모여 정부에 항의시위를 벌였지만, 평화적인 방식으로 진행됐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10월 29일 서울 청계천 광장에서 처음 켜진 3만개의 촛불은 6개월 동안 23차례의 집회를 거쳐 1600만개의 거대한 촛불로 발전했고, 촛불혁명이라는 믿을 수 없는 결과를 만들어냈다고 알렸다. 당시 한국에서 150만명이 시위를 하고, 2만 5천명의 경찰이 파견됐지만, 단 한 건의 폭력사태도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과 함께 관련사진을 보면서 미국인들은 이에 대해 놀라워하고 있다고 전했다. 무엇보다 시위가 끝난 다음 시위현장에 버려진 쓰레기를 줍는 시위 참가자들의 사진은 방화와 약탈이 벌어지는 미국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지적했다.

폭력시위와 평화시위 차이

폭력시위와 평화시위에 대해 사회학자들은 공권력의 대응 차이를 꼽았다. 김석호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또한 “시위가 폭력화되는 것은 대응하는 측에서 폭력을 쓰기 때문”이라며 “트럼프 정부가 주 방위군까지 동원해 제압하고 경찰은 여전히 강경한 진압태도를 보이는데, 미국인의 성향이 폭력적이라서 그렇게 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결국 미국 정부가 어떤 태도를 보여주느냐가 현재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내다봤다.

이를 두고도 온라인에서는 열띤 토론이 벌어졌는데, 미국 인종차별 집회가 폭력적으로 격화되는 이유에 대해 트럼프 정권의 시위대를 대하는 태도가 민심을 더욱 자극해 분노가 확산하고 있다고 내다봤다. 일부는 “한국인이 미국인보다 폭력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은 규칙에 따르지 않는다. DNA에 없다”, “미국인들은 이 기회를 이용해 분노를 풀고 정부에 화를 낸다”, “슬프게도, 미국은 평화시위를 할 수 없다” 등 시민성을 거론했다.

한 네티즌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등이 한국의 시위에 대한 태도를 바꿔놨다”라면서 “여전히 많은 사람이 양측에 얼마나 심각한 일이 있었는지를 기억하고 있어 시위에 훨씬 신중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아울러, “폭력을 시작하는 것은 미국의 경찰이다”, “미국은 잠재적으로 군대가 시위대를 공격할 준비가 돼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 “한국 경찰은 충돌하는 사람들이라기보단 시위대를 지키는 사람들처럼 보였다”라고 두 나라 경찰의 대응 차이를 강조한 반응도 있었다.

지난 3일 미국 워싱턴 DC 시위현장에는 촛불과 노래가 등장하는 평화로운 시위가 연출되면서 트위터를 통해 이 영상이 확산됐다. 영상 속 시위대는 휴대폰 조명을 활용해 불빛을 만들고 노래하는 남성을 따라 떼창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 케니 스웨이라는 남성은 ‘내게 기대요’라는 노래를 불렀는데, 폭동과 약탈로 얼룩진 미국 시위를 진정시키는 데 성공적이었다면서 트위터에는 칭찬의 댓글로 이어졌다.

▲ 지난 2019년 홍콩 시위 모습 (사진 = nbc)
▲ 지난 2019년 홍콩 시위 모습 (사진 = nbc)

“한국 촛불집회 보고 버텼다”

얼마 전 사임한 홍콩 민주화 시위의 주역인 조슈아 웡 데모시스토당 비서장은 6월 10일 정의당 류호정 의원과의 영상대담에서 “한국의 촛불집회를 보고 용기를 내 범죄인 인도 법안(송환법) 철회를 이끌어냈다”며, “우리도 23번의 집회는 견뎌야 한다는 생각으로 송환법 철회까지 3개월을 버텼다”고 밝혔다. 이어 “일부에서 내가 한국 정부를 비판하는 모습으로만 비쳤다”면서 “한국 언론은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목숨 걸고 알린 독일기자 위르겐 힌츠페터와 같은 심정으로 홍콩의 상황을 알려주기 바란다”고 촉구했다.

네이선 로 주석은 “홍콩 시민들은 한국 영화 1987, 변호인, 택시운전사 등에서 독재정권의 잔혹한 폭력에 맞서는 한국 시민들을 보고 용기를 받았다”며, “홍콩의 민주화 운동은 이제 시작이겠지만 계속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류 의원은 이날이 6․10 민주항쟁 기념일이라면서 “1987년 한국의 상황과 현재의 홍콩에 닮은 점이 있을 것으로 본다”며, “결국 홍콩은 민주주의를 쟁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네이선 로는 7월 3일(현지시각) 미국 CNN방송과 인터뷰에서 “정부가 아무리 위협적이어도 나는 (홍콩의 민주화를 옹호하는) 내 일을 할 것”이라고 강조하며, 홍콩의 민주화를 위해 싸울 것이라고 밝혔다. 조슈아 웡은 7월 4일 SNS를 통해 “저는 무탈하다. 중국으로 송환되지 않았고, 그런대로 괜찮다”는 글을 올렸다.

조슈아 웡은 7일 시사IN에 기고한 글에서 “한국 촛불시위를 주목해서 봤다”며, “그 시위로 인해 부정을 저지른 권력은 물러가고 국민들의 목소리를 반영한 대통령이 당선됐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우리 홍콩 시민들에게 많은 영향을 줬다”고 밝혔다. 이어 “40년 전 광주에서 2016년 촛불시위까지 한국은 독재와의 싸움 끝에 민주주의를 쟁취한 승리의 역사를 지니게 됐다”며, “한국의 민주화 역사를 보며, 언젠가는 홍콩에서도 민주주의의 승리가 이뤄질 것이라고 우리는 상상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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