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고흐의 신발
[문화산책] 고흐의 신발
  • 전기복 기자
  • 승인 2021.09.02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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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보다도 더 초상화 같은 고흐의 신발
▲ 구두 한 켤레 [그림1],. 파리, 1886년 하반기,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반고흐 미술관
▲ 구두 한 켤레[그림1]. 파리, 1886년 하반기,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반고흐 미술관

(내외방송=전기복 기자) "나는 음악처럼, 그림을 통해 위안을 주는 얘기를 하고 싶다. 나는 후광으로 상징되곤 했던 영원함을 가진 사람들을 그리고 싶다"

이는 1888년 초가을,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배경으로 한 시인 외젠 보흐(1855-1941)의 초상화를 그릴 즈음 고흐의 편지글 일부다. 그의 어떤 그림보다도 더 위안을 느끼게 하는 그림, 초상화보다도 더 초상화 같은 오늘은 고흐의 신발 그림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이네, 고흐의 그림 '구두 한 켤레'가 떠오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여행을 좋아하는 이는 스페인 피니스테라 '순례자의 신발'을, 신경숙의 소설 '모르는 여인들' 속 '세상 끝의 신발'이란 첫 이야기로 머릿속 책장을 넘기는 이도 있겠다. 이 보잘것없는 구두 한짝이 예술적 가치를 부여받는 그림이란 말인가. '그림은 언제 어떻게 예술작품이 되는가?' 라는 철학적 사색에도 관심이 닿는 이도 있겠다. 이렇듯 간단한 듯 복잡한 철학적, 미술사적 논쟁의 대상까지 된 고흐의 그림 '구두 한 켤레' 등의 작품을 보자.

독자마다 편한 신발을 신고, 그의 발자국을 따라 나서보자. 그림은 구두, 나막신, 부츠 등 다양한 단어들로 해석되고 보여진다. 그래서 통칭하여 신발(shoes)이라고 적는다.

정물화의 주제로 신발만을 선택한 그림에는 총 7점을 찾아볼 수 있었다. 신발'만'이라고 굳이 강조한 이유는 누에넌 시기에 그린 '도기병과 나막신이 있는 정물'(1885.9) 등을 의식한 결과다. 일반적으로 '밀레가 신발 습작을 한 그림을 본 영향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하고는 있으나, 당시 신발을 정물화의 주제로 삼은 것은 파격을 넘어 가히 독창적이라고 해야 옳다. 훗날 피카소의 언급은 이렇다.

"새로운 모티브를 창안하는 것은 매우 멋진 일이다. 고흐가 그린 정물화를 보라. 분명한 형태가 없는 이 감자들! 감자나 낡은 신발 그림은 환상적이다"

그렇다면 파격적으로 신발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프랑스 시기 초기에는 인상주의들의 작품을 습작하면서 단순한 신발이 연습 삼아 그리기에는 용이한 대상이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늘 구하기 힘든 모델에 대한 불평도 있겠다. 이는 모델료를 지급할 수 없는 형편과도 연관된다.

달리 상상해보면, 삶의 긴 여정 속에서 지친 영혼이며, 피로로 너덜거리는 육체를 온전히 보듬고 지탱해 준 신발의 존재를 보면서, '너, 참 고생 많았다. 어찌 그렇게도 내 삶과도 같은 네냐'고 마음이 동(動)할 때가 있지 않던가. 화가도 그런 순간을 순수하게 그림으로 표현한 것일 뿐이라는 이유는 이유 같지 않은 이유일까.

신발을 모티브로 한 정물화는 모두 프랑스와 아를 시기에 그려졌다. 프랑스 시기에 그려진 그림으로는 '구두 한 켤레'(1886년 하반기, 그림1), '구두 세 켤레'(1886년 12월, 그림2) 등 총 5점이다.

아를 시기의 두점 '나막신 한 켤레'(1888년 3월초, 그림6)와 또 다른 '구두 한 켤레'(1888년 8월, 그림7)를 연결시켜 보면 마치 파노라마처럼 고흐의 그림뿐만 아니라 삶의 여정을 보는 듯하다. 색채의 밝고 어두움이며, 낡고 해진 구두에서 단정한 구두로, 작업화며 부츠 같은 신발에서 나막신 그리고 노란색 머금은 간결한 구두까지 그의 생활상을 읽을 수 있는 변화를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1886년 하반기 작품인 '구두 한 켤레'를 보자. 고흐의 신발 그림 중 가장 많이 회자되는 그림이 아닐까.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1889-1976)가 고흐의 '구두 한 켤레'라는 작품을 인용해 "예술의 본질은 무엇이었을까?"를 논하면서 "신발이라는 존재자를 통해서 농촌 아낙네의 삶이라는 존재의 드러남에 예술의 본질이 있다"고 하여 더 유명해진 그림이다. 하이데거는 고흐의 특정 신발 그림을 지칭한 적은 없으나 그의 논문 '예술작품의 근원'(1952)에서 읊조린 '구두 한 켤레'는 다음과 같고 그의 해석과 가장 잘 어울리는 작품이 이 작품이라는 심정을 지울 수 없게 된다.

"너무 오래 신어서 가죽이 늘어나버린 신발이라는 이 도구의 안쪽 어두운 틈새로부터 밭일을 나선 고단한 발걸음이 엿보인다. ······ 신발 바닥으로는 저물어가는 들길의 고독함이 밀려온다. ······ 이 도구는 대지에 속해 있으며 농촌 아낙네의 세계속에 포근히 감싸인 채 존재한다. ······"

하이데거는 농촌 아낙네의 신발이라는 도구 즉 존재자가 그림을 통해 어떻게 그 성질을 드러내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에 "예술의 본질이 있다"는 견해다.

반면, 미국의 미술사학자 메이어 샤피로(1904-1996)는 고흐가 이 그림을 그릴 당시 파리에 정착해 있었고 화가로서의 고단한 삶을 신발에 투영시킨 자화상과도 같은 작품으로 "신발의 주인은 고흐 자신의 것"이라고 반박한다.

고흐가 파리 입성과 동시에 페르낭 코로몽(1845-1924) 화실에서 수학할 때 동료였던 프랑수아 가우지의 글에 의하면 고흐는 벼룩시장에서 낡은 신발을 구매했고 신발을 진지하게 그렸다. 이 시기와 겹치는 신발이 '구두 한 켤레'라는 작품 속에 등장하는 구두다. 많은 이들이 이를 사실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도 지친 육신을 지탱하며 낡고 해진 모습의 '구두 한 켤레'가 마치 그림에 대한 열정으로 돌보지 못한 자신의 처지처럼 느껴져, 자신 인양 그린 자화상 같은 그림이라 주장하고 싶다.

이렇게 앞창 벌어지고 가죽이 낡고 해어질 정도면 분명 누에넌이며 안트베르펜 시기부터 노정을 함께한 신발임에 틀림없는 모양새다. 갑자기 신발을 그리기 시작한다는 것은 애착이나 심리적 변화를 동반하지 않고는 쉬운 일이 아니다. 과연 무슨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파리 입성과 함께 파리적 분위기에 맞는 외관이 필요했을 것이고 새 옷과 새 신발을 구입한 것은 아닐까. 자신의 처지같이 낡아빠진 모양새에 대한 연민, 어려운 시기를 함께한 존재자에 대한 가슴으로 기억해야 될 이별의식의 산물은 아닐까. 1886년 3월 동생 테오가 파리 생활을 위해 온 형 고흐를 루브르 미술관에서 만났을 때의 회상을 보자.

"얼굴이 쭈글쭈글하고 일그러져 병자처럼 보였다. 충치와 깨어진 이로 치과에 데려가 틀니를 해 넣고 새 옷을 사 입히자 말끔해졌다"

이와 같은 어려운 시기를 함께한 신발이 '구두 한 켤레'의 주제가 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도외적 분위기의 옷맵시에 잘 어울리는 부츠나 구두 즉, 그림 '구두 세 켤레'가 새로 구입한 신발이고 그려진 '구두 한 켤레'는 농촌을 주유하던 시절부터 신고 다녔던 신발로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닐 터.

▲ 구두 한켤레 [그림3]. 파리, 1887년초, 미국 볼티모어, 볼티모어 미술관
▲ 구두 한켤레[그림3]. 파리, 1887년초, 미국 볼티모어, 볼티모어 미술관

1886년에 그려진 '구두 한 켤레'는 화면 앞쪽으로 바짝 붙여 신발을 배치함으로써 오랜 기간 함께한 신발에 대한 애착을 느끼게 한다. 일명 '고흐의 의자' 그림에서의 의자 배치와도 같다. 배경 공간이 밝고 넓게 자리잡아 마치 걸어온 여정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듯하다. 길게 늘어진 신발끈이 묘하게 꼬인 모양새도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래서인지 앞서 이야기된 철학이니 미학 아닌 미술사적 논의를 차치해도 간결하나 간단하지 않은 그림으로 느껴진다. 각을 살짝 비틀어 놓은 신발에서 낡은 신발이 그 효용가치를 다한듯한데도 역동감을 느낄 수 있게 된다.

▲ 구두 세 켤레 [그림2]. 파리, 1886년 12월, 미국 케임브리지, 포그 미술관(하버드대학교)
▲ 구두 세 켤레[그림2]. 파리, 1886년 12월, 미국 케임브리지, 포그 미술관(하버드대학교)

1886년 12월에 그려진 '구두 세 켤레'를 보자. 사선으로 늘어선 구두는 우측상단 소실점을 향해 검게 무한한 공간으로 처리된 곳까지 한걸음 한걸음 걸어온 발자국이자 땀방울 같은 흔적으로 반복해서 놓여있을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 '이것봐라, 밑창이 구멍 나도록 걸었어.’ 뛴만큼 혓바닥을 들어내고 헐떡이듯 뒤집어 놓은 구두, 어느 한짝 온전한 것이 없다. 누런빛 도는 천이며 하늘에서 드는 밝은 빛이 쉼없이 걸어온 삶을 보듬고 조명해 주는 듯하여 위로를 준다.

1887년초에 그려진 '구두 한 켤레' 그림4, 그림5는 뒤집어 놓은 한쪽 신발, 신발을 놓은 방향이 좌우로 다르나 구도는 같다.

▲ 구두 한 켤레 [그림4]. 파리, 1887년 봄, 개인 소장
▲ 구두 한 켤레[그림4]. 파리, 1887년 봄, 개인 소장

상대적으로 목짧은 구두의 신발 끈도 짧다. 꼬인 신발 끈을 화면 밖까지 그린 작품에 더 관심이 간다. 푸른 색상이며 재빠른 붓질로 생기를 담은 바닥 위에 화면을 가득 채우는 연한 갈색구두 한 켤레를 그린 그림이다. 화면 좌측의 구두 그림자며, 에칭한 듯 수많은 가는 빗살무늬들로 표현된 배경은 잡지에 삽화를 그려주고 생활비를 벌고자 했던 헤이그 시절의 열정과 생활고의 난관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 시기의 그림은 더 밝은 색과 빛의 효과를 이용했다. 군데군데 흰색과 푸른색을 칠한 것이 그러하고 낡은 가죽이나 꼬인 신발 끈의 굵기며 생동감, 신발 밑창에 박힌 닳은 징이 빛을 받아 빛난다. 그의 숱한 노력을 상징하고 지난날의 꿰적을 고스란히 담은 듯한 포스다.

힘든 하루일을 끝낸 그를 안온한 쉼터로 안내하듯 화면 밖까지 그려진 신발 끈은 산모와 이어진 탯줄마냥 느껴진다. 또한 힘든 여정이며 현실과 연결된 듯도 하다. 그래서인지 우측 하단에 기입된 그의 서명 옆 ‘87’이라는 숫자가 작품 제작년도를 넘어 '오늘 여기까지' 살아온 자신의 모습을 증명하듯 선명하게 보인다. 그의 그림에서 흔치 않은 서명법이다.

또 다른 1887년 상반기에 그려진 '구두 한 켤레'(그림5)는 황혼녘 빛깔을 바탕으로 한 배경처럼 다소 곱게 늙은이가 왼발을 오른발 뒤로 꼰 모양새를 한 신발 배치다. 구두 옆면 밑창을 살짝 들어 생동감을 더했다.

▲ 구두 한 켤레[그림5]. 파리, 1887년 상반기,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 구두 한 켤레[그림5]. 파리, 1887년 상반기,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가죽 표면에 거친 고등색 붓질이 낡은 신발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시골과는 달리 파리 시내를 오가던 고흐의 변화된 의상을 가늠해 볼 수 있는 부츠 형태의 구두다.

여기까지가 그가 파리 시절에 신발을 주제로 그린 정물화들로 이 시기 가장 독창적인 그림들이라 할 수 있다.

아를 시기, 신발을 모티브로한 정물화는 단 두점이다. 1888년 2월 20일, 그가 남부 아를에 도착했을 때는 나흘여 계속해서 눈이 내렸다. 거리를 오가는 아녀자들이 치맛단을 올려잡고 다녔다. '창문에서 본 푸줏간'이란 그림이 이를 말해준다. 고흐도 새로운 환경에 맞는 신발이 필요했을까.

▲ 나막신 한 켤레[그림6]. 아를, 1888년 3월초,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 나막신 한 켤레[그림6]. 아를, 1888년 3월초,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그가 1888년 3월초에 그린 '나막신 한 켤레'(그림6)는 굽 높은 한쌍의 가죽 나막신이다. 말쑥한 차림새가 연상된다. 반복해서 선을 긋은 짧은 붓자국은 존재의 그림에 대한 열정을 드러내기에 충분하다. 또한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신호와도 같은 모양새다. 여타 정물화와는 달리 신발 놓인 방향이 금방이라도 문을 나설 듯 가지런히 돌려져 놓였다. 훗날 자화상 배경에 등장하는 아우라처럼 타오르는 선처리를 연상하게 한다. 신발이 놓인 방향과 일치되게 선을 그어 흐름을 타듯 희망차게 앞으로 나아가는 느낌을 준다. 이제까지 이렇게 밝고 단순 경쾌하게 그려진 신발 정물화는 없었다. 아를에 당도하여 강렬한 빛과 생동하는 봄이 선사하는 다양한 모티브들을 만끽하는 자신의 모습과도 같은 그림이리라.

▲ 구두 한 켤레[그림7]. 아를, 1888년 8월,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 구두 한 켤레[그림7]. 아를, 1888년 8월,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마지막 한 작품, 1888년 8월에 그려진 '구두 한 켤레'(그림7). 그해 7월에 그린 '작업하러 가는 화가'가 신은 신발을 묘사한 것일까. 신발 앞창이 닳고 가죽이 굳은 듯 울퉁불퉁 변형되고 낡았다. 먼 거리를 오가느라 지친 사람처럼 신발 그림자가 떨리듯 묘사되었다.

신발이 놓인 빛바랜 빨간 타일은 '담뱃대가 놓인 빈센트의 의자'에서 묘사되었던 바닥의 모양새와 같다. 놓인 의자가 신발로 오버랩 되는 지점이고 신발도 고흐 자신의 '드러냄'으로 읽힌다.

신발!, "네가 누구냐 물으면, 그대 발치수와 발가락 모양을 말해주리" 시인의 식구처럼 헌신 한짝이 우리들을 잘 헤아리고 위로하며 보듬을 수 있을까.

고흐는 이러한 신발에 고달팠던 자신의 모습을 투영시켜 자화상과도 같은 작품을 여럿 남겼다. 신발의 쓰임새나 주인이 누구이며, 화가의 시대적 상황 등을 알고 보면 더 풍부한 감상이 된다. 그러나 어려울 것도 없다.

감히 이렇게 읊조려 본다. 지금 여기 현관앞에 놓인 누군가의 신발 한 켤레를 그냥 보아 넘기지 않는, '오늘 힘들었지, 내일도 잘할 수 있어' 속삭이며 신발을 가지런히 돌려놓는 마음가짐이면 충분하다. 이 정도면, "그림을 통해 위안을 주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던 그의 마음과 조응하지 않을까. 고흐의 명화를 대하듯 "발냄새마저도 따스히 보듬고" 서로 위로하며 코로나 시대를 이겨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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