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의 캔버스에는 비가 내린다.
고흐의 캔버스에는 비가 내린다.
  • 전기복 기자
  • 승인 2020.09.24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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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비 내리는 밀밭, 생레미, 1889.11. 미국 필라델피아미술관 / 비 내리는 오베르 풍경, 오베르, 1890.7. 영국 카디프, 국립웨일스미술관
▲ (왼쪽부터) 비 내리는 밀밭, 생레미, 1889.11. 미국 필라델피아미술관 / 비 내리는 오베르 풍경, 오베르, 1890.7. 영국 카디프, 국립웨일스미술관

(내외방송=전기복 기자) 올해는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렸다. 6월 24일부터 내린 비는 8월 중순경에 끝났다. 연속 54일! 역대 최장의 기록적인 장마이다.

고흐라면 이러한 시기에 어떤 반응이었을까? 자연이 주는 방식대로 자연이 펼쳐놓은 모습에 가장 고흐스럽게 반응한 결과물은 어떤 모습일까? 그의 가슴속 뇌우를 들여다보자.

고흐는 현장에서 대상을 직접 보고 느끼면서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날씨에 민감했고 "미스트랄이 불 때면 이젤을 세우려고 곤욕을 치러야 하지. 이젤을 땅에 박아 고정시켜 그림을 그린다"고 그는 이야기하곤 했다.

이런 궂은 날씨 때면, 자신의 아틀리에나 실내에서 자화상이나 정물화, 타인이 그린 그림을 모사(模寫)하거나 또는 자신이 그린 그림 중 특정 그림을 다시 그리는 방법이 동원되었고 특히 실내에서 밖을 관찰하면서 그리는 경우가 많았다.

언젠가 '2월의 눈내리는 아를'이라는 제하의 글에서 고흐가 1888년 2월 20일 아를에 도착한 날부터 사흘간 눈내리는 상황에서 묵고 있던 카렐호텔 식당 내에서 그린, 동네 푸줏간 풍경 '창문에서 본 푸줏간'(1888.2)을 소개한 바 있는데 좋은 일례가 된다.

그렇다면 언제 고흐의 캔버스는 비에 젖을까. 과연 그런 그림이 존재할까?

자문에 자답 먼저하면, '존재한다'이다. 고흐는 캔버스에 비 내리는 장면의 그림을 그렸다. '빗속의 다리'(1887. 9〜10), '비가 내리는 밀밭'(1889. 11), '비가 내리는 오베르 풍경'(1890. 7), '비오는 하늘 아래 건초더미'(1890. 7) 등 총 4편(드로잉 제외)의 그림을 찾아볼 수 있었다.

한쪽 가슴에는 '해바라기' 연작으로 대표되는 강열한 열정이, 다른 편 가슴속엔 오늘의 주제인 ‘비 내리는 풍경’ 등에 비유되는 고독한 뇌우가 존재한 화가였다.

고흐가 '내리는 비'를 보면서 그린 첫그림은 '비가 내리는 밀밭'(1889. 11)이다. 시기적으로는 1889년 5월 8일부터 1890년 5월 16일까지 생레미드프로방스(이하 생레미) 외곽에 위치한 생폴드모졸요양원(이하 생폴)에서 생활하던 시기에 그린 작품이다. 자신의 침실 창문 아래로 펼쳐진 밀밭을 주제로 그린 회화 14점과 드로잉 10여점이 전해지는데 이중 한 작품에 속한다.

그림은 간단하다. 담장으로 둘러진 밀밭은 이미 수확이 끝났고 또 다른 파종을 위해 쟁기질한 고랑과 이랑은 이미 내린 비를 머금은 듯 흰빛이 감돈다. 배경의 산은 내리는 비에 흐릿하고 늘어선 올리브숲이 녹색띠를 이루며 다소 선명하게 담장밖의 활력을 말해주는 듯하다. 농가 몇 채는 산빛과 동색으로 있는 듯 없는 듯하다.

특징이라면 쏟아지는 소나기를 묘사하고 있다는 점인데 가는 흰색 사선처리가 짧고 극적이다. 빛이 존재하기 힘든 비 내리는 풍경에 그나마 흰빗줄기가 밝고 마음을 새롭게 하는 느낌을 준다. 손바닥을 그림속으로 넣으면 빗물이 튕겨져 나올 듯 힘차게 표현되었다.

하지만, 자신의 침실 철창사이로 내려다 보였을 담장에 둘러싸인 네모난 밀밭을 사계절, 밤낮, 다양한 시간대와 온갖 날씨라는 이름으로 변화무쌍하게 다가왔을 그 많은 시간들을 응시했을 것이란 생각에 가슴이 아려옴을 느낀다.

사실, 비와 관련된 작품으로는 '비가 내리는 밀밭'보다 2년여 전 그려진 '빗속의 다리'(1887. 9〜10)라는 작품이 있다. 이는 일본 화가 우타가와 히로시게의 우키요에(에도시대 유행한 풍속화) 그림 '오하시다리의 소나기' 판화를 모사(模寫)한 것으로 일본이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참가하면서 갖게 된 교류의 영향이었다.

그림은 검은색 빗줄기가 날줄만 남은 삼베처럼 촘촘하게 화면 가득 그어졌다. 우비를 받쳐든 사람들은 소나기를 피해 다리위에서 황급히 움직이는 모습이다. 화폭 좌우측을 가로지러는 다리가 주는 공간감과 배경의 산에 이르는 원근감뿐만 아니라 이와 반대되는 장식적인 평면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야말로 테두리에 적힌 생소한 글도 그려넣은 모양새가 역력한 모사(模寫)다. 혹자는 “고흐가 이 우키요에를 모사하면서 내리는 비를 표현하는 기법을 접하고 익히게 되는 계기가 된다”고 하였으나 나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사실, 드로잉까지 포함한다면 1883년 12월의 '비 내리는 교회 묘지', 1886년 봄의 '비 내리는 공원을 걷는 사람' 등이 모사작 '빗속의 다리'(1887. 9〜10) 이전에 이미 그려졌고 일본화가들이 선호했다는 ‘내리는 비를 비스듬히 가는 선(사선, 斜線)으로 처리’하는 기법 또한 이미 사용되었다.

▲ (왼쪽부터) 비 오는 하늘 아래 건초더미, 오베르, 1890.7. 네덜란드 오테를로, 크뢸러뮐러미술관 / 빗속의 다리, 파리, 1887.9-10.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반 고흐미술관
▲ (왼쪽부터) 비 오는 하늘 아래 건초더미, 오베르, 1890.7. 네덜란드 오테를로, 크뢸러뮐러미술관 / 빗속의 다리, 파리, 1887.9-10.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반 고흐미술관

다음은 고흐 생의 마지막 시기를 보낸 오베르쉬를우아즈(이하 오베르, 1890. 5〜7. 29)에서 그린 '비가 내리는 오베르 풍경'(1890. 7)과 '비오는 하늘 아래 건초더미'(1890. 7)가 있다.

'비가 내리는 오베르 풍경'은 전경과 배경을 가득 채우는 노란 들판과 사이에 어둡게 처리된 농가가 오밀조밀 형성된 오베르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앞서 소개한 그림과 내리는 비를 표현한 기법은 대동소이한 듯하나 내리는 빗줄기 사선처리 방향이 기존 그림에서는 그림 우상단에서 좌하단 방향으로, 이번 그림에서는 수직선에 가까운 빗줄기이나 조금은 그림 좌상단에서 우하단 방향으로 그어졌다는 차이가 보인다.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림중앙부의 까마귀 나는 듯한 검은 흔적들은 비오는 날의 까마귀일까.

그는 '비가 내리는 오베르 풍경'과 같은 시기에 그려진 '구름낀 하늘 아래 밀밭'(1890. 7)이라는 그림을 편지에 언급하면서 "음울한 하늘 아래 무한히 넓은 밀밭이 펼쳐져 있다. 나는 슬픔과 극도의 외로움을 표현하려는 시도를 피하지 않았어·····"라고 적었는데 일반적으로도 두 그림을 비교해 보는 느낌에서도 흐린 날보다는 비오는 날의 까마귀 나는 그림이 훨씬 더 고독하고 스산한 느낌이 든다.

장마처럼 지루하게 달려왔다. 마지막 그림 '비오는 하늘 아래 건초더미'(1890. 7)를 보자. 추수가 끝난(우리의 계절과 마찬가지로 밀, 보리는 6월에 수확함) 들판엔 누런 건초더미가 중앙에 자리하고 앞선 그림들과는 달리 내리는 비는 표현되지 않았으나 푸른색 뛴 흥건하니 고인물이 그것을 느끼기에 충분하도록 표현되었다. 넓게 펴진 흰 듯한 회색구름은 거대한 새장의 철망처럼 하늘 가득한데 여기 또한 검은 까마귀 몇 마리 날고 있다. 우울, 고독, 고립 등 자신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된 상징적 까마귀는 아닌지.

그는 이 시기에 작성한 편지글에서 자신을 새장 속의 새에 비유하며 이렇게 적었다. "철새들이 날아갈 때가 되었다. 새를 돌보는 아이들은 이 새장 속의 새는 필요한 것을 모두 가졌다고 말하지. 그러나 음울한 하늘은 폭풍우가 몰아칠 듯하고 깊은 내면에서 새는 불운에 저항한다·····. 폭풍우가 몰아칠 듯한 하늘로 날아가기를 갈망했던 새는 이제 비바람에 맞서 싸워야 한다."

어디 까마귀뿐이겠는가 들판 한가운데서 비를 흠뻑맞아 널부러진 건초더미도 자신의 처지마냥 느껴졌으리라. 그래서 오베르 시기에 그려진 두 작품은 그가 사망한 1890년 7월 29일 그달에 그려진 그림들인지도 모를 일이고 모사(模寫) 작품을 뺀 나머지 한 작품, '비가 내리는 밀밭'도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가장 고립되고 고독감을 느꼈을 생레미요양원 시절 철창밖으로 내리는 비를 보면서 그린 그림이지 않던가.

▲ (왼쪽부터) 비 내리는 교회 묘지, 누에넌, 1883.12. 오스트리아 비엔나, 알베르티나미술관 / 비 내리는 공원을 걷는 사람, 파리, 1886.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반 고흐미술관
▲ (왼쪽부터) 비 내리는 교회 묘지, 누에넌, 1883.12. 오스트리아 비엔나, 알베르티나미술관 / 비 내리는 공원을 걷는 사람, 파리, 1886.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반 고흐미술관

고흐의 마음속 뇌우가 비(雨)라는 자연현상과 조응한 결과물이 '비 내리는 풍경' 그림들이라면 비약일까. 그는 언젠가 "따뜻한 그림을 얻기 위해서는 따뜻한 마음을 가져야 해"라고 일갈했는데 그의 생레미요양원이나 생의 마지막 오베르시절은 태양을 가진 한쪽 가슴보다는 뇌우를 가진 가슴이 더 넓게 자리한 때라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비 내리는 풍경화, 캔버스 위로 내리는 비가 그렇게 이야기해 주는 듯하다.

긴 장마와 연이은 태풍 그리고 간간히 이어지고 있는 비. 수그러들지 않고 있는 코로나19에 우울감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보도다. 우리내 마음도 챙길 시기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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